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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멋진 분이 여기 있네

추일엽 (경기노회,수원주님의교회,목사) 2012-12-22 (토) 11:26 11년전 3037  
48%+1%를 잃어버리고도 만장일치로 당선된 자인양 기고만장이네
51%를 대단한 성과인양 상대적 비교로 우위를 점하여 마치 전체국민이 지지하고 득표한 대단한 영웅처럼 떠받드는 분위기는 자제하여야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역대 대선 득표율을 비교분석해보면 큰 비율로 이긴 것도 아니다.
대수
연도별
투표율
1위 당선율
2위 당선율
득표율차
2대
1952
88.10
이승만 74.6
조봉암 11.3
63.3
3대
1956
94.40
이승만 69.9
조봉암 30.0
39.6
5대
1963
85.00
박정희 46.6
윤보선 45.1
1.5
6대
1967
83.60
박정희 51.4
윤보선 40.9
10.5
7대
1971
79.80
박정희 53.1
김대중 45.2
7.9
13대
1987
89.20
노태우 36.6
김영삼 28.0
8.6
14대
1992
81.90
김영삼 42.0
김대중 33.8
8.2
15대
1997
80.70
김대중 40.3
이회창 38.7
1.6
16대
2002
70.80
노무현 48.9
이회창 46.6
2.3
17대
2007
63.00
이명박 48.7
정동영 26.1
22.6
19대
2012
투표율75.80
박근혜 51.6
15,773,128표
문재인 48.0
14,692,632
3.6
역대 대통령들이 당선된 비율보다 더 얻고도 진 것에 불과하다.
수치상에 불과한 108만표차이나 3%는 다른 대선과 비교분석하면 그리 큰 것도 아닐진대 왜들 호들갑을 떠는가
나라 형편은 지긐도 엉망이다 내년 대학생등록금 4%인상에대 물가는 하늘 높이 치솟고 양극화는 삼화되고
와중에 선거 후유증 가운데 심각한 내홍을 앓고 있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늘 신문에서 ....
 가게부채1000조에 이른 현싱에 대성공약에 내비친 국민행복기금은 18조밖에 안된다.
어덯게 복지에산을 6조를 늘리나 여당 현정권도 반대하고 나선다.
앞으로 넘어가야 할 산도 만만치 않다.
 
진정한 사과 하라, 그럼 나도 박근혜 지지한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보수가 보수에게|표창원 경찰대 교수
대통령선거 이튿날이었다. 20일 오전 11시 표창원(48) 경찰대 교수는 서울시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인터뷰실에 들어오자마자 “조사실 같다”고 말했다. 고시원처럼 좁은 방.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로 불리는 그는 기자에게 “거기가 형사가 앉는 자리”라고 말했다. 문득 요 며칠간 취조실에 갇힌 피의자처럼 그가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 나흘 전인 15일 표 교수는 ‘국정원 댓글알바 의혹’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글을 올리며 정치적 논란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현직 경찰대 교수 신분으로 경찰과 국정원의 대응을 정면비판한 것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밝지 않았지만 그는 영락없는 보수주의자였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의와 의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가정적 배경 또한 이와 무관치 않았다. 결국 40대 후반 직업적 소신에 따라 정치무대에 등장한 그에게서 미국 합리적 보수의 상징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냄새가 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직을 결심하게 만든 한장의 사진
-어제 잠은 충분히 잤나?
“개표방송 보다가 밤 10시쯤 수면제를 먹고 잤다. 지난 주말 이후 뇌가 초긴장 상태였던 거 같다. 나흘 동안 잠을 못 잤다.”
-16일 블로그에 사직서를 내겠다고 밝혔다.
“엄정한 중립성을 유지해야 할 경찰대에 누를 끼칠 것 같았다. 교수직을 유지하려면 내 자유를 제한해야 했다. 하지만 제한하거나 조절하려고 하면 이미 그건 자유가 아니다. 밤새워 내린 결론은 자유를 택하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따지기 앞서 나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아직 사표가 수리되진 않았다.”
-현직에서 비판할 수 없었나?
“누가 감히 국정원이라는 거대 정보기관에 덤비겠나? 국정원이 ‘실수했다’ ‘잘못했다’ 할 사안이 아니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냥 끝나는 사안이다. 경찰대 교수직 유지하면서 어찌 그걸 하겠나. 새누리당, 정부, 국정원에서 ‘저놈 입 좀 막아라’ 안 그러겠나. 내가 속해 있으면 주변 분들이 괴로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서 하는 게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국정원 댓글알바 의혹은 11일 밤 터져나왔다. 민주통합당의 신고를 받은 선거관리위원회와 경찰이 국정원 요원의 오피스텔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해당 요원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하룻밤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찰의 대응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건가?
