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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군요. 제가 만약 정인구 목사님이었다면 제게 이런 질문과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교회파괴분자’로 추측되는 사람에게 발언기회를 일부러 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혹시 저 ‘교회파괴분자’를 전도해서 새 사람을 만들거나 아니면 끝장토론으로 묵사발을 만들어서 다시는 이 게시판에 얼굴들고 나타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하셨다면 의도자체가 그다지 생산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초월적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와 사색은 설득이나 승리를 목표로 한 토론과 논쟁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런 행위와 사색이 일정한 집단적 경향성을 보일 수는 있지만 노선의 문제도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나눔의 글을 올렸는데 님은 그것을 논쟁을 유발하기 위한 신학적 도발로 받아들이셨다면 유감입니다.
저 사람의 사고는 왜 나와 다를까, 그것이 궁금해서 정식으로 질문하셨다면, 빙고!
얼마든지 우리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종교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다는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데, 어떤 분들은 고뇌, 눈물, 경건, 아픔 같은 것이 주제인 모양입니다. 암튼 좋습니다. 느낌과 코드가 달라도 얼마든지 대화 나눌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님도 그렇고 님이 인용하신 어떤 교역자도 그렇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운위하면서 “우리도 예전에 다 그런 것을 공부했고 경험했다” 는 식의 표현만큼은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얼치기 사상전력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 “나도 과거에는 막시스트였는데 철이 들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유민주주의자가 되었다”는 식의 넋두리를 듣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과거에 막시스트였다는 그 노인은 아마도 자본론의 서문조차 읽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자유민주주의자가 되었다" 는 지금은 ‘시장경제’와 ‘최선을 다 하는 우주적 개체로서의 인간이 내포하는 철학적 본질’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표피적 고민조차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습과 사유의 체계를 제대로 구축한 사람이라면 인식의 단계를 그런 식으로 분류해서 자기의 영적 과거를 회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성서비평학을 수용하는 신학을 의미하나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성서비평입니까? 그런 건 님들이 과거에 다 겪었다는 1980 년대가 아니라 1920 년대에 다 끝난 거 아니었나요?
질문에 보면 “성서는 비평대상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혹시 비평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비평이란 대상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과정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비평없이 성서건 뭐건 아무것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암튼 저는 지금 새삼스럽게 성서비평같은 건 할 생각 없습니다. 바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총론적으로 빨리 빨리, 가급적 짧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부활이 신앙이냐 신화냐, 이렇게 질문하셨는데,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의미있는 질문으로 성립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체험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며 현대인들에게 그 사건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질 수 있는가,,, 라고 말이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 탐구하고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신학의 사명 중 하나일 것 입니다. 사실 ‘부활사건 체험’은 그때까지 유대인들이 가져왔던 신관이, ‘예수라는 사나이의 삶과 죽음을 통해 투영된 하나님의 새 본질’로 인해 혁명적으로 바뀐 계기가 되었는데, 새로 투영된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놓고 토론하는 게 이 주제의 핵심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설명하시는 것이 교역자들이 하실 일이지요. 다짜고짜 신자들에게 사상검증하듯 부활이 신앙이냐 신화냐 라고 질문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 입니다.
그런 류의 질문은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사망한 예수가 다시 소생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하늘나라로 날아갔다는 것을 historical fact 로 믿느냐 아니냐 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류의 질문때문에 한기총류에 속한 사람들과 반기련류에 속한 사람들이 얼토당토않은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둘러싸고 한심한 말싸움을 반복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 류의 질문을 토론 주제로 삼는다면 기독교 경전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 멋대로 조롱하고 공격해도 교회는 단 한 마디의 반론다운 반론도 하지 못한 채 동어반복적인 주문만을 중얼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 것 입니다.
거기다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질문까지 덧 붙인다면 더 점입가경이겠지요.
북미와 유럽의 교회들이 부활신앙과 창조신앙을 가르치지 않아서 몰락했다고요?
잊으셨나요. 남코리아 교회역사는 200여 년에 불과하지만, 북미-유럽 교회 역사는 유대교까지 합치면 6 천 년까지도 늘려 잡을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과 창조신앙을 가르치지 않은 게 아니라 더 이상 가르칠수 없다는 것을 교회 스스로가 자각한 것 입니다. 그 자각이 소극적이나마 처음으로 교회기관의 공식적인 의사로 표현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51 년 전인 1962 년부터 1965 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열린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기독교대중이 비록 ‘사망선고를 받은 옛 교회’는 떠났지만 The Ground of Being 을 추구하는 초월적 탐구가 중단된 것은 천만에 아닙니다. 불과 수 십 년 지났는데 서구 기독교 자체가 몰락한 거라고 단정하는 것은 속단입니다.
결론과 만족이 누군가에게 의해 이미 만들어져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4 세기적 신관이 인류에게 남겨놓은 가장 큰 해악은 역시 진리 문제를 단순교리화하여 인간의 상상력과 비평능력을 마비시키고, 무엇보다 인간을 아주 spoiled 한 영적 게으름뱅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일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