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 誣告 였다는 걸 확인 받다.
죽임을 면하고 살아 남은 안당의 아들 안처함 安處 言+咸은 시골에 숨어서 소리없이 사는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끔찍한 사건에서 받은 충격도 컷고, 무엇보다도 가까운 집안에서 고변한 것이 더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울이 정 떨어져서 먼 데로 갔다.
지리산 가까운 곳에 , 더 갈 수가 없어서 거기 머문다.
그냥 숨어 있는 수 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거 만도 천만 다행이었다. 근 오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거기에서 난 아들, 안 윤 安 玧 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임금이 여러 차례 바뀌어 선조 宣祖가 위에 있을 때였다.
자기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역모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 달라는 호소였다.
기묘사화로 죄없는 인물 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 1519년, 안씨 네가 역모로 처형 된 것이 1521년인데,
안 윤 이 상소를 한 것은 1566년이었으니, 45년이 지난 후 였다.
이걸 어떻게 밝힐 수 있나.
지금 같으면 여러가지 증거를 찾아내어서 합리적인 판결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난
사건을 어떻게 밝히는가.
고심하던 선조는 주변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그 사건의 내용을 알만한 증인 들의 말을 취합하여
보니 잘못된 고발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늦었지마는 억울한 처형이었다는 걸 공표하고, 안 당 에게 신분이 다시 회복 되게 하여 주었다.
삭탈 된 관직도 회복하고 당연히 자손들도 복권 되었다.
그런데 법의 판결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안 당의 자손들 중에서 두 번 째 솟 장이 올라왔다.
신분 복권 판결을 받은 지 이십년이 지난 뒤였다.
1586년,
솟 장에는 안 씨네 ' 노비안 奴婢案' 이라는 것이 첨부 되어 있었다.
노비들의 명단을 적은 것이 노비안이다.
노비는 사람이 아니고, 재산이었다.
부잣집에서 재산을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는 분재기 分財記 에는 노비들도 같이 나누어
지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저 유명한 선생으로 행세하고 다니는 송익필과 그 형제들은 안씨네 노비의 자손이라는 걸 확인 하여
달라는 솟 장이었다.
원고는 안 당의 손자 며느리 윤 씨 명의로 올라 왔는데
이 소송은 전 소송보다 몇 갑절 더 어려웠다.
이 사건에는 조선의 선비들이 다 한 마디씩 하게 된다.
동인들은 동인들 대로 , 서인들은 서인들 대로
원고는 東人들의 후원을 받으며 소를 진행 하였고, 피고네 송익필과 그 형제들은 당연히 서 인 西人들이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싸움은 쉽게 끝날 수가 없었다.
전 조선 지식인들이 이 사건에 손을 대었다.
판결하기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이미 천인이 면천 된 지가 65년이 지났으니, 그 세월 만으로도 다 시효가 완성 됐다는 게 西人들의 의견이
었다. 그 말은 지금도 현행 법에서 받아 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시효가 완성 됐다는 의견 보다도 더 휴머니즘 적인 의견이 많았다.
이미 면천 된 지가 두 세대 를 지난 일이니, 그걸 지금 들고 나와서 재론 할 수 없다는 말,
그 예학의 대가요 조선의 모든 지식인들의 선생이신 김장생도, 송시열도, 김집도,
송익필에 대한 노비 건은 천부당 만 부당하다고 절절이 호소하였다.
그렇게 전 조선의 선비들이 다 달라 붙어서 왈가 왈부하던 사건은
법대로, 규정대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3년동안을 전 국의 모든 이들이 싸우던 사건은 결국,
송익필 형제들이 안씨네 노비임을 다시 선언하였다.
노비안에 있는 대로 하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 판결이 내려 진 후에 송익필 형제들, 그 자손들 칠십여 명은 전국으로 도피하였다.
문장의 대가로, 조선의 대 스승으로 , 서인의 지도자로 있던 사람을 다시 안씨네 노비로 삼으라니,
그건 피고들이 도저히 받아 들여 질 수 없는 판결이었다.
변성명을 하고 도피하였지마는 구봉 龜峰 선생 ( 지난 번에 九봉 선생이라 표기는 잘못 된 것임 )은
서인들의 명사들 집에서 비호를 해 주어서 잘 숨어 있었는데, 그 중에 정 철 鄭 澈 선생네 집에서
많은 신세를 졌다.
송익필은 그렇게 숨어 다니면서 ,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자기를 이렇게 파멸로 몰아 넣은 놈들을 복수 하고 싶었다.
원고의 뒤에서 원고를 부추겨서 나를 죽이려는 이 놈들,
이 동인 놈들을 다 죽이고 싶도록 분이 풀리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숨어서 동인 몰살 꾀를 낸 것이, 정 여립 鄭汝立 사건이었다.
입추 立秋 가 가까운 날,
잠시 비가 멈춘 사이에 마당에는
고추 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고,
평지교회 흰 쾨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