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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코니아와 복지국가-기상 2012.12 대선특집 기고문

홍주민 (충북노회,한국디아코니아,목사) 2012-12-05 (수) 15:40 11년전 3561  
기독교사상 2012.12 특집 복지사회를 위한 기독교의 과제

               개신교 디아코니아1)와 복지국가

                                  홍주민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

들어가면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빈번히 던진 단어는 ‘섬김’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교회 출신 이경숙 권사가 이명박 장로 대통령의 인수위 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시에 두 사람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과도할 정도로 이 단어를 많이 입에 올렸다. 국정목표 다섯 개 중 하나가 섬기는 정부라는 사실은 섬김학2)을 전공한 필자에게 관심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4년 전 그들이 그토록 많이 사용한 이 단어는 당시 내게 전혀 생경하게 이해되었고 섬김학 전공자로서 최소한의 반응을 추동시켰다. 하여 기독교사상 지면을 통하여 여섯 개의 주제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연속 기고한 바 있다.3)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일으킨 사랑의 실천의 역사이다. 또한 개신교 500년은 이러한 사랑사건의 원형인 원시 그리스도 교회와 성서의 정언적 명령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섬김사건이라 할 수 있다. 4년 전 필자가 자원하여 기상에 기고한 이유는 당시 왜곡되어 언급되는 섬김용어 사용에 대해 객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4년 전 왜곡된 섬김에 대한 이해로 인해 한국사회는 더 이상 떨어질 나락이 없을 정도로 망가뜨려졌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가 “사유하지 않음이 바로 폭력”이라고 말했듯이, 섬김개념의 도용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절망에 이르게 하는가를 지난 4년간 너무도 자명하게 확인했다. 이제 2012년 12월에 섬김이라는 주제로 다시 이 지면에 붓을 드는 이유는 다시금 개신교와 섬김과의 관련성을 분명히 집고 넘어가자는 바램에서이다.

디아코니아와의 만남

필자는 개신교 4대째 집안에서 태어나 목사요 신학자 그리고 디아코니아실천가로 살아가고 있다. 구한 말 개신교 영수(장로)로 한국개신교 초기에 예수신앙을 받아들인 조부모이래 필자의 아버지는 평생 목회자로 사시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신 분이셨다. 대를 이어 자손들이 개신교 신앙을 전수받아 지금은 필자의 여러 형제가 개신교신학과 목회의 길을 가고 있다. 필자 집안의 이러한 개신교 문화는 세대가 바뀌어 가면서 여러 분화를 격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개신교 문화속에서 성장하면서 섬김이라는 신학적 화두를 접해본 적이 거의 전무하였다. 이러한 섬김에 대한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개신교의 독특성을 접하게 된 것은 개신교의 원 고향 독일에서의 학문수업과정을 통해서이다. 1994년 9월 말 독일 행 비행기에 올라 독일 중부의 마인츠 대학에서 보내는 동안 필자는 디아코니아(섬김)를 접하게 되었다. 어학을 하는 동안 마인츠 시내를 오가며 항상 볼 수 있었던 디아코니아(십자가에 왕관을 얹은 로고)는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런 디아코니아는 도심이나 시골, 기차역 등 어디를 가든지 접할 수 있는 개신교의 사랑실천 센터였다. 18,000여개의 독일의 교회수보다 훨씬 더 많은 31,000여개의 디아코니아는 개신교인들의 신앙에 의해 사랑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독일개신교의 사랑실천 전초기지이다.4)

디아코니아학과의 만남

16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독일 개신교 디아코니아에 대해 필자가 더욱 충격을 받은 사실은 이러한 실천이 현장과의 깊은 소통가운데 이론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디아코니아학 혹은 디아코니아신학은 신학의 전 영역을 디아코니아라는 안경으로 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하나의 ‘학’이다. 이 디아코니아학은 신학뿐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과학, 의학, 법학 등 인접학문과 간학문적으로 대화하며 “어떻게 더 나은 섬김을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론화작업에 집중하는 학이다.

마인츠에서 독일어 과정을 마친 후 필자는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디아코니아학연구소에서 디아코니아학 디플롬 과정에 몸을 담았다. 이론은 현장과 괴리되면 쓸모없는 잡소리에 불과하다. 신학이란 학문도 현장과의 소통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신학은 신앙이론이라고 강조하며 사랑실천과 거리를 둔 지난날의 과오가 있다. 그 결과 신학이 하나의 독립된 섬으로 왕따를 당한 것을 지난날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필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디아코니아학 연구소에서 2년간 디아코니아에 대한 학문적 이론과 실천현장을 탐구를 하면서 지난 날 쌓아왔던 많은 부분을 포맷하고 수정을 했다.

