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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테르 춘분제와 부활절: 생기를 너희에게(겔37:1-6)

최병학 (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3-31 (일) 16:53 11년전 3353  


<고난의 십자가Ⅳ>

생기를 너희에게 (겔37:1-6)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신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다. 지난밤 비가 내렸는데, 오늘 아침 다시 맑게 개인 것을 보니 부활의 의미가 더욱 새롭다. 신약의 부활의 의미를 구약의 에스겔서를 통해 좀 더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1. 데메테르 춘분제와 예수의 부활

초대교회 시대에 데메테르 종교가 고대 근동지방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곡물과 수확의 여신인 데메테르는 신들의 신인 제우스와의 사이에 딸 페르세포네를 낳았다. 후에 페르세포네는 저승의 신인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명계(하데스)로 끌려간다. 딸을 찾아 헤매던 데메테르는 자신의 일을 하지 않아, 지상 어느 곡물도 열매 맺지 못하였다.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형이자 동생인 하데스에게 전령신인 헤르메스를 보내어 페르세포네를 놓아주라고 했는데, 하데스는 명계의 음식을 먹으면 명계 밖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해서 페르세포네에게 이별의 만찬으로 석류 4알을 권하여 먹게 한다.

따라서 석류알을 먹은 개수인 4개월 동안, 곧 11, 12, 1, 2월 동안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와 함께 있어야 했으며 나머지 8개월은 어머니 데메테르 옆으로 갈 수 있었다. 결국 데메테르는 일 년의 8개월만 딸과 지내게 되었고, 이 헤어져있는 기간 동안 데메테르가 슬퍼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겨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3월이 되면 다시 페르세포네가 돌아오니 곡물의 신이 기뻐하여 대지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4계절의 순환을 이렇게 신화적으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데메테르 신전이 주변에 많았는데, 이곳에서 여사제들은 데메테르 신을 위해 기도하며 금식을 하였다. 그들은 금식을 통하여 데메테르 신의 페르세포네를 향한 고통을 느끼며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나 3월이 되면 데메테르 여신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돌아오는 페르세포네를 기뻐하는 데메테르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며 고대인들은 이 제사와 축제를 통해 한해의 풍년과 다산을 기원했다.

교회는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래로, 춘분(올해는 3월 20일) 후 첫 보름달(올해는 3월 26일)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주일(31일)로 지킨다. ‘절대 절망’, ‘절대 죽음’의 상태를 단번에 ‘절대 희망’, ‘절대 생명’으로 역전시켜버린 그리스도의 부활이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을 지나 일어난 것은 당시 데메테르의 춘분제와의 유비를 떠나 의미심장하다.

낮의 길이가 점차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일조량이 증가해 먹이 피라미드의 최저층을 이루는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식물이 공기 중에서 섭취한 이산화탄소와 뿌리에서 흡수한 물로 엽록체 안에서 탄수화물을 만드는 작용)이 더욱 활발히 일어나, 그에 따라 자연계 전체에 생명력과 활력이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식으로 생각하면 데메테르가 페르세포네와 다시 만나 기쁜 것이며, 기독교식으로는 하나님의 외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기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돌고 도는 계절의 변화’와 ‘풍요에의 바램’이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회적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될 수 있을까? 해마다 돌아오는 부활절이기에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당연시하며 한해에 한번 돌아오는 부활주일로 지키고 있지는 않은가!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능력이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 사회,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역사와 온 우주에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새 희망이 넘치는 영적인 부활, 곧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봄은 왔으되 오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부활절은 왔으되, 1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데메테르의 부활절기가 되는 것이다.

2. 생기를 너희에게

신약의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슬픈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러나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슬픈 사건은 바로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유다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건이다.

바벨론은 유다를 두 차례나 침공한다. 첫 번째는 기원전 598년에 예루살렘을 쳐들어 와 성전 기물을 약탈하고 당시의 왕인 여호야김을 비롯하여 수천 명의 예루살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간다. 이를 ‘제 1차 포로’라 하는데, 에스겔은 이때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0년 후인 기원전 587년에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반기를 들자 바벨론 군대가 다시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허물어지고, 백성들은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간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다윗 왕조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당시 예루살렘에서 민족 멸망의 ‘눈물의 예언’을 하고 있을 때,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포로민들을 대상으로 예언을 하였다.

