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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은폐된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기억 투쟁

김동수 (부산노회,구포장로교회,준목) 2020-10-21 (수) 16:41 3년전 1622  
여순항쟁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무
이병학 교수

한국교회는 분단 시대에 반공주의 중심 세력으로서 승공주의를 지향하며 성장해 왔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무관심했고,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해 발언하기는커녕 침묵했다. 심지어 해방 후 월남한 교회 청년을 주축으로 한 서북청년회는 제주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제주 4·3 항쟁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여순 항쟁에 관한 특별법은 아직 제정되지 못했다. 여순 항쟁에서 수많은 무고한 자들이 국가 폭력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유족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힌 그들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지금도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전라남도 여수 신월리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 2000여 명은 무장봉기했다. 봉기는 제주 4·3 항쟁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그들은 여수항에서 군용선을 타고 출동해 제주도민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부당히 여겨 집단 항명했다. 아래는 당시 봉기군이 <여수인민보>에 발표한 성명서 내용이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 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 성명서는 봉기군이 남긴 유일한 전언이다. 봉기군은 제주도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현장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동포 학살을 의미하는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제주도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 폭력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에는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봉기 주도 인물 중 하나로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영희(1926~1953)는 어릴 적 고향인 전남 순천시 해룡면 도롱리에 있는 도롱교회를 다녔다. 1939년에 촬영된 도롱교회 주일학교 사진 속에 그의 얼굴이 있다.

봉기군의 의도와 행동은 신학적 관점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성서는 인간은 모두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창 1:27). 성서는 모든 인간이 주체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또한 인간에게는 자기 생명과 인권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불의한 법과 폭력 행위에 대항할 '저항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선언한다.


여순 항쟁 국가 폭력의 민간인 희생자들. 사진 출처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가진 주체로 산다는 것은, 고통당하는 이웃의 인권과 주체성 회복을 위해 불의에 저항하며 그들과 책임 있게 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14연대의 봉기는 미군정과 이승만 단독정부의 국가 폭력에 반대하고, 집단 학살 대상이 된 제주도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저항의 권리와 의무'를 실천한 윤리적 행동이었다.

일제 해방 후에도 이어진 지역 정치가와 친일 경찰의 억압에 실망한 여수·순천 지역민은 봉기군을 지지하고 봉기에 합류했다. 제14연대의 봉기는 여순 항쟁으로 발전했다. 봉기군은 장기 유격 투쟁을 위한 지리산 입산을 목표로 이동했다. 그들은 10월 20일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여수에서 순천으로 이동했다. 봉기군은 전남 동부 벌교·보성·고흥·곡성·광양·구례까지 진격했다. 진압에 투입된 많은 경찰대원이 교전 중 전사했고, 여수·순천에서 조직된 인민위원회 인민재판에서 지역 정치가 여러 명이 처형됐다.

정부는 봉기군을 강경 진압하기 위해 여러 연대를 진압군으로 동원했으며, 1948년 10월 22일 여수·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 군사고문단은 진압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고 최신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하며 적극 개입했다. 지역민들은 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라 진압군에 저항했다. 1948년 10월 19일 시작된 여순 항쟁의 불꽃은 강경 진압에 부딪혀 10월 27일 오후 꺼졌다. 그러나 지리산에 입산한 봉기군 일부를 추적하는 진압군의 작전은 계속되었다.

항쟁 진압 후 진압군과 생존 경찰관들은 잔존 봉기군과 협력자를 색출해 잔혹하게 보복했다. 그들은 순천과 여수에서 각각 모든 지역민을 초등학교 운동장 등 넓은 장소에 모아 놓고 부역 혐의자 심사를 했다. 부역자로 지목되거나 밝혀진 사람을 그 자리에서 몽둥이, 쇠사슬, 소총 개머리판 등으로 무참히 죽이거나 총살했다.

당시 현장에서 직접 사진을 찍어 <라이프 Life>지에 보도했던 미국인 기자 칼 마이던스(Carl Mydans, 1907~2004)는 1959년 출간한 <More than Meets the Eye>에서 "이 반란은 한반도 최남단에 주둔하고 있던 연대 안 작은 공산주의자 세포"가 일으켰으며, 지역민들은 "장기간 그들을 억압해 온 정치가들과 경찰에 대한 불만 때문에" 봉기에 가담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봉기 진압 직후 진압군과 경찰이 저지른 국가 폭력의 잔혹성과 인간성 파괴를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나흘 후 내가 3명의 다른 기자들과 함께 시내에 들어갔을 때 시민들이 모두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봉기를 진압했던 정부 군대는 반란자들이 저질렀던 짓과 똑같은 야만성과 정의를 무시하는 태도로 보복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흩어져 있는 여러 작은 집단에서는 소총 개머리판과 곤봉을 든 군경들이 무릎을 꿇은 남자들로부터 자백을 받아 내고 있었다.
 