복지국가와의 조우

국경을 넘어 이주해서 사는 사람들을 이주민이라 한다. 그러한 이들 가운데 경제적인 이유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이주노동자라 한다. 2012년 현재 한국에 이주민이 150만 명, 그 중 이주노동자가 60만을 상회한다. 필자는 독일에서 10년여를 살아가는 동안 지속적으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학문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쪽의 바닥현실과 문화 그리고 제도에 대해 접할 기회가 좀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과 학문이라는 이중적 고리를 마치 외줄타기 하듯 살아오면서 마지막까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들의 사회안전망인 복지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이 셋의 가장으로 한 가계를 이끌며 이국땅에서 노동하며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는 것이 개인의 성실성이나 머리로 가능할까... 음식은 맛을 보아야 그 음식의 진가를 알 수 있듯이 복지도 맛을 본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리라.

복지국가는 국가가 복지를 책임지는 국가를 말한다. 개인에게 전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나라일수록 복지국가에서 먼 나라들이다. 가부장적인 틀을 강조하는 나라, 가족과 친척의 정을 우선시하는 나라일수록 복지와는 멀다. 요즘 남부 유럽의 경제위기는 물론 유럽통합과정에서 환율의 변수에도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남부유럽의 위기는 복지수준의 저급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서유럽과 북유럽은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라 말하는데, 국가나 사회가 적극적으로 복지에 개입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가가 사회정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교육, 의료, 주거, 노인, 장애인 등 수많은 사회적 문제에 관여하는 나라, 처음엔 그러한 독일이라는 나라가 신기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0년여를 공부하는 동안 학위를 마칠 때까지 학비문제로 걱정해 본 적이 없다. 무상교육이라 학생신분으로 교육비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복지국가란 바로 그런 것이다. 시간당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알바에 몸을 던지고 강의시간에는 피곤한 몸으로 지쳐있는 학생들을 한국에 온 후 8년간 강의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많은 학생들이 신용불량자로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주눅이 들어 있는 이 땅의 현실은 아무래도 복지국가와는 멀어도 한참 먼 야만의 나라이다. 초등학교부터 박사학위를 마칠 때까지 등록금 때문에 가슴을 졸이지 않는 나라, 필자는 외국학생신분으로 독일의 보편적 교육 복지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인간이 가장 비참한 것은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어 못 배우거나 아플 때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가고 약국에 갈 수 없는 것 아닐까? 독일에서 사는 동안 필자는 그들의 건강보험 덕을 또한 톡톡히 보았다. 학생들이 내는 보험료는 아주 저렴한데 건강보험에만 가입되면 병원비를 별도로 내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국의 경우 건강보험에 가입되어있어도 비급여항목이 많기 때문에 사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독일의 경우는 달랐다. 아이 셋을 둔 부모로서 병원을 빈번히 찾았는데 병원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이 또한 그들의 의료복지 덕을 본 셈이다. 그 외에 주거복지로 인한 주거비용 절감, 사회부조로 인한 긴급도움, 아동복지를 통한 아동시설이용료 절감 등 사회정책을 통해 촘촘히 연결되어있는 도움시스템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사회국가와 사회개신교

