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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되는 후보

추일엽 (경기노회,수원주님의교회,목사) 2012-12-05 (수) 06:21 11년전 4252  
자서전 어록’ 대선 앞두고 화제어린아이 화법, 따스함이 없는 인간미, 비민주적 관행 혹평“한나라당은 ‘나의 당’, 청와대는 ‘나의 집’, 대통령은 ‘가업’”
전여옥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월 출간한 자서전 〈i 전여옥〉이 대선을 앞두고 누리꾼 사이에서 다시 화제다. 전 전 의원은 이 책에서 박 후보에 대해 “대통령감이 아니다”고 평가 절하했다. 전 전 의원은 2005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변인으로서 박 후보를 보좌한 바 있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 후보. 내가 당에 들어와 지난 3년 동안 지켜봐 왔다. 가까이서 2년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 감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과연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미 정해졌다. 아니다. No였다.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되는 후보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에 대해 실망했던 경험들을 열거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의 집에 방문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박근혜 의원의 서재는 날 감동시키지 못했다. 서재라고 부르기도 좀 그랬다. 나는 언론에서 맨날 박근혜고 안철수고 ‘대권 공부’를 한다는데 그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짜증이 난다. 공부가 끝났어도 시원찮은데 말이다. 교수들에게 특별과외를 받는 것도 사실 웃기는 일이다”라며 김종인 새누리당 행복추진위원장(당시 비상대책위원)의 말을 이어 전했다.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나아진 거지요. 그런데 아직 초보 수준이고 자기가 얘기하는 것이 다 알고 얘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옛날보다 나아진 것은 있지요.” 전 전 의원은 또 “거의 교과서를 암기하고 족집게 과외 공부하는 수준이라면 이 나라 국민이 곤란하지 않는가?”라며 박 후보를 힐난했다.
그는 또 박 후보의 화법을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혹평했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는 늘 짧게 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오만의 극치’. 그런데 이 단언은 간단명료하지만 그 이상이 없다. (중략) 국민들은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뭔가 깊은 내용과 엄청난 상징적 비유를 기대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쳤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아이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어 박 후보의 인간미에 대한 평도 덧붙였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는 너무 어둡다.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 없다. 박근혜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 널리 알려졌듯이 이코노미를 탄다. 그런데 박근혜의 이코노미석 옆은 대개 블록이 되어 있다. 옆에 사람이 앉지 않게 하는 것이다. 비행기가 만석일 때 빼놓고는 옆에 사람이 앉지 않는다. 이코노미 타는 이유가 뭔가? 사람들과 섞이기 위해 아닌가? 한정된 좌석의 비즈니스클래스를 타면 볼 수 없는 것,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장점이건만-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전 전 의원은 박 후보의 비민주적 업무지시 관행도 지적했다. 전 전 의원은 “친박 의원들 사이에서는 박 전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면 박 전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마디 한다고 한다. 말하지 않고 어떻게 아나?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최선을 다해 말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유권자와 국민에게 설명하고 호소해야 한다. (중략)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고 비판했다.
전 전 의원은 2005년 한나라당에 막 들어와 박 후보의 시중꾼 노릇을 했던 경험도 적었다. 전 전 의원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있던 행사로 기억된다. 그날 앞쪽에는 박근혜 당시 대표가 앉아 있었고 바로 뒷줄에는 나와 대구 경북 지역의 의원들이 줄줄이 앉아있었다. 그런데 비가 주르륵 내리기 시작했다. (중략) 옆에 있던 김태환, 이해봉 의원이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전 대변인 뭐하고 있나? 대표님 머리 씌워드려야지’.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아니, 자기 우비의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중략) 박근혜는 내가 씌워주기를 기다렸다. (중략) 나는 박근혜 대표 커다란 올림머리가 비에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우비모자를 씌워주었다. 박근혜 대표는 여전히 한마디도, 미동도 없었다”고 말했다.
전 전 의원은 또 ‘박근혜 신격화하기에 동참하지 못한 친박 의원들’에 대해 적었다. 전 전 의원은 “김무성 의원도, 진영 의원도 친박의 울타리를 떠났다. 이 두 사람은 박 전 대표에게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무성 원내대표는 ‘2인자’를 두지 않는 박 대표와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떠났다. 진영 의원도 ‘친박으로서 충성도 부족’이라는 질타를 견디지 못해 떠났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박근혜 의원을 신격화해도 모자라는데 우습게 본 사람들’이란 다른 친박 의원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결별선언을 했다”고 적었다.
박 후보의 권력의지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끈다. 전 전 의원은 “그녀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속내를 알고 있었다. (중략) 박근혜의 권력 의지는 대단했다. 나는 그녀를 관찰하면서 아 저렇게 까지 대통령이 되고 싶을까 싶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권력이란 매우 자연스럽고 몸에 맞는 맞춤옷 같은 것이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에게는 생활 필수품이라는 것을 말이다”라고 적었다. 이어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이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이었다”고 주장했다.
누리꾼들은 전여옥 전 의원의 어록을 트위터 등에 퍼나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남기고 있다. 고종석(@kohjongsok)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전여옥이 문재인의 가장 큰 우군이 될 줄이야”라고 썼고, 누리꾼 @myworld***은 “전여옥도 앙심을 품은듯. 그래도 보는 눈이 정확한 듯”이라고 평가했다. 누리꾼 @mettayoon은 “여러분! 한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두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입니다. (‘MB의 추억’ 마지막에 나오는 전여옥의 말)”이라고 적었다.
출처 : 트위터 이용자 @BeanPole2000이 12월2일 트위터에 연재한 내용임
▶전여옥 어록 1
“박근혜 위원장은 자기의 심기를 요만큼이라고 거스리거나 나쁜 말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가 용서하는 사람은 딱 한 명 자기 자신이다.”
▶전여옥 어록 2
“하루는 어머니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는데 박근혜 위원장이 햄버거를 먹지 않고 있기에 ‘왜 먹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더라. 보좌관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오니 그제야 먹었다.”
▶전여옥 어록 3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한국은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my family‘s job)이었다.
▶전여옥 어록 4
”친박 의원들이 박근혜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박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 마디 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전여옥 어록 5
”박근혜는 늘 짧게 대답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등. 국민들은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그러나 사실 아무 내용 없다.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애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다.“
▶전여옥 어록 6
”박 대표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의원들이 말했다. ’대표님 머리에 우비 모자 씌워드려야지.‘ 나는 당황했다. 자기 우비 모자는 자기가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씌워드렸지만 박 대표는 한마디도 없었다.“
▶전여옥 어록 7
”박근혜는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은 부정부패 연루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기소되면 당원 자격을 정지시키고 유죄가 확정되면 영구 제명하겠다”고 말했는데 부정부패로 유죄가 확정돼 2년반 콩밥을 먹은 사람을 당을 쇄신할 비대위원으로 임명했다”
▶전여옥 어록 8
“박근혜는 대통령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정치적 식견ㆍ인문학적 콘텐츠도 부족하고, 신문기사를 깊이 있게 이해 못한다. 그녀는 이제 말 배우는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하다.”
▶전여옥 어록 9
“영등포에 손가락이 잘린 분들이 많은데 유신독재 시설 공장에서 각성제를 먹고 졸면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산업화의 영웅은 그들인데 꽃다발도 없고 명예도 없다.”
▶전여옥 어록 10
“박근혜는 공천 승복하는 것이 정도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박 위원장 본인은 승복하지 않았다. 친이계에 공천 승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전여옥 어록 11
“보좌관이 박근혜 위원장의 쓸 샴푸를 사야 하는데 단종이 돼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다. 왜 최근 나온 제품들을 안 쓰고 옛 제품만 고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전여옥 어록 12
“박근혜 위원장은 클럽에 갈 때에도 왕관을 쓰고 갈 것 같다.”
▶전여옥 어록 13
“박근혜 위원장의 자택 서재를 둘러보고 박 위원장의 지적 인식능력에 좀 문제가 있다 생각했다. 서재에 일단 책이 별로 없었고 증정 받은 책들만 주로 있어 통일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여기가 서재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전여옥 어록 14
“여러분,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입니다!”