“불법선거사무실이라는 신고를 받고 선관위가 출동했다. 처음엔 국정원 직원이 문을 열어줬고, 확인 결과 선거사무실이 아니었으며 당사자는 국정원 요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다음 제보한 측에서 “우리가 첩보를 입수했는데 저 사람은 국정원 직원이고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 댓글을 단다”고 주장했다. 제보자가 말을 바꾼 상황이다. 여기서 경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고자의 저의도 고려해야 하는 한편 만약 (신고가) 사실이라면 국가기관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신고자가 이해관계자라고 해서 엄청난 파장을 담고 있는 신고를 무시해도 된다는 정당성은 없었다. 신고자의 신고행위에 기망(기만)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처벌하면 된다.”
-이 사건 하나 때문이었나?
“원래 나는 정치적 중립에 매몰돼 있었다. 새누리당에서 공약 만드는 데 참여해 달랄 때도 거절했고, 다른 진영에도 참여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희한한 사진을 본 거다. 여성 수사과장이 국정원 직원의 집 대문에 몸을 대고 있었다. 왜 경찰이 불쌍가련한 모습으로 비쳐지나? 과감히 들어가야지, 뭐하나 싶었다. 공직선거법에서도 ‘즉시강제권’이 규정돼 있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상황이면 들어가도 된다. 신고자가 제기한 대로 그의 신분이 국정원 직원이라는 게 확인됐고, 시시티브이를 봤는데 (국정원 요원이) 하루 2~3시간만 밖에 나갔다 오는 게 발견됐다. 진실 확인을 위해서 즉시강제를 이행했어야 했다.”
-즉시강제란?
“문을 따고 들어가야 했다는 말이다.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 소방서까지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표 교수는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말했다. 보수주의자는 일반적으로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국가기관의 권위를 중시하지만, 그는 ‘한국판 워터게이트’를 연상시키는 사건에 대해서 침묵할 수 없다며 정치담론의 무대에 등장했다. 정권교체를 해야 이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커밍아웃’한 블로그 글의 제목은 ‘보수주의자로서 고백하고 경고하고 요구합니다’였다. 그의 아버지는 17살 때 부모와 형제를 남겨두고 “공산당 압제를 피해 목숨을 걸고 북에서 탈출”해 줄곧 해병대 등 군부대에서 근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해병대 훈련장에서 근무할 때 만난 경북 포항 출신이다. 표 교수의 가족적 배경은 한국 보수세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라면 돌연 사직서를 던질 것 같지 않다.
“아니다. 보수주의자가 원래 멋있다. 안정성, 신중함만 보수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편견이다. 진보 중에도 신중한 사람 있고 보수 중에도 과감한 사람 있다.”
해병 아버지 덕에 해병처럼 커 경찰대 들어가 1980년대에도
민주화운동 반대편에서 살아 노태우와 이명박도 찍었는데
이명박 정권 5년에 완전 실망 언론자유 소중함 뼈저리게 느껴
내가 범죄를 다루지 않나 모든 범죄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다 이해한다”면서 범죄자를 인정하고 동정해준다
단 처벌은 받아야 하는 것 이 점은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신촌에서 “짭새”라는 이유로 몰매 맞은 사연
-아버지가 미군에게 해저침투 등 특수전 교육을 받고 해병으로 근무했고 미군 소속으로 국방부의 비밀 대북업무를 맡기도 했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나?
“말하기 힘들다. 어렸을 적부터 간첩이 우릴 공격할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커왔다. 아버지도 늘 불안을 느끼고 사셨으니까….”
-아버지의 영향이 컸겠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해병이었고 나도 해병처럼 컸다. 초등학교 적부터 아버지와 구보하고 얼음 속에 들어가 냉수욕했다. 울고불고하면 ‘남자가 이런 것도 못하느냐’ 야단치셨다. 잘못하면 야구 방망이로 맞아서 동네 사람들도 다 알았지. 아버지는 절대 북한이 하는 얘기 믿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그곳에선 말할 자유도 없다고 했다. 어머니도 강한 분이셨다. 아버지가 베트남전쟁에 가서 한때 연락이 끊겼다. 송금도 안 오던 상황에서 어머니가 행상하면서 집을 꾸려나갔다.”
-경찰대는 왜 선택했나?
“고3 때 친구들과 경기용 화약으로 장난을 치다가 크게 다쳤다.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고 돈 안 드는 대학을 가야겠다고 했는데, 친구가 경찰대 팸플릿을 가져다줬다. ‘조국, 정의, 명예’라는 학훈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조국,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치인 정의가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명예롭게 살고 싶었으니까. 셜록 홈스를 동경해왔고 <수사반장>도 우상이었다.”
-1985년에 경찰대에 들어갔다. 경찰이 민주화운동을 사찰하고 진압하던 때인데.