독일은 그들의 국가헌법에 사회국가(Der soziale Staat)라는 국가시스템을 명시한다. 사회국가는 공식적인 법치국가와 달리 단순히 법과 질서를 보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국가의 목적은 오히려 사회적 안정, 기회의 정의 그리고 모든 이들에 대한 인권존중 그리고 개인그룹이나 계층의 통합을 통한 상호간의 만족에 기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지국가와는 달리, 사회국가 속에서의 사회적 안정은 개개인의 급부수행능력(보험원칙, 개인의 상황)에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의 정확한 한정범위는 없다. 사회국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다운 최저생활을 보장한다. 둘째, 넓은 의미에서 “복지의 확대와 복지 격차의 해소”이다. 이점은 사회보험에서 소득재분배효과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셋째, 사회적 위험이 발생하기 전 생활수준을 보장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국가의 형성에는 ‘사회개신교(Der Soziale Protestantismus)’가 근저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다. 독일 개신교는 사회개신교라 불리는데, 이러한 사회개신교의 뿌리는 디아코니아라는 개신교인들의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848년 산업혁명이후 수많은 사회문제해결을 위해 카를 막스는 공산주의 선언을 한다. 흥미있는 것은 그 해에 동시에 독일 개신교인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짊어져야한다고 천명하며 디아코니아운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운동의 핵심에는 종교개혁정신이 있었다.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은 교회내적으로는 직제와 예배의 개혁으로 이어지고 사회적으로는 복지국가의 틀을 형성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했다. 이제 새로이 출현한 개신교는 신앙으로 인한 전적인 사랑 실천의 전진기지로 지역과 국가를 성서의 정신으로 연대와 정의 그리고 섬김의 에토스를 불러일으키는 장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맥을 이어 독일의 디아코니아운동은 요한 힌리히 비헤른이라는 신학도에 의해 그 맹아를 키워간다. 1848년 9월 22일 개신교의 모임에서 그는 “사랑이 신앙이다”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며 독일 개신교가 사회문제에 구체적으로 개입할 것을 천명한다. 그 이듬해부터 구체화된 독일의 디아코니아운동은 이제 160년이 지나 거대한 사랑의 사건인 디아코니아를 일구어냈고 지금은 유럽통합의 사회적 에토스로 디아코니아를 유럽 전역에 확대해가고 있다.

디아코니아 결핍원인

그러면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디아코니아에서 왜 거리가 먼 것일까. 필자는 그 원인을 아마도 다음의 세 가지 요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130여 년전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래된 개신교는 청교도적 경건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을 이 땅에 이식하였다. 그 가운데 청교도적 경건주의는 19세기 말 미국의 사회복음운동(social gospel movement)에 반대하는 그룹이었는데, 이 사회복음운동이 당시 독일과 유럽의 디아코니아 운동이었다. 쉽게 말하면, 디아코니아신학과 정면적으로 이질적인 신학의 담지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한국교회 주류를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으로, 칭의론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이다. 원래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인 칭의론은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가들은 당시의 가톨릭 교회가 의도된 선행으로 인해 업적주의에 경도되는 당시 교회에 이의를 제기하며 칭의론을 주장한다. 성전건축헌금을 강요하며 면죄부 장사를 하는 교회지도부에게 마틴 루터는 종교장사를 훼방하는 이단자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그러한 교회에 헌금을 내느니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며 복지기금함을 설치하게 된다.(1523년. 라이스니히 공동모금함) 이러한 개혁가의 칭의론을 통한 의도는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의도된 사랑과 보상을 바라는 섬김은 이미 사랑도 아니고 섬김도 아니라는 것이 개혁가들의 생각이었다. 믿으면 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단순논리는 개혁가들의 의도에서 먼 것이다. 오히려 믿으면 사랑의 화신이 되어 하나님의 섬김의 영웅이 되어 살아간다고 개혁가들은 주창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학방법론 문제이다. 하나님 말씀의 신학의 영향에서 인지, 신학은 말씀, 텍스트를 강조하고 말씀 선포와 말씀 선포자에게 신학전체가 경도된 현실을 우리는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그 결과 말씀에 은혜를 받아 사랑실천을 한다는 구도가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역적 신학방법론으로 인해 교회 문밖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와 교회밖에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에는 중립적인 자세를 갖는 한계를 내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교회밖에도 현존하는데 특수한 안경을 쓰고 한쪽으로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신학방법론의 편협함에서 결과한 것이다. 필자는 현재 이주노동자관련 디아코니아실천의 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혹자는 나에게 특수목회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누가 더 특수한가? 한 방향만 강조하는 것이 특수한 것 아닌가? 말씀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말씀의 의도를 찾아내는, 즉 쌍방향에서 고려되는 귀납적 신학방법이 필요하다 하겠다.

