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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부산총회 주제로 설교하기

최병학 (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1-30 (수) 07:02 10년전 2822  
WCC부산총회 주제 설교
 
다시는 사망과 애통,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이사야32:16-20, 요한계시록 21:1-4, 누가복음 2:14)
 
1. 불안사회와 한국교회가 서 있는 자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사회’라고 말합니다. 가령, 대학생들은 졸업을 하게 되면 취업이 막막합니다. 직장인들도 아프거나 은퇴하게 되면 불안해 합니다. 여성들은 아이를 가지게 되면 해고와 육아 걱정에 걱정근심이 늘게 됩니다. 내일은 기약할 수 없고, ‘빠름 빠름’을 외치는 ‘의자놀이’의 경쟁 사회 속에서 금융자본은 빠르고 간편한 대출을 권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서민들의 빚은 계속 증가합니다. 기업의 정리해고는 너무 쉬워졌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20대부터 빚더미에 짓눌린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고립이 됩니다. 생존이냐 낙오냐를 선택해야 하는 불안사회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갖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자살률이 높은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이런 불안사회의 대안이 됩니까? 한국 교회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다시 프로테스탄트: 한국교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복있는사람, 2012)를 펴낸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 1기의 파트너로서 산업사회로, 도시화로, 민주화로 숨 가쁘게 달려온 개신교가 용도폐기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합니다. 공룡이 되고자 한 한국 교회가 거대한 몸통, 작은 두뇌를 갖고 기후변화에 취약해 멸종했던 공룡의 전철을 밟을 수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불안사회 속에 개신교는 개신교다움을 잃어버려 불안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대안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세적 승리주의’로 회귀해 사랑, 평화, 화해, 용서, 희생, 회개, 낮아짐보다는 전쟁, 승리, 정복, 영광, 권세를 지향하며 성장주의와 승리주의로 한 방만을 노리는 로또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교회의 위기의 시대에, 2013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는 이런 불안한 한국사회와 종교개혁의 정신을 망각한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리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정의와 평화의 음성이 이번 총회를 통해 한국을, 또한 세계를 새롭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2. WCC의 주제와 한국교회
 
이번 WCC 총회의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입니다. ‘정의, 평화, 생명’을 주제로 삼고, 하나님의 생명과 이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고민하는 총회입니다. WCC는 전 세계 130여 개국, 349개 교단의 6억 인구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부산 총회에는 360여 세계교회의 교단들이 파송한 6,000여명의 대표들이 모입니다. 방문자들까지 합하면 10,000여명의 전 세계의 교인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는 축제입니다.
 
이 축제의 시작은 시대의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비극 후에 WCC는 평화와 정의를 추구함으로 세계 질서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데 합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자신들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축복이 아니라, 굶주리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 인종차별과 인권이 무시되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분명한 반대, 인류를 파멸시키는 핵에 대한 반핵운동, 나날이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의 문제,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극복, 지배와 탐욕, 불의한 경제구조 등 다양한 지구촌의 문제들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표명하고 정의와 평화운동을 벌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대회를 계기로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지 못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하고, 양극화의 질곡 앞에서 좌절하는 생명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였음을 뼛속 깊이 반성하고 성숙해지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새롭게 역사를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3. 다시는 사망과 애통,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오늘 본문 신약의 말씀은 종말의 때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지금 죽어가고 애통하고 곡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 다시는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한 알의 밀알로 시작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이것은 구약의 이사야서에도 나타납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32:16-20).”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땅에는 사람들 간의 평화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의 광야에 거하는 정의로 아름다운 밭에 거하는 공의로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화평이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인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4. 눈의 타락의 역사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간들의 아픔과 슬픔을 거두어 주시고자 합니다.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정의와 공의가 넘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하늘에는 교만을, 땅에는 미움을 건축하고, 정의와 공의를 파괴하고 타락의 역사를 세워왔습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역사하기 까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 불안사회인 타락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마귀와 사탄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 2004)에서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는 말합니다. “눈이 있는 한 인간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고 합니다. 본다는 것이 갖는 역사적,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시각의 지위에 따라 서구 문화는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문학, 역사, 미술, 신학, 철학, 종교, 신화 등을 아우르며 시각문화에 관한 진지하고 폭넓은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인간은 보는 것(見)을 통해 사유를 합니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언제나 부분만을 파악하는 것입니다(배제의 원리). 따라서 인간은 부분을 전체인 양 틀지움으로 개념을 얻고, 세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눈은 감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성을 타자화하는 남성의 눈, 식민지를 배척하는 제국주의의 시선 등. 그러나 이러한 ‘눈의 폭력성’은 더 나아가 자신을 또한 감옥 속에 가두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항상 눈의 왜곡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여 개념화하는 이러한 시각(visus)의 ‘폭력’은 단어 속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각을 의미하는 단어와 ‘힘(vis)’을 의미하는 단어의 어원이 모두 ‘나는 본다(video)’에서 유래한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곧, 눈은 타자를 자기 안에 가두는 감옥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눈은 ‘악한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할 때 선악과를 보고 욕심이 난 것은 악한 눈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인류의 역사는 악한 눈이 지배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선한 눈’의 흔적은 사라지고, 온통 ‘악한 눈’만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불안사회는 악한 눈들이 모여 있는 사회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목회자의 눈이, 성도들의 눈이 악한 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그 악한 눈은 보지 못합니다. 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 악한 눈은 외면합니다. 과정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그 악한 눈은 잊어버립니다. 결과가 터무니없음에 그 눈은 비판조차 하지 못합니다. 법이 생명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서도 악한 눈은 자신의 안위만 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악한 눈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임철규 교수는 “그래도 눈물을 흘릴 수 있으니, 인류에겐 희망이 없지 않다”고 말합니다.
 