이세윤(전북동노회,전주금암교회,) 2012-12-05 (수) 10:11 11년전
나도 인터넷에서 전여옥씨의 글을 읽고 공감하는 편이고 전에도 그런 말을 했으니 놀랄 일은 아닙니다.
박 후보의 살아온 과정을 보면 성격이 그렇게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군대를 다녀온 독자들은 이해되리라 믿지만 장군의 가족들이 헌병의 보호를 받고 사는 모습을
연상해 보고, 대통령의 가족이 되고 너무 오래 궁 안의 맏 공주였고 아버지는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했으니 폭넓게 주변의 사람을 믿지 못하여 속 있는 말을 못하고 살아 왔고 형제간에도
우애를 못하니 추 목사님이 퍼온 글대로 성격이  그렇겠구나  싶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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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2-12-05 (수) 14:59 11년전
잘 읽었습니다.
이장로님 말대로 그럴 것 같습니다.
모쪼록 새로운 역사를 열 수 있는 선택의 날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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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환(경북노회,한울교회,목사) 2012-12-07 (금) 00:57 11년전
엊그제 TV토론을 보고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토론에 서툴고 미숙했다는 것보다,
토론이 없이 살았던 그의 삶이 더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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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엽(경기노회,수원주님의교회,목사) 2012-12-07 (금) 21:28 11년전
세상이 바뀔까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세상을 바꾸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나 유신세력이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과거 세력과 미래 세력의 대결이라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번 선거를 박정희 대 노무현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1차 티비 토론 이후에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 대 김대중 ·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신과 오늘’에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박정희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국가예산의 10%를 퍼부었던 1971년 대선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또 다시 없도록” 운운하며 군복을 벗는 소회를 밝혔다. 20세기 지구의 곳곳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수많은 군인아저씨들은 거의 다 군복을 입고 통치했지만,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야 했다. 남북분단이 동서냉전의 대리전을 수행하던 현실에서 미국은 자신의 쇼윈도에 군복이 걸려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부 일각에서는 원래의 공약대로 군은 깨끗하게 원대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은 군정을 연장하라고 데모하기도 하고, 박정희는 오락가락 갈팡질팡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다가 결국 군복을 벗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15만 표로 가장 표차가 적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승부가 갈린 것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된 좌익 전력을 거론하며 제기한 사상논쟁이었다. 사상논쟁은 윤보선의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좌익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여기서 승부가 갈린 것이다.


