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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옥목사(말씀목회연구원 원장)의 평화통일월요기도회 설교문을 공유합니다.

오정석 (서울동노회,양무리교회,목사) 2018-09-12 (수) 16:22 5년전 2550  
  평화의_계보를_잇는_사람들.hwp (32.0K), Down : 23, 2018-09-12 16:22:36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서울동장로회 주관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설교문을 공유합니다.]

평화(平和)의 계보(系譜)를 잇는 사람들

(33:1~11, 8:9, 2:14~20)


말씀목회연구원 원장 최부옥목사

   

독일의 전 수상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빌리 브란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어록(語錄)을 세상에 남겼다.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평화가 없이는 아무 것도 소용없다’(Freide ist nicht Alles, aber ohne Friede Alles nichts)

그는 1970127,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의 유태인 600만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기리는 공동묘지를 직접 찾아가서, 가해(加害) 국가의 수반(首班)으로서 무릎을 꿇고 3분간의 깊은 침묵(沈黙)으로 참회(懺悔)의 시간을 가짐으로서, 평화의 가치(價値)가 이 지구촌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것임을 스스로 직접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의 이런 평화를 위한 참회의 행보는 초기에는 주변으로부터 숱한 비판과 찬사를 몰고 왔지만, 그러나 가해국가인 독일로서는 역사의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전기(轉機)를 제공하였고, 나중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한 평화의 힘으로, 자신의 나라 독일이 동서의 강고했던 분단의 장벽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면서 지금의 통일(統一)독일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를 자세히 상고(詳考)해보면, 역사가 숱한 파괴(破壞)의 세력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몸살을 앓으며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망하지 않고 존속해 오고 있는 까닭은 바로 인간들 속에 역사와 인류의 생명을 떠받치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역사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자들은 파괴자들과 독재자들과 분단 세력들 같이 보일런지 모르나, 그러나 다시 보면, 진정한 주역들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저항하며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싸우며 씨름하던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는 분명하고도 확고한 그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인간 역사의 진정한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또 편(便)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잠시 성경의 사례(事例)를 확인하자.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알고 있다. 그렇다. 분명히 모세는 그 당시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탄압받던 히브리 백성들 중에는 자신들의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며, 하늘 아버지께 부르짖고 탄원하면서 평화운동을 전개했던 익명(匿名)의 무리들의 피와 땀과 헌신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부분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부르실 때, 바로 그 부분을 매우 구체적으로 모세에게 일깨우셨다.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3:7),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를 내가 보았으니-’(3:9).

 

그렇다. 평화를 위해 일하시는 사람들은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다. 역사와 새 세계를 여는 자들이다. 남은 잘 때 안 자고, 남은 침묵할 때 외치며, 남이 외면할 때 참여하면서-, 길을 내고 터를 닦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유명 인사이냐, 무명 인사이냐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이름으로 승부하는 자들이 아니라, 가치와 생명으로 승부하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배려(配慮)를 받는다. 이들이야말로 당신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의 맥()을 세우고 이어가는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화평(和平)케 하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예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규정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결코 버릴 수 없이 이미 구원 받게 된 존재가 되었음을 공포하신 선포가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이야말로, 구원의 가장 구체적인 증표가 된다.

 

성경을 계속 들여다보면, 구약의 족장들과 의인들 모두는 다 평화를 좇아 사는 자들의 모범으로 세움 받은 이들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의인 가운데에는 싸움이나 분쟁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하나님과 이웃 사람들과의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온 평화의 순례자들이었다. 일종의 평화 계보(系譜)의 거목(巨木)이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물질적 이해관계로 인한 혈족(血族)끼리의 다툼이나 갈등을 단호히 거부했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고단한 나그네들을 극진히 섬길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족장이었다.

 

그 아들 이삭은 누구였나? 그는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의 시기와 탐욕과 무례한 훼방에도 맞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양보와 인내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갔던 평화의 족장이었다(26장 참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보충해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구약 본문의 주인공인 야곱은 대의와 화합과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서슴없이 소위 퍼주기도 감행(敢行)할 줄 아는 대담한 족장이었다. 자기에게 적개심이 깊었던 형 에서를 20년 만에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될 때, 그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형과 화목하고 형제 관계의 평화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전한다. 실로 엄청난 물량의 재물 될 가축들을 형 에서에게 드리면서 말이다(7).

 

보기에는 비굴할 정도같이 보였지만, 그러나 그의 모습은 앞에서 말한, 빌리 브란트 독일 수상의 무릎 꿇는 그 모습 이상이었다. 평화와 생명을 얻고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기꺼이 희생(犧牲)할 수 있음을 담대하게 드러낸 것이다. 야곱의 그런 평화를 위한 전력투구의 노력은 결국, 형 에서의 마음에 놀라운 감동(感動)을 안겨주면서, 아브라함 가계를 더욱 공고히 세우게 하는 전기(轉機)가 되었다.

