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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3. 서울에 대학을!

이인배 (서울동노회,prok,목사) 2013-05-16 (목) 14:30 10년전 2163  
언더우드는 1900년 초부터 서울에 대학을 세운다는 꿈을 품어왔으나 서북계가 장악한 현지 선교부는 1910서울에서의 대학 설립안을 보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이유는 첫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 하나의 대학을 세우는 안에 동조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로 당시 1906년 평양에 숭실학교가 정부로부터 대학부 설치 허가를 받았으며 서울에 대학을 세울 경우 재정적으로 숭실이 입을 손해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117명 중 서울에 주재한 선교사는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27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평양 모펫 부부 등을 비롯한 서북계 26명을 포함하여 이에 동조하는 영남과 호남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래서 언더우드의 서울에서의 대학 설립안은 현지 선교부에서도 사면 초가에 있었다.
 
반면에 미국 감리교 선교부 총무 노스 박사는 언더우드의 서울 지역의 대학 설립안에 동의하는 의사를 피력하였고, 19123월 개최된 감리교연회는 서울에 하나의 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감리교 선교부 조원시(G.H. Jones) 목사는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 박사에게 서울에 대학 설립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수도, 철도의 중심지, 장로회, 감리회, 성공회, 성서공회, 구세군,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선교회들의 본부가 있는 기독교 중심지, 종교 문화 상업 산업 교육의 중심지, 배재고등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있기 때문.”
 
이 외에도 선교사들인 루프스(Carl W. Rufus), 스웨어리(W. Swearer), 베커(Arthur L. Becker)도 언더우드의 서울안을 지지하였다. 1910년 북감리회 한국선교부는 서울에 하나의 교단 연합 대학 설립 경영안을 지지하였다.
 
그 이후에 언더우드의 끈질긴 설득과 감리교 선교부의 설득 끝에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이 선교지에서의 연합활동을 중시했던 에딘버러 선교대회 영향을 받아 평양지지에서 서울지지로 돌아섰고,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교육분과위원이던 가우처 박사, 그리고 북감리교 감독 맥도웰, 북장로교 소속 일리노이 록 아일랜드교회 담임 목사 마퀴스, 버튼 교수, 록펠러 대표 등이 서울지지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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