평생 권력을 움켜쥐고자 했던
박정희는 두 번의 임기뒤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고
유신쿠데타 통해 국민들이
대통령 뽑을 기회마저 빼앗았다


퍼스트레이디 박근혜가 배운 건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유신의 부활이냐 종말이냐
우린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1967년 5월 3일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과 재격돌했다. 야당은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신민당이라는 통일대오를 만들었지만, 후보로는 윤보선을 다시 내세웠다. 51세 박정희와 71세 윤보선의 대결,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내세우는 박정희와 서울의 대부호 양반가의 후예 윤보선의 대결은 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경제개발계획이 궤도에 오르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돈이 풀리면서 국내의 경제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박정희의 독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었고, 박정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박정희는 4년 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긴 윤보선에게 116만 표 차이의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제3공화국 헌법은 4년 중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중임 임기가 끝나는 1971년에 55세가 되는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삼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달 여 후인 6월8일에 치러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초유의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확보한 개헌가능 의석을 이용하여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했다. 다른 신문들은 ‘통과’라 썼지만, 동아일보만은 언론의 자존심상 ‘통과’라는 말을 쓸 수 없어 ‘처리’라고 했다고 한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비록 야당이 패배하긴 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선거로 꼽힌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 둔 시점에서 신민당 유진오 총재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야당으로서는 1956년과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후보와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세상을 뜬 데 이어 또 다시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것이다. 이때 신민당의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출마한 신민당 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다. 여기서 이변이 발생해 2위였던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의 6·8총선에서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김대중의 지역구인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 정도로 김대중을 싫어했다. 그런 김대중과 경쟁하는 것은 박정희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이렇다 할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윤보선과는 달리 김대중은 예비군 폐지, 4대국 보장론, 대중경제론 등 참신한 공약을 쏟아냈다.

박정희는 사회의 구성이 고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화시킬만한 능력도, 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한 것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부터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로 박정희 측의 선거에 깊이 간여했던 강창성이 뒤에 고백한 것처럼, 이들은 “모든 부정을 저질러서 박 후보의 당선을 만든 것”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선거에 국가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700억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런 엄청난 부정을 자행하고도 정치신인에 가까운 김대중과의 표차를 94만 표밖에 벌리지 못했다. 1956년의 조봉암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떠돌았다.


유신체제 의전서열 2위와 최태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총통제 문제였다. 김대중은 이번에 박정희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하면 박정희가 총통제를 실시하여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김대중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서 이번이 국민여러분께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마지막 선거라고 호소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박정희는 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유신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에게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일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도 반장은 학생들이 직접 뽑았는데, 국민들은 제 나라의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72년과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두 번이나 더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선거놀음일 뿐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구호는 복잡하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쟁취” 16글자에 집약된 뜻은 한 마디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

