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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서영이>, <착한남자> 신데렐라 판타지

최병학 (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2-10-22 (월) 11:19 11년전 4941  
  내 딸 서영이.bmp (553.6K), Down : 9, 2012-10-22 11:19:41
<주만 바라볼지라Ⅲ-누가복음>


사람으로 오신 주(슥6:9-12)



1. 신데렐라 판타지

가을 안방극장에 시청률 최강자 둘이 있으니, 바로 <내 딸 서영이>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이다. 각각 지상파 주말극과 수목극 1위인데, 아버지와 딸의 애증과 화해의 이야기와 가진 것 없는 한 남자의 복수담이라는 점에서 약간 다르지만, 이 두 극의 공통된 코드는, 곧 시청자가 공감하는 코드는 신데렐라 판타지이다.

신데렐라는 17세기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가 쓴 민담집『옛날 이야기』의 한 편인 <상드리용>이 영역본에서 <신데렐라>로 옮겨지면서 그 이름이 유명해졌는데, 이러한 판타지는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 고전소설 <콩쥐팥쥐>역시 동일한 이야기이다. 신데렐라는 서양판 콩쥐요, 콩쥐는 한국판 신데렐라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에서 떨어뜨린 신발을 빌미 삼아 신분이 수직 상승한다는 이러한 판타지는 동서양 할 것 없이, 신분사회에서 없는 자들의 계급 상승 욕망을 구현하여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성공담이 판타지인 이유는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의 마법이 시청자를 빨아들이고, 드라마의 판타지에 시선을 빼앗긴, 생활에 지친 대중은 그곳에서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만족을 대리 충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데렐라 판타지는 부가 편중되어 계급 격차가 심한 사회일수록 시청자들을 더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지금 안방극장에서의 ‘신데렐라의 귀환’은 삶의 고단함, 힘겨움의 역설일터, 우리 삶이 초라해질수록 커가는 이 판타지를 조장하는 사회는, 현실은 어떤 상태란 말인가!

2. 디지털 파워와 로봇사회

최인식은『예수, 그리고 사이버 세계』에서 고대는 신화(mythology), 중세는 신학(theology), 근대는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틀에 입각하여 인간과 세계이해가 가능했다면 현재는 기술(technology)이라고 말한다. 지난 세기를 대표하던 가장 큰 ‘힘’이었던 핵이 냉전종식과 더불어 끝나자마자, 또 다른 테크노 파워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은 디지털 파워(Digital Power)인데, 비트(bit)와 네트(net)의 무시간적 결합에서 오는 이러한 힘의 크기에 따라 헤게모니가 결정될 것이라는 것이다.

로봇 공학 전문가인(이들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에 집중돼 있다) 미국의 한스 모라벡(H. Moravec)은 마음의 자녀들(Mind Children, 1990)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미래사회는 사람보다 수백 배 뛰어난 인공두뇌를 가진 로봇에 의하여 지배되는 후기 생물사회가 될 것이므로 인류의 문화는 사람의 혈육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넘겨받는 기계, 곧 ‘마음의 자녀들’에 의하여 승계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다른 저작인 로봇(Robot, 2000)에서는 2050년 이후 지구의 주인이 인류에서 로봇으로 바뀐다는 대담한 논리를 전개했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 존재 증명도 서버를 통해, 기계, 사이보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이버-주체’, ‘사이버 스페이스 하나님 나라’, ‘사이버-예수’, ‘사이버-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이비(似而非)가 될지, 새로운 미래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는 신데렐라처럼 신분상승을 바라지 않고, 도리어 신이 인간이 되신, 나아가 기계가 아니라, 로봇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감정, 아픔, 슬픔, 기쁨을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었다.

3. 사람으로 오신 주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갔더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branch out)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6:9-12)고 전한다.

‘싹(branch, 가지)이라 이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뜻하는 것이다. 바벨론에 사로잡힌 자, 그리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싹이 되는 주님인 것이다. 그 싹은 ‘자기 곳’(his place)에서 돋아난다고 하였는데, 자기 곳이란 바벨론 포로 살이 이후, 돌아온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 곧 무너지고 파괴된 곳을 뜻한다. 따라서 희망이 없고, 무너진 성전,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로 오셔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 세상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오신 예수는 누가 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4. 누가가 전하는 예수: 우시고 슬퍼하시는 인간 예수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웃고, 울고 아파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누가가 전하는 예수는 부가 편중되어 계급 격차가 심한 당시 로마 지배하의 이스라엘 땅에 오시어 평등한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다. 곧 울퉁불퉁한 세상을 ‘논바닥 같이 평평한 세상’으로 만드신 것이다. 가령, ‘마리아 찬가’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마리아 찬가는 신데렐라 판타지가 아니라,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실제를 잘 보여준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1:51-53)

이러한 예수의 실제를 더 잘 보여주는 말씀은 4장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셨는데,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펴서 읽으셨다(4:16-17).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18-19)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고 하셨다. 가난한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신 인간 예수의 선언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란 ‘판을 깔고 놀 때 부르는 소리’라는 뜻인데, 17세기경 남도 지방의 서민 청중들을 대상으로 서서히 부상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판소리 다섯마당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춘향가>, <적벽가>이다. 흥보가는 가난한 흥보가 주인공이고, 심청가의 심봉사는 눈 먼 자이며, 수궁가의 토끼는 포로된 자 이며, 춘향가의 춘향은 눌린자이고 적벽가의 ‘군사설음타령’에서 군사들은 가난한 백성이자 포로의 가능성이 있는 눌린 자들이다. 아마도 예수께서 조선 시대에 오셨으면 판을 깔고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는 한풀이를 하시지 않았을까!

누가복음의 예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모습, 사람의 모습을 하고 우리와 함께 울고 웃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5. 여호와의 전에서 어울림 마당을!

스가랴 6장 12절은 ‘싹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다고 전한다. 비천한 곳에서 돋아나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스룹바벨이나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성전과 성곽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통해 종교의식을 회복하려고 했다면, 이제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전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잔치를 베푸는 대동사회의 판을 깐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기능은 여기에서 나온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14:13)’ 예수의 사랑은 차별이 없는 사랑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골고루 사랑하시었다. 그러나 특별히 따돌림 당하기 쉬운 사람들을 따뜻하고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였다.

“너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다”, “너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신데렐라이다”, 디지털 파워로 기계화된 이 물질 문명에, 로봇이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신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리고 예수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서 하나님 나라의 어울림 마당을 열어보자.

최병학(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2-10-22 (월) 11:22 11년전
'판소리'에 관한 내용은 오종윤 목사님의 통찰입니다. 기장목회세미나 때 남도 판소리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시었는데, <신약문지방 넘기>에도 나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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