“경찰대생이라는 신분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의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경찰에 희생된) 박종철, 이한열 사건 등을 보면서 표현은 못하지만 죄책감도 느꼈고 한편으로는 경찰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해하려고 했다. 질서 유지하고 경제 탄탄히 하려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닌가. 대학 3학년 연고전 때였나. 서울 신촌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이 날 보자마자 “야, 짭새야”라고 불렀다.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나를 마구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웃음)”
-경찰대 졸업 후 전경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일부러 집회·시위가 적은 제주도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주 서울로 차출됐다. 시위대의 최전선엔 서울 병력이, 2선엔 경기, 3선은 광주·울산, 4선은 충남·강원, 맨 끝은 제주도가 맡았다. 시위가 여기저기서 터지니까 전경대 배치도 자주 바뀌었다. 우리 임무는 대원들 잃어버리지 않는 거였다.(웃음)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질 적에는 화성경찰서에서 기동대장을 맡았다. 살인사건 현장의 보안과 수색을 담당했지만, 시위에도 자주 끌려갔다. 한번은 한신대 진압하러 나갔는데 최루탄이 휘날리는 와중에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코뼈가 함몰됐다. 대원들이 비분강개해서 한신대 습격하러 간다고 하더라. 몰래 병원에서 나와 경찰서로 가서 ‘쟤들이 나쁜 게 아니다. 더 자유롭고 좋은 사회를 위해 하는 거다’ 하면서 말렸다.”
표창원 교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보수주의자로서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안전을 지켰다. 87년 결국 민주화운동 진영은 박정희 정권 때 몰수됐던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고, 그해 표 교수도 첫 ‘대통령 직선제’에 참여한다.
-지금까지 누구를 찍었나?
“87년엔 노태우,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을 찍었다.”
-문재인을 찍은 이유는?
“이명박 정권 5년에 대해 완전히 실망했다. 특히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언론의 자유만 확보되면 언론이 정부의 잘못을 알아서 지적해주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수많은 기자와 피디가 해직됐다. (프로파일러로서) 피디수첩 등에 나가서 많이 얘기했는데, 그분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거다. 노무현은 권위주의를 버리는 신선한 충격 때문에, 이명박은 사회를 대결과 혼란으로 몰아간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찍었다.”
프리허그, 젊은이와 부둥켜안고 울다
-이번 선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주적 절차로 복권됐다는 평가도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표창원 경찰대 교수가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과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나는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 전쟁의 참화 속에 국민이 굶주릴 때 먹고살 수 있게 해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한민국에 기여한 위대한 지도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재했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내가 범죄를 다루지 않나. 모든 범죄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오케이, 다 이해한다’며 범죄자를 인정하고 동정해준다. 다만 ‘당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경제 일궈준 것 감사합니다. 다만 당신이 저지른 건 분명히 죄입니다. 그건 인정하고 받아들이십시오’ 하는 거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부탁하고 싶다. 과거를 미화하려 하거나 부정하지 말라. 대선 후보 시절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했는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는 상태에서 한 사과는 진정성에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족들에게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하고 명예회복 해드리고 새 출발 하자고 해라. 그러면 나도 박근혜 지지할 자신 있다. 해직기자들, 나꼼수, 쌍용차 노동자 등 이번 정부에 일어났던 부당한 탄압의 희생자들이 제자리에 돌아가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비판적인 얘기를 해도 참고 인내해주길 바란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멋지게 사회통합 이루시길 바란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젊은이가 투표장에 나왔다. 총력을 다했다. 20~30대는 문재인을 지지했고 50~60대는 박근혜에게 몰표를 던졌다. 대선 결과를 마주한 젊은이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절망과 무기력을 토하고 있다. 남은 절반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절망감, 어쩌면 집단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패배감을 느낄 필요 없다. 나는 승리했다고 본다.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그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소리를 냈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보수 쪽에도 다 진보를 ‘종북좌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정말 소수다. 한국전쟁의 후유증 속에서 살았고 박정희 정권 때 첨예한 대립을 겪으면서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많은 분들이 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셨다. 송구스럽지만 나는 그렇게 칭찬받을 사람 아니다. 일제 때 독립운동하셨던 분들, 한국전쟁 때 소련·중공 남침으로부터 수호한 학도병들, 그리고 이 땅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김근태, 이한열, 박종철 열사 같은 분들의 희생 때문에 우리나라가 있었다. 나는 희생한 거 없다. 그런 분들과 나를 비교해선 안 된다.”
이번 선거에서 기력이 쇠진한 87년 체제의 우울한 종말을 봤다는 말을 들었다. 침묵하던 보수주의자 표창원은 종말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뛰쳐나와 젊은이들을 껴안고 있다.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서울 광화문과 강남에서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인터뷰를 마친 그가 총총 사라졌다. 그날 저녁 강남 교보타워 앞에선, 길게 줄을 선 젊은이들이 한 보수주의자의 포옹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 교수와 젊은이는 감싸안고 울었다. 한 시대가 저무는 장면 같았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진보 대 보수’ 총집결 구도로 치러진 선거인 만큼 환호도 절망도 큽니다. 보수의 3.5% 승리로 마감된 대통령 선거 결과를 들고 비판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보수정부’의 길을 물었습니다. 보수적 가정에서 자란 범죄심리학자, 그리고 각각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보수인사 등 세 명은 해직언론인,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구호하는 보수의 정신을 잊지 말라고 주문했습니다. 이번 선거를 보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프리허그’하는 당선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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