에스겔의 예언은 예루살렘의 멸망인 기원전 587년을 기점으로 전반기에는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하고, 후반기에는 소망과 확신의 예언을 한다. 전반기가 십자가와 고난이라면, 후반기는 부활로 신약의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이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유다민족에게 징벌을 내리셨을까?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설명하고 있다.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23:4).” 바람난 두 자매의 비유는 북왕국 이스라엘(오홀라)과 남왕국 유다(오홀리바)가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들의 우상을 섬긴 것을 말한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죽으셨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밎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권력과 명예와 부귀라는 우상을 숭배한 결과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이 멸망당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에스겔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낙심과 자포자기에 빠져 있는 포로민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민족의 부활과 소망을 보여주며,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담은 ‘희망의 예언’을 한다. 물론 이 예언들은 환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미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차이점은 미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기쁨이 충만한 반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눈물이 많으며 기쁨이 부족하다고 한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이 성숙할수록 많이 웃고 즐거워하는데, 한국의 성도들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이들이 신앙이 좋은 것처럼 비춰진다고 한다. 에스겔의 전반기 예언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십자가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있다. 에스겔 후반부는 바로 이러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희망이 아니라, 민족적인 희망과 민족의 부활이다.

첫째, ‘마른 뼈들의 환상(37:1-14)’은 민족의 부활을 이야기하며, 두 번째, ‘두 막대기의 결합(15-28)은 민족의 통일을 보여주며, 세 번째, ‘마곡의 왕 곡을 쳐부수는 환상’(38-39:20)은 외세를 배격하며, 마지막 ‘새 예루살렘 성전의 환상’(40-48)은 신앙 공동체의 회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바로 마른 뼈다귀들의 환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다귀들이 있는 골짜기로 데려간다. 뼈다귀들은 너무나 바짝 말라서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른 뼈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제 자리를 찾아 맞춰진다. 그리고 살이 덮이고 거죽이 입혀지고 피가 통하게 되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숨인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와 그 맞춰진 뼈다귀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나서 커다란 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마른 뼈들은 포로생활에 지쳐 절망에 빠진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 대군을 형성하는 것처럼, 유다 민족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 끝내는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벅찬 희망을 에스겔은 포로살이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부활과 소망을 일깨워 준 것이다.

3. 부활의 예수는 어디까지?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부활의 산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 남과 북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마곡의 왕 곡의 세력들에게 마른 뼈의 부활, 곧 죽음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을 전하여야 할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전의 환상처럼 ‘신앙 공동체’가 믿음으로 회복되지 않은 채 나누고 시기, 질투하는 이때에, ‘예수교와 기독교의 두 막대기’가 분열되어 서로를 할퀴고 있는 이때에 에스겔은 오늘 우리들에게 마른 뼈들의 환상과 두 막대기의 환상을 보여준다.

‘남과 북의 두 막대기’가, ‘동과 서의 두 막대기’가, ‘지도층과 백성들의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어 민족의 부활, 민족의 통일을 외쳐야 할 것이며, 외세를 배격하며, 신앙공동체의 참다운 회복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살아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 항남 교회 주변 지역도 그렇다. 허물어가는 빈집들, 삶에 희망이 없는 힘들고 지친 이들, 신앙이 없이 영적 죽음을 살고 있는 이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 마른뼈와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교회 앞 빈집이 한국교회의 역사 박물관이 되고, 주변집들이 이쁘게 단장되고, 사람들 얼굴에 생기가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정이 넘치는 환상! 바로 에스겔이 들여 주는 환상이자,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을 통해, 항남 교회 성도들을 통해 이루어질 새 희망이 비젼이다.

4. 하이퍼골릭

화학 용어로 ‘하이퍼골릭(hypergolic)’이라는 말이 있다. ‘hyper’는 ‘치솟는다’는 의미이고, ‘golic’은 ‘연료’를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비롯되었다. 가령, 두 가지 화학 물질이 있는데, 이들이 각각 따로 있을 때는 아무런 화학 반응이 없지만, 두 가지가 접촉하게 되면 발화하거나 폭발하는 것을 말한다. 우주선의 기본 발상이 바로 이러한 하이퍼골릭 현상에 의한 연소 작용에서 생기는 에너지를 이용한 것이다.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로 치솟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바로 이런 영적인 불기둥이 솟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아무 힘도 없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면 발화가 된다. 희망으로 발화가 된다. 용기로 발화된다. 기쁨으로 발화된다. 사랑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최병학(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3-31 (일) 16:54 11년전
오종윤 목사님의 '에스겔'서와 기장 회보 3월호 최병수 목사님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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