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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설교] "무덤을 넘어" - 김재준 목사

장공기념사… (기타,,기타) 2017-09-27 (수) 17:43 6년전 2681  

[광야에 외치는 소리](삼민사)에서 추석날 설교로 소개되고 있는 장공 김재준 목사의 설교입니다. 민족의 명절 추석을 맞이하여 죽음과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www.changgong.or.kr) 홈페이지를 통해서 보다 다양한 설교와 글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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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넘어
- 추석날 설교

오늘은 8월 한가위, 추석 명절입니다. 추석날이란 우리나라 전통에서 가장 즐거운 명절입니다. 이 날의 일기는 맑고 시원합니다. 신량(新涼)의 경쾌한 횃바람에 육중한 고기 덩어리도 송두리째 구름같이 떠오를 성싶습니다. 하늘은 높고 산하는 맑아, 새 가을의 정기가 우주에 가득 찬 계절입니다. 올벼가 익어 신곡이 향기롭게 마감 추수를 앞두고 익어 가는 곡식이 사야(四野)에 물결칩니다. 중추 만월이 하늘 높이 둥글어서 거울 같이 그 빛이 부드럽습니다. 사람들은 남녀 함께 즐겁고 달밤에 어울려 춤추던 옛 사람들이 심정이 메마른 이 나라 후손에게도 야릇하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명절입니다.


이렇게 삶을 즐길 수 있는 이 즐거운 명절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무덤을 찾아갑니다. 망우리에는 아마도 산과 언덕이 하얗게 인해(人海)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즐거운 명절에 무덤을 찾는다!” 그것은 진실로 의미 깊은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난 지는 몇백만 년인지 추산하기도 어색할만큼 유구합니다. 문명이 남긴 기록을 따져도 6천년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동안에 헤일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이 땅 위에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의 남긴 자취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 속에 무덤과 함께 무덤 같이 얼마 남아 있습니다. 무덤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천 년 이상 지나면 무덤도 몇 개 남지 않습니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 한 말씀과 같이 그 무수한 ‘만물의 영장’들이 흙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무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소위 ‘후손’들이 잠깐 동안 햇빛을 보면서 역시 자기들의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즐겁다는 날에 무덤을 찾아가는 인생!’ 그것은 속일 수 없는 인생의 상징입니다.


“그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파묻힌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한 사도들의 신앙고백에서 칼 발트는 그의 ‘크레도’에 이런 인상 깊은 설명을 적었습니다.


“인간은 ‘매장된다, 장사된다’는 일에 의하여 겉모양으로는 아직도 존재한 것 같으면서도 현실에서는 벌써 비(非) 존재로 되어 있다. 그는 벌써 어떤 미래도, 어떤 현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순수한 과거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이란 것도, 그를 기억할 수 있고 또 기억하려는 욕구를 가진 그 사람 자신이 또한 ‘장사’되기 전까지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일, 즉 ‘장사된다’는 일이야말로 모든 인간적인 현재가 미구에 맞이하지 않을 수 없는 미래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은 매장되어도 영혼은 영원한 천당으로 간다고 미리부터 믿고 있기 때문에, ‘죽어서’, ‘묻혀서’ 하는 말의 참 뜻을 경(輕)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인간 존재의 온전한 무(無)를 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무수한 우리의 조상을, 우리보다 먼저 없어진 인간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존재’라는 개념 속에서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을 찾아가서 그 소리 없는 흙 무더기 앞에서 웁니다! “어찌하여 너는 없어졌느냐?”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모든 유한한 존재자에게 있어서 으레 그러하여야 할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현상이면서도 자연에 대립하는 현상입니다. 죽음에 직면할 때 인간은 그것이 자연적이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일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이에 항거합니다. 죽음은 인간 자신의 영원성에 대하여 자각을 가지고 질문할 수 있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것을 아는 지식은 동시에 그가 죽음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라고 틸리히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가 현세에 더 오래 있지 못하게 된다는 것 때문이라기보다도, 죽음을 넘어서 가져야 할 영원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죽음이라는 데는 자연 이상의 무슨 신비가 품겨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신비를 풀어 말하기를, 죽음은 죄의 값이라 했습니다. 죄는 죽음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 인간을 찌르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사망의 권세를 가진 악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와 악의 인격화한 것이 ‘악마’라면 죽음의 권세가 죄악과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자연법’ 때문에 죽음이 공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에 해당한 범죄자라는 데에 죽음의 무서움이 우리 인격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하고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하여 선행에 떳떳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죽음의 피안에 대한 확신이 있을 것이며 악마가 그를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행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우리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청산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신다’는 것 입니다. 우리를 죄벌의식에서 해방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니 누가 능히 우리를 송사할 것이냐?”하고 바울은 개가를 불렀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으니 죽음도 그에게 권세를 부리지 못합니다. 죄 있는 곳에서만 죽음이 권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는 곧 영원에의 공포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믿는 자에게는 영원이 생명으로 실감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깃들일 고장이 없습니다. 신자도 죽습니다. 그 육체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망 없이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약속을 지니고 사경(死境)을 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의 체험 안에서 그 죽음의 선을 넘는 것입니다.


그가 당하는 죽음은 ‘썩을 것을 심어서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는’ 하나의 씨 심는 것과 같습니다. 끝날에 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나타날 것을 그리스도의 처음 익은 열매에서 확인받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도 죽어서 화장되었습니다. 공자도 산동(山東)에 커다란 무덤을 남겼습니다. 모하멧도 메카에 그 시체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예고되어 있음을 알고, 그 무덤을 인봉하고 파수병까지 배치하여 그 시체를 지키던 극성스런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그리고 로마 총독 등이 왜 그 무덤을 지적하면서 “보라, 여기 너희 예수의 무덤이 있지 않느냐? 보라, 여기 그의 시체가 있지 않느냐?”하고 당당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이나 시체로 그의 부활을 반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사실상 부활해서 그 무덤이 비었고 그 시체는 영광의 몸으로 화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증언자로 나설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덤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죽음에 매이지 않았다”, “그에게 속한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하고 그들은 외쳤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있으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고 그들은 생명 안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3백년 – 그들은 빈손으로 대 로마제국에 항거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잡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죽이는 자를 위해 용서를 빌었습니다. 토옥에서 노래하고 웃음으로 사자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습니까? 죽음이 왜 그들을 무섭게 하질 못했습니까? 그것은 그들 앞에서 죽음이 그 권세를 상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추석날, 수많은 사람들이 무덤을 찾아, 각기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옛 모습을 더듬으면서 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인정이요, 존재에 대한 물음의 대답은 아닙니다. “왜 너는 이렇게 됐느냐?”고 물어도 물어도 거기서는 대답이 없습니다. 오직 한 분, 하늘로부터 와서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 그리스도에게서만 이 물음은 대답을 얻는 것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날 무덤을 찾는 인생, 그는 무덤의 수수께끼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그리스도 안에서 무덤을 넘어 영생으로 옮기는 축복을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소식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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