 

그의 아들인 요셉은 어떤가? 아버지 야곱이 사망 후, 요셉 앞에서 두려워 떠는 형들에게 그가 얼마나 평화와 화해의 힘이 진정한 승리의 길인지를 생생히 보여 준 족장이었다. 어린 자기를 형들이 죽이려다 나중엔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넘기었던 그 형들, 그로 인하여 자신이 당했던 숱한 삶의 고생과 역경들-, 이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원망과 미움과 증오로 풀어도 시원찮을 그였지만, 그러나 그는 그가 겪어온 모든 역경들을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로 돌리면서, 그 형들과 그 후손들 모두를 관용과 용서의 품으로 안았다. 그 바람에, 야곱의 후손들이 하나 될 수 있었고,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면서, 세계 역사에서 매우 특이(特異)하고 신비스러운 종족인 유대 족속을 이룰 수 있었다.

 

평화의 계보를 이토록 확고히 이룬 족장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후손의 일원으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평화의 주()로 보내신 것이다! 예수를 통하여 그 평화의 계보를 더욱 강화시키고 완성하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를 통하여 이 땅에서 펼쳐진 평화의 내용은 정죄와 심판을 극복할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와 용서(容恕)였다. 갈보리 십자가와 부활로서, 그는 지구촌 평화의 실체와 완성도를 보여 주셨다.

 

뿐만 아니다. 주님의 그러한 평화 계보는 자연히 성령 공동체인 그의 제자들과 그의 몸 된 교회(敎會)들을 통하여 온 세계로 퍼졌다. 전 세계를 향하여 예수의 구세주 되심을 전하는 사도 바울은,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마치 모퉁이 머릿돌과 같아서, 갈라진 모든 세상의 높은 장벽들과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하나로 묶어낼 평화의 세상을 열 마스터 키(Key)'로 선포(宣布)했다(2:14,19-20).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평화의 계보가 영광스럽게도 여기 모인 우리 기장 가족들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동역자들에게 계승(繼承)되고 있다! 하지만 평화를 드러내는 방법과 수단은 똑 같을 리가 없다.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미래도 이 평화 계보를 좇는 사람들의 것이리라는 점이다. 하나님에게는 앞장 세워 일할 사람이 이들 이외에는 달리 찾아보시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찍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만델라는, ‘인간 세상에서 평화만큼 강력하고 위대한 무기(武器)는 없다라고 설파(說破)한 바 있다. 그리고 본 증언자에게도 여러분과 함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威力)을 불러오는 것인지에 대한 뜨거운 체험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잠시 나누고 싶다.

 

첫째는, 우리 교단이 평화통일이 성취(成就)되기까지 중단 없이 기도회를 하겠다, 98회 총회 때부터 시작했던 지난 5년간의 월요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운동 때문이다. 이 기도회는 지금 이 모임에 이르기까지 진행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단의 이러한 단호한 기도행진 선언과 또 꾸준히 모여서 손에 손을 잡고, 마음과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우리의 행진과 외침에 귀를 기우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나긴 행진에서 지치지 않도록, 우리를 편들어 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맛보도록 하신 것이다. 최근의 일연의 남북관계나 북미관계의 대전환은 분명히 우리의 이런 기도 행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깊이 있게 보고 평가해야 한다.

 

둘째는, 내가 지난 2016321일에 대한문 광장에서, 교단의 제100회 총회장으로서 고난당하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기도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당시의 정권의 난폭한 국정 때문에,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통탄해 하면서, ‘평화에 적수(敵手)는 없다라는 강력한 설교를 한 바가 있었다. 시청 뒷길에서의 길거리 성찬식도 경찰의 저지 속에서 베풀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잠시이지만 경찰서로부터 도로교통법 위반을 빌미로 총회장 출석요구서까지 받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크게 긴장한 순간이기도 했다.

 

놀라웠던 것은 그 일 이후였다. 우리의 더 강한 저항 속에 4.13 총선(總選)이 실시되었는데, 그 때부터 대변혁의 기적들이 우리나라 안팎에서 연이어서 발생했다. 시작은 의회 권력이 교체되면서, 국가의 정치 지형에 대변화가 왔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최순실 사건이 터졌고, 촛불혁명으로 국민들의 평화집회가 잇달으면서,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었고, 현 문재인 민주정권이 들어서는 정치의 큰 기적이 잇달았다. 더 큰 변화들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의 먹구름에서 극적으로 벗어나면서, 서로 정상(頂上)들이 만나며 전쟁 대신에 평화를 선택하겠다고 약속하고 선언하는 세계사적(世界史的) 연출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의 흐름이,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進行)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이런 흐름의 변화들은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다. 특정인만의 공헌도 아니다. 평화를 알고 그 세계를 열고자 기도하며 매달린 이들과 그에 대해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고, 입으로 시인(是認)하며, 주님께 감사(感謝)하고 나아가야 하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는 전쟁을 하려는 사람들과 평화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싸움판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 중에 다행스럽고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반열(班列)에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주께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경고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인 평화(平和)를 무기삼아 살아가려고 이 자리에 모였다. 엄중한 말씀을 드린다. 본질적으로 평화는 인류와 인간 세상에 가장 고귀(高貴)한 것이어서, 그것을 취하기 위하여서는 그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역사적인 시점에 서있다. 7,300만 동포들이 비핵화 시대를 맞이하고 평화협정을 통하여 남북이 진정한 자주(自主) 국가가 되어, 공존(共存). 공영(共榮). 공생(共生)의 새 나라로 나아갈 턱 밑에까지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야곱의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더 기도하자. 더 함께 힘과 지혜를 결집시키자.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할 우리 땅 한반도가 되도록 마지막 영적 싸움도 잘 치러내자. 주님의 영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 2018. 9.10.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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