박근혜 후보를 흔히 유신공주라 부른다. 그런데 공주라는 말은 가끔씩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4년 여름 이후 박근혜는 유신체제에서 어린 공주가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왕비가 없는 상태에서 공주는 유신체제의 의전서열 2위로 유신체제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섰다. 박근혜는 외모는 어머니 육영수의 온화한 모습을 많이 닮았지만, 속은 영락없는 박정희였다. 박근혜는 아버지로부터 권력의 생리와 운영방법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박근혜가 보고 배운 시기의 박정희는 권력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언로가 막혀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부들부들 떨고 재떨이 집어 던질지언정 기자들하고 논쟁도 했고 대드는 기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그래도 기자들과 막걸리를 앞에 두고 때로 고성이 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던 반면, 박근혜는 처음부터 얼음공주였다. 선거의 핵심과제인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힘들게 모셔온 김종인 전 의원조차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눈이 발하는 레이저광선 앞에 모두들 침묵해버리고 만다. 최근 교통사고로 숨진 이춘상 보좌관의 죽음은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그래도 불편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다는 점에서 박근혜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이야기의 90퍼센트 이상은 구국선교단 총재라는 최태민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주한미대사 버시바우는 “최태민이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2007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소문의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동생인 박근령 등 최측근이나, 박정희를 가장 열심히 찬양한 조갑제나 요새 TV토론에 보수진영을 대표하여 가장 빈번히 얼굴을 내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같은 사람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학생들의 반발로 곧 이사장 직을 사임하고 평이사로 내려앉았다. 영남대학은 영남학원 상임이사 김정욱, 곽완석 사무부처장, 손윤호 영남병원사무장, 조순제 영남투자전무 등 박근혜가 임명한 측근 4인과 이사진이 1인당 2천만 원이라는 거액(현재는 2~3억 가치)을 받고 30여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적발되었다. 이들과 이사진은 마땅히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으나, 박근혜와 측근들이 영남학원에서 영원히 손을 떼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때 박근혜와 함께 사임한 이사진은 상임이사 김정욱, 이사 김창환, 손미자 등인데, 이들은 모두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지냈다. 이들 중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김창환은 최태민의 사촌,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 아들, 손윤호는 최태민의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학원 이사진에서 부정행위로 쫓겨난 자들을 박근혜는 정수장학회에서 여전히 이사로 기용했다. 현재 박근혜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들의 골격은 최태민의 사위인 정윤회가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시바우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평한 최태민의 그림자가 박근혜가 흉탄에 어머니를 잃은 황망했던 어린 시절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 80주기, 다카키 마사오를 생각한다


볼셰비키혁명을 촉발했다고 일컬어지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괴승 라스푸틴은 황제까지 혹하게 만들었으나, 박정희가 최태민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술 친구로 10 · 26 사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김계원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처럼 박정희는 “그 X(최태민)가 그 X(박근혜)를 홀렸다”며 최태민과 박근혜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김계원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5살이나 많았는데, 최태민의 존재는 박정희는 물론이고 비서실장 김계원, 민정수석 박승규, 정보부장 김재규 등의 골칫거리였다. 운명의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는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10·26사건의 먼, 그러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최태민 문제를 꼽았다. 박정희를 친형처럼 따랐던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든 계기였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80년 전인 1932년 12월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처형됐다. 일제는 그의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린 뒤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근혜는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이라는 구호 아래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본 따 새마음 운동을 전개했다. 최태민이 부추긴 공주놀음에 푹 빠져 아버지 속을 지지리도 썩인 딸은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 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영애님 오셨다고 큰 절을 했다. 육영수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도 이런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김재규는 왜 어린 박근혜가 노인들 절 받느냐고 탄식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로 골치를 썩으며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고 봉건시대의 임금마냥 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행하는 등 최태민을 떼어 놓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썼으나 울며불며 난리 치는 박근혜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에미도 없는 게 시집도 안 가고 애쓰는 게 불쌍하다”는 박정희의 동정이 화를 키웠다면, 지금도 박근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의 값싼 동정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 과제는 경제민주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한 발 오른 쪽으로 가긴 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제헌헌법은 국가보안법에 깔려 질식당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박정희라는 동일인물에 의해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나 짓밟힘을 당했고,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으면서 민주주의가 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또 다시 박정희의 경호장교였던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간신히 정치적 민주주의만을 회복했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민주화의 과실은 일반 시민들보다도 재벌과 관료와 수구언론이 따먹어 버렸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와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서 양극화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6월항쟁으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한국사회는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명박이 가져온 역사의 퇴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박정희의 부활이냐, 정치적 민주화에 이은 경제민주화를 성취하느냐의 갈림길에서 2012년의 선거를 치르게 된다.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의 8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일제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윤봉길 의사를 처형했다. 일제는 25세의 청년 윤봉길의 무릎을 꿇려 낮은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렸다. 그리고 10미터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윤봉길 의사의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였으니 저들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으로 일장기를 그린 것이다. 박정희가 하필이면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명치유신의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을 골라 자신의 제삿날로 삼은 것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지만, 윤봉길 의사의 80주기 되는 날이 18대 대선일인 것도, 그 날이 다카키 마사오를 숭상하는 세력과 민주세력의 한판승부가 벌어지는 것도 범상치 않은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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