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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서영이>의 아버지, 수컷, 남자의 인생(사64:1-8)

최병학 (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3-10 (일) 10:08 11년전 3951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내 딸 서영이>의 아버지, 수컷, 남자의 인생(사64:1-8)
 
 
1. 드라마 <내 딸 서영이>의 아버지, 수컷, 남자
 
최고 48.5%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내 딸 서영이>가 끝이 났다. 기존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소극적 아버지 대신, 아버지 이전에 남자로, 한 인간으로 삶의 희노애락을 겪는 아버지들의 인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아버지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실재로 드라마의 소현경 작가는 시나리오 구성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한센병에 걸린 아버지를 둔 한 여자가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말한 뒤 결혼했다는 사연을 지인에게 듣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어요. 우리 세대 이야기는 아니지만 실제 이야기에요.”
 
드라마 내용의 핵심은 주인공 서영이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하고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3종류로 잘 보여주고 있다.
 
서영의 아버지 이삼재를 통해서는 자식에게 ‘최고의 부모가 돼주고 싶어 버둥대는’ 아버지 본연을 모습을, 강기범 사장을 통해서는 ‘성공에 치중하는 수컷들의 본성’을, 연약한 남자 최민석을 통해서는 ‘가정과 회사 양쪽 모두에서 소모품’으로 삶을 살다가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새롭게 찾는 남자들의 로망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이 계급을 만드는 사회이다. 부모의 능력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회라는 말이다. 능력 없는 부모를 만난 자식은 삶이 팍팍해서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는 자식 키우느라 등골이 빠진다며 자식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런 세상이다.
 
어떤 능력을 가진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빈부격차의 계급을 갖게 되고, 인생의 질이 달라지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이 능력 있는 아버지를 만들어줄, ‘부자 할아버지’라는 농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먹고 성장한다. 성장해서 자립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인간에게, 절대적인 모성애와 부성애가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 멸종했을 것이다.
몇 년 전 현대판 고려장이라 부르는 일이 있었다. 멀쩡한 직업과 부양 능력이 있는 자식들이 노부모를 양로원이나 길거리에 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멀쩡한 정신을 가진 부모들은 거의 대부분 끝내 자식들의 이름이나 직업, 주소 등 그 어떤 정보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소현경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식한테 버림받은 아버지 심정은 어땠을까. 그 감정을 드라마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게다가 요즘은 우리가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됐잖아요. 부모가 무능하다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종편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도 가족 간의 ‘갈등의 조정자’인 아버지, 곧 가부장이 보이지 않는다. 어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교계에도, 정치에도 원로와 어른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삭제되어 버린 것일까? 잊혀져버린 것일까!
 
아버지의 본질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 드라마, <내 딸 서영이>의 소현경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들도 첫사랑의 경험을 거치고 멋진 사내로 살고 싶었을 텐데 자식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대부분 결혼하고 가장이 되면 이런 걸 다 포기하고 살잖아요. 아버지도 가난한 부모 만나서 힘들었을 텐데, 부모들은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요. 자식들은 이런 ‘디테일’을 모르죠.”
 
두 딸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부모가 돼주고 싶어 버둥’대거나, 혹은 ‘성공에 치중하는’ 일만 아는 수컷들의 본성만을 추구하거나, ‘가정과 교회 양쪽 모두에서 소모품으로 삶을 살다가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새롭게 찾아 나서거나 하는 이 세 가지 길이 어쩌면 나에게, 아니 이 땅의 아버지들 앞에 놓여진 세 갈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답지만, 슬픈 운명이다.
 
2. 아버지란 무엇인가?
 
융이 설립한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분석심리학자 루이지 조야의『아버지란 무엇인가』(르네상스, 2009)라는 책에서 저자는 “서구 사회, 나아가 오늘날의 인류 전체가 아버지 상을 잃어버림으로써 거대한 공황 상태에 처했다”고 한다.
 
조야는 역사적, 심리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아버지의 발생을 추적한다. 특히 ‘심리학적 관점’에서 ‘원형’, ‘집단무의식’ 같은 융의 심리학 개념을 근거로 서구 사회 집단무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아버지 상의 원형을 찾아 서구 문화의 시원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부터 역사를 밟아 내려온다.
 