‘보는 눈, 욕망하는 눈’ 대신 ‘눈물을 흘리는 눈’, ‘윤리적인 눈’을 통해 구원의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구원 불가능성과, 그 불가능성 안에서 파국을 끝없이 유예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예수의 ‘눈물 흘리는 눈’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절대적 사랑을 위한 절대적 희생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예수를 통해 우리는 ‘선한 눈’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시작된 악한 눈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 흘리는 선한 눈을 통해 새롭게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선한 눈은, 눈물 흘리는 눈은 생명과 평화, 정의를 사모하는 눈입니다.
 
5.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레미제라블> 속 생명, 평화, 정의
 
2013년 1월에 우리는 몇 편의 영화를 통해 생명과 평화, 정의의 주제들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화 할 수 없는 ‘타자와의 공존을 보여주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3)와 말 그대로 비참한 사람들인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2012)>이 그것입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배가 난파되고 구조보트에 남게 된 호랑이(타자)와 소년(주체)의 생존이야기입니다. 나를 잡아 먹을 수 있는 호랑이와 그 좁은 보트에서 소년이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소년은 수영과 동물의 본성에 능통했습니다. 둘째, 이성을 중시했던 아버지 덕분에 소년은 동물을 낭만화하지도 의인화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바라보며 생존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호랑이와 ‘적대적 긴장관계와 책임감’은 소년이 긴 표류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는데, 이를 우리는 ‘공존의 기술 익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의 역설적인 비결이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년을 살아남게 한 건 종교적 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소년의 심성이 그를 마침내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말합니다. “소년에게 종교는 우주에 가득한 신성을 사랑하는 일일 뿐이다. 그가 본명 대신 쓰는 이름 파이는 무한히 숫자가 펼쳐지는 원주율이다. 그는 입속에 전 우주가 담기는 무한소와 무한대의 상상을 통해 허무와 나태를 견디는 심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무한대의 파이(Φ)로 존재할 때 자기화 할 수 없는 타자와 공정과 정의를 통한 평화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정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영화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층민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과 좌절, 사랑과 탐욕이 교직하는 대서사시입니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정치체제는 공화정, 왕정, 입헌군주제를 거치며 굴곡을 겪었지만, 프랑스의 삼색기에 새겨진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는 근대 민주주의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이 삼색기를 통해 유비하여 본다면, 19세기는 자유의 세기, 20세기는 평등의 세기, 그리고 21세기는 박애의 세기, 곧 사랑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 관계성 속에서 토착화될 때 생명, 평화, 정의의 이름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의 찬양은 영화 <레미제라블>의 피날레 합창곡,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에서도 ‘정의’라는 주제로 변주되어 들립니다. 그 노래를 들어 보세요. 영화의 감동과 함께 이 불안한 사회에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망각한 이때에 우리의 사명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난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그것은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민중의 노래이다!
네 심장의 박동이
북소리에 울려질 때
내일이 오면 새 삶이 시작되리라!
우리의 성전에 함께 하겠는가?
누가 굳건히 우리와 함께 서겠는가?
바리게이트를 너머에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낙원이 있을까?
함께 싸우자
당신은 자유를 얻을 것이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난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그것은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민중의 노래이다!
네 심장의 박동이
북소리에 울려질 때
내일이 오면 새 삶이 시작되리라!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가?
우리의 깃발이 나부낄 때
누군가는 낙오하고 누군가는 살 것이니
일어나 기회를 잡지 않겠는가?
순교자의 피는
초원을 물들일 것이다!
 
 

최병학(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1-30 (수) 07:03 10년전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총회의 주제를 풀어쓴 설교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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