나가면서

한국의 개신교인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수는 상당하
고, 교회는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회를 배제하고 한국 사회의 복지를 얘기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현재 한국 개신교의 여러 파행들, 교회의 세습 문제를 비롯해 극우보수주의로의 정치적 동원, 그리고 물질주의적 기복신앙과 개인주의적 욕망의 도가니화 등이 도처에 널려있다. 이러한 가운데 도대체 한국 개신교가 연대와 공공성 같은 대응 흐름들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복지국가로 이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사회 연대의 한 축으로 설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던진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디아코니아와 개신교의 상관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전술한 바, 종교개혁에 의해 태동된 개신교는 원래 복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니 복지와 무관한 개신교는 개신교가 아닌, 개신교의 성격에 대해 진술하였다. 500년 전 발발한 종교개혁의 영향사는 독일에서 사회국가를 일구어 냈고,5) 스웨덴에서는 복지국가를 형성케 했다.6) 필자는 이러한 개신교의 정체성을 한국개신교가 ‘디아코니아로의 회심’을 통해 살려내야 한다고 본다. 독일의 디아코니아운동은 각성운동의 결과이다. 여의도에서 몇 백 만명이 모여서 영적 대각성집회를 여는 각성운동이 아니라 디아코니아 실천으로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는 각성운동이 필요하다.

이제 대선을 앞두고 복지에 대한 공약과 복지국가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 연일 터져나온다. 이러한 때에 오백 년전 우리 개신교 선각자들이 품은 이상과 실천으로 서유럽과 북유럽이 사회국가와 복지국가로 꽃피운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개신교는 디아코니아를 통해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섬김 사건들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천년전 예수는 나이 서른셋에 디아코노스, 시중드는 자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기위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지난 10월 서른세 살의 한 여성 장애인이 야만스런 이 땅의 복지의 희생물이 되어 어처구니없는 죽음(죽임)을 당했다.7) 우리는 이 사건의 동조자요 공범자 그리고 방관자 아닌가. 이번 대선은 이러한 야만의 사회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디아코니아로의 회심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구체적인 손 건넴으로부터 시작된다.

각주...

1) 디아코니아(diakovia)는 그리스어로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을 의미한다. 디아코노스(diakovos)는 ”시중드는 이“라는 뜻으로 예수는 눅 22,27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분을 지칭한다.

2) 섬김학은 독일에서 Diakoniewissenschaft(디아코니아학), Diakonik(디아코닉), Diakonietheologie(디아코니아신학)로 불리운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사회복지학, 기독교사회봉사학, 교회사회복지학 등으로 불리우는데, 필자는 독일어 어의를 그대로 음차해서 ‘디아코니아학’ 혹은 순수 우리말로 ‘섬김학’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 학문은 독일에서는 신학의 부류에 속하며, 특히 실천신학과 연관하여 전체 신학과 연계하고 타학문과 간학문적인 소통을 하며 160여년 전부터 학문화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10여 년전부터 사회복지학과 연관하여 진행되어오다가 최근 2009년부터 한국기독교학회의 실천신학회안에 디아코니아분과로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3) 참조. 홍주민, 섬김의 르네상스(기독교사상, 2008.4), 야훼의 섬김(기독교사상, 2008.5), 예수의 섬김(기독교사상, 2008.6), 개신교와 섬김(기독교사상, 2008.7), 경건과 섬김(기독교사상, 2008.8), 비헤른과 섬김(기독교사상, 2008.9).

4) 현재 독일의 디아코니아 기관은 약 31,000개이고 45만 여명의 직원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40만 명 정도의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하루 100만 명 이상에게 수혜를 제공하는 등, 디아코니아 실천운동은 거대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 직원 중 26만 명 정도가 고정된 시설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중 40%에 해당하는 이들이 양로원, 청소년 기관, 장애인 기관, 그리고 병원에 속하여 있다. 특히 독일 전체 장애인 시설의 1/2, 유치원의1/4, 병원의 1/10이 디아코니아 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또한 4300여개의 자원봉사 동아리들이 움직이고 있고 18,000개의 교회가 이 섬김의 사역에 연대하며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25개의 주교회(Landeskirche)와 9개의 자유교회(Freikirche) 그리고 90개의 전문협회가 개신교 디아코니아사업단에 속하여 있다.

5) 참조. 홍주민, 독일사회국가체계에서 교회 디아코니아의 역할연구, 신학과 실천, 2010 가을호. 이 논문은 2008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다.

6) 참조. 홍주민, 복지국가 스웨덴과 개신교 디아코니아 관련성 연구, 신학과 실천 2012년 가을호. 이 논문은 2008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다.

7) 2012.10.26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화재가 나서 뇌병변장애 1급 김주영 씨(33세)가 홀로 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했다. 입에 펜을 물고 스마트폰 키보드를 눌러 119에 전화를 하여 10분 만에 진화되었지만 그녀는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활동보조인만 옆에 있었어도 살 수 있었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의 저열함으로 인한 사회적 타살로 지적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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