어깨에 소총을 메고 일본 헬멧을 쓴 한 경찰 생존자는, 무릎 꿇은 한 남자가 맞고 기절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마침내 자백할 때까지 그의 얼굴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번갈아 때렸다. 동물이 뿔이나 머리로 들이받는 것처럼 헬멧 쓴 머리로 얼굴을 들이받으며 그 남자 주위를 돌며 환상적인 지그(zjg) 춤을 췄다. 자백 강요에 굴복한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운동장 건너편 구덩이로 끌려가 총살됐다. 그의 이름, 범죄 내용, 누가 그를 심문하고 처형을 집행했는지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었다.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에게 가장 끔찍한 기억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과 부녀자들의 침묵, 자신들을 잡아 온 군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들의 자기 억제, 총살당하러 끌려갈 때 아무 말 없었던 남자들의 침묵이다. 항의의 말도, 자비를 애원하는 울부짖음도, 하나님의 도움을 비는 어떤 중얼거림도 결코 없었다. 다시 몇 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진압군은 잔존 봉기군과 민간 부역자들을 색출해 학살했다. 사진 출처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칼 마이던스는 같은 책에서, 부역 혐의자로 끌려와 무릎 꿇고 양팔을 위로 든 이들 중 극심한 공포에 질려 있던 한 여자를 아래와 같이 회상한다.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 중 경찰 심문을 받기 위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길에 박혀 있는 뾰족한 돌 위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었다. 여자의 사내아이는 울고 애원하면서 여자의 가슴에 닿으려고 몇 번이고 애쓰며 기어갔지만, 그 여자는 감히 아이를 돕기 위해서 팔을 내리지 못했다."

부역 혐의자 심사는 몇 달간 계속됐다. 군경이 끌고 온 무고한 민간인들은 봉기군 협조 및 좌익 혐의로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군법회의와 국가보안법에 따라 중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고 집단 처형됐다. 진압군과 경찰은 지리산 인근 구례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총살했다. 여순 항쟁에서 국가 폭력으로 죽임 당한 희생자 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만 5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교회가 성서를 읽는 자리는 분단된 한반도다. 성서를 읽는 목적은 우리 역사와 현실과 삶을 해석하는 데 있다. 성서 해석은 인간의 구원과 진리 추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의·평화·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의 장이 돼야 한다.

천년왕국 환상(계 20:1-6)에서 보좌에 앉아 있는 목 베임 당한 순교자들은 로마 폭력의 희생자다. 그들은 모두 신원받아 하늘에 살아 있다. 그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역시 로마 폭력의 희생자다. 그들은 천상 제단 아래 모여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하나님에게 탄원했다. 그들의 절규는 하나님에게 신원을 요구하는 호소이자 자신들을 희생시킨 국가 폭력에 대한 항의다.

요한계시록은 희생자가 흘린 피로 점철해 있다. 요한계시록 저자의 진술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이념 아래 기억에서 삭제되고 은폐된 제국 폭력의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투쟁이자, 국가 폭력에 저항하라는 권고다.

로마 폭력의 희생자들처럼 여순 항쟁 희생자들은 반공주의 이념으로 은폐됐다. 국가는 그들을 망각하도록 강요했다. 만일 우리가 천년왕국 환상을 참된 성도가 대환란을 당하지 않고 휴거해 그리스도와 영화를 누릴 미래 이야기로만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 저자가 의도한 '저항의 윤리'를 놓치게 된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는다면, 빨갱이로 낙인찍혀 국가 폭력에 학살당한 여순 항쟁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 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계시를 통해 환란과 죽임을 당한 수많은 희생자 무리가 하늘에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계 6:9-11; 7:9; 19:1). 그는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희생자도 보았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계 18:24)." 하나님이 바빌론을 심판한 것은 기독교 순교자들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은폐된 국가 폭력 희생자를 기억해야 한다. 사진 출처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오늘날 한반도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천년왕국 환상을 제국 폭력의 희생자를 위한 기억 보존 투쟁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나아가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 특히 빨갱이로 낙인찍힌 여순 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 보존으로, 망각을 강요하는 국가권력에 저항을 권고하는 목소리로 읽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한국전쟁에서 인민군에게 희생된 교인들을 순교자라 부르며 기념비를 세우고 반공 교육장으로 사용하면서도,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을 여전히 빨갱이 취급하고 있다. 이제는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극복하고 한국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 봉인된 여순 항쟁 희생자를 기억하고, 진상 규명을 위한 여순 항쟁 특별법 제정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더 이상 국가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민주 사회 발전과 한반도 통일에 이바지해야 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학살의 진상이 규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5·18 민중 항쟁을 학살로 진압한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됐다. 여순 항쟁 특별법 제정은 희생자와 유족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아우슈비츠 대량 학살 희생자를 기억하지 않는 이들에게 경고한 엘리 위젤(Elie Wiesel)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적과 공범이다. 적을 반대하는 자는 누구나 희생자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 그들의 고독과 절망, 침묵과 반항의 이야기들을 전달해야 한다."

이병학 교수/ 한신대학교 신약학 은퇴교수.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독일 보훔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글은 <뉴스앤 조이> 2020년 10월 13일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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