아버지는 선사시대에 탄생했다. 여기서 조야는 아버지 곧, ‘부성’과 ‘남자’를 구분한다. 남자가 생물학적 속성이라면, 부성은 사회적·문화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남자라고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과 욕구에 직접적으로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인내, 의지, 지성으로써 삶을 계획하고 끌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책임감이야말로 부성의 핵심 특징이 된다. 원시 인류가 진화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런 특성을 지닌 아버지를 탄생시켰고, 그 탄생은 문명의 출발과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에서는 이러한 ‘문화적 형성물인 아버지는 그 내부에서 ‘원시적 남성성’과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다툼을 신화적 장대함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그리스의 트로이 정복을 그린 <일리아스>의 경우, 부성과 남성의 대결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헥토르는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남성적 힘의 분출 욕구만을 따르는 거친 전사이다. 이러한 <일리아스>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는데, 남성이 부성을 이겼다는 사실은, 부성 내부의 남성이 지닌 힘의 파괴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트로이 함락 이후,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그린 <오디세이아>에서는 부성이 이긴다. 여기서는 ‘고향에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와 ‘한없이 충동에 이끌리는 오디세우스’의 대비로 부성과 남성의 대결을 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기나긴 유혹과 충동의 항해를 끝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아버지의 귀환이며 남성에 대한 부성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고대세계에서 남성성에 승리한 아버지는 18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숙청당했으며, 산업혁명은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밀어 넣어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남성성을 잃어버린 우울증 걸린 아버지들은 술에 찌든 불량한 아버지가 되어 남은 권위마저 잃어버렸다.
 
따라서 현대에 들어서며 인류는 아버지의 상실을 대신할 다른 것을 찾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파시즘(전체주의)이었다. 파시즘은 무력한 아버지들을 규합하고, 국가주의를 외치며 텅 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조야의 말대로 “파시즘이 겉보기에는 가부장적 권위의 발현 같지만, 실은 부성 상실의 반작용이었다.”
 
게다가 후기현대(포스트모던)의 부친살해는 현대의 부친상실이라는 질환을 더욱 그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파시즘이 부성 상실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포스트모던은 해결이 아니라, 아버지의 무덤까지 파내어 화장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명의 위기와 그 극복은 ‘부성의 부활’인가, 아니면 ‘모성의 재림인가’라 할 수 있다.
 
3.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오늘 본문 이사야 64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백 이전의 이스라엘은 어떤 상태인가?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5절),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7절)라고 한다.
 
공의를 행하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과 평화의 길을 따르지 못한 이스라엘, 그리하여 부정하여 더러운 옷 같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붙잡지 않는 아버지 상실의 극한을 보여준다. 서영이는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상실’ 그 극한에서 여호와를, 공의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9절)이라 고백한다. 아버지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이다.
 
조야 역시 중세 때는 고대의 그 찬란한 아버지의 권위를 ‘천상의 신’으로 돌렸다고 한다. 따라서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남은 것은 ‘형제 관념’과 ‘평등 관념’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존엄한 속성을 하나님께만 돌리고, 인류는 모두 형제라는 평등 관념을 꽃피운 것이다. 어쩌면 ‘최고의 부모’가 되어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 아버지는 첫째, 구약에서 고백되는 바,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이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오.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32: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63:16)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렘3:4)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둘째,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인 신자들의 아버지’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셋째, 결론적으로 성서의 아버지는 ‘모든 창조물의 근원’이신 아버지이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12:9)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4. 아버지의 고뇌
 
사순절 넷째주일이다. 구약의 아버지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나왔을 때 용서하고 받아주었다면 신약에서 아버지의 고뇌는 또 다른 것이다. 역사에 반복되는 ‘창조-타락-징벌-회개-용서’의 매듭을 단번에 끊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강림하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최병학(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3-10 (일) 10:09 11년전
사순절 설교 주제로 '아버지-아들-십자가 고난-부활' 시리즈로 엮어 봅니다.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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