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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호봉제(6)- 가난한 목사는 어떻게 사는가?

김진철 (충남노회,오순교회,목사) 2012-11-11 (일) 21:04 11년전 4996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계몽적인 우화를 썼습니다.
누구나 아는 정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즐겨 인용 합니다. 사랑이라고....
그런데 셀리 맥페이그(Sallie Mefague)는 기독교가 <사랑, 사랑> 이야기하지만,
<경제학 없는 사랑은 공허한 미사여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속물적인 생각?
어느 날 제 큰 아들이 <아빠, 노회장 언제 하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뜬금없이 노회장은 왜?>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인터넷에서 결혼비용을 조사해보았는데 비용이 많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노회장을 하면 축의금이 좀 많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놈은 신학교에 왜 가느냐고 물었더니 <명절에 교인들이 선물을 가져다주어서..>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둘 다 신령한(?) 목사가 되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아들 둘이 신학공부를 하고 있으니, 이들이 앞으로 목사가
되어서 먹고 살 것을 생각하니, 아버지로서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 목회하는데 생활 때문에
어려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대책이 세워졌으면 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입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
저희 교회에서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한 학기에 3백만 원을 줍니다. 물론 한 아이 등록금으로도 모자랍니다. 그래도 얼마나 고마운지요. 교회로부터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시킬까?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하면서 <그런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기분이라도 좀 좋아졌으면 하는 바램을 글을 씁니다.> 하고 대답하면 좀 고상한가요?
 
길을 잃어버린 엘리야의 까마귀
전도사 시절, 임신 8개월 된 아내와 금식을 결정했다. 그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우리는 성미가 떨어져서 그날 저녁부터 금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곳은 깊은 시골 교회여서 주변에 쌀가게도 없었다.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 굼식이었다. 그러나 뱃속의 아이와 아내를 굶주리게 하는 가장의 심정은 무척 쓰라렸다. 혹한의 밤 11시,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대문 앞에 쌀 한 말과 땔나무가 놓여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놓고 앉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잔에 넘치옵니다." 우리 부부는 밥상 앞에서 서로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지금도 누가 쌀과 땔감을 놓고 갔는지 모른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깨달은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친다. "주의 종은 일용할 양식도 눈물로 받아야 하느니라." <눈물의 주기도, 국민일보 겨자씨 2005.08.14.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예전에는 이런 엘리야의 까마귀가 있어서, 정말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의 목사님들은 훈훈한 정으로
까마귀가 물고 온 것을 먹으며 행복해 하고 어려움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놈의 까마귀가 길을 잃어버렸는지, 환경에 오염되어 눈이 멀었는지 배달 사고를
자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먹고 사는 목사님들에게는 차고 넘치도록 물어다 주고. 정말 내일의 생계가 막막한 가난한 목사들은 목이 빠지라고 기다려도 까마귀는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더 서글퍼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상대적인 빈곤이라고 부릅니다.
 
사례비? 생활비?
산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가족을 부양해야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해야 합니다. 남들처럼 폼 나게는 못하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는 인간관계의 비용은 들어가야 합니다. 최소한의 문화생활도 해야 합니다. 아프면 병원도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의 생활비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책임으로 맡겨 놓으셨습니다. 레위 사람들에게는 기업을 주시지 않으시고, 모든 지파로 하여금 레위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돈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전의 일만 했습니다. 구약의 성직자들은 사례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생활을 보장받았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는 원칙의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도 '최저생활비'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생계비는 '최저생활비'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 더 나아간다면, 목회자의 생활비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목회에 지장을 받지 않을 만큼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목회자가 가장 기초적인 생활과 사역을 위한 돈이 없어 쩔쩔매는 일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서도 결코 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해 줄 수 없는 교회의 목회자는 어떻게 살아가나?
여기저기 선교비를 지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비를 지원하는 일들은 물론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에는 분명한 한계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단은 생활비를 총회적으로 보장하는 좋은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시찰위원회에서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좋은 제도들이 좀 더 현실적인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가 생활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목회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보다 더 큰 지원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목사는 엘리야의 까마귀가 아니라 동역자들의 사랑과 관심과 희생으로 살아갑니다.

이상호(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2-11-12 (월) 06:59 11년전
삶에서 묻어나는 좋은 글입니다.
목사호봉제가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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