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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첫교회 둔전교회 이야기 - 국민일보

임창세 (경기노회,둔전교회,목사) 2021-03-17 (수) 07:19 10개월전 1102  

[한국기독역사여행] 순교로 지킨 믿음, 지역 복음화 밀알이 되다

순교자 현석진 목사·김태수 장로와 성남 모란 둔전교회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 인근 둔전교회. 1904년 피득 선교사 등에 의해 설립된 둔전리교회는 1977년 성남 공군기지(서울비행장)가 둔전리 일대에 건설되면서 현 위치로 이전했다. 해방 직전 함태영 목사(부통령)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교회를 지켰다. 송파·강남 및 청계산·남한산성 자락 복음화의 중심이었다.

지금의 성남시 최초의 교회는 ‘모란시장’으로 많이 알려진 동네의 둔전교회이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경부선이 완공되던 해 설립됐다. ‘신약성서’ 번역을 완료했던 해이기도 하다. 러일전쟁(1905) 직전이었다.

그때 러시아 출신 피득(1872~1958·알렉산더 앨버트) 선교사가 조사 손흥집과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에 ‘겨자씨 믿음’을 심었다. 지금의 성남공군기지(서울공항) 활주로 땅이었다. 1977년 7월 3일자 둔전교회 주보 알림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지역이 철거 풍문으로 들떠 있습니다. 교우들은 가볍게 움직이지 마시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보다 선한 길을 찾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만㎡ 교회 땅은 서슬퍼런 권력의 힘에 제대로 보상도 못 받고 밀려났다. 그때 국가 권력과 싸우며 협상을 벌여야 했던 어느 장로는 “소설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무계획적 도시정책으로 서울에서 광주(현 성남)로 쫓겨난 철거민들이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을 일으켰던 후유증이 계속됐던 때라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더구나 유신 말기였다.

지난 2일 모란역 출구를 나서자 둔전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교회 뒤로 서울공항과 청계산이 보였다. 헬리콥터 한 대가 예배당 십자가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예배당 옆으로 순교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순교자 ‘현석진 목사·김태수 장로’였다. 이들의 스데반과 같은 순교를 위로라도 하듯 설립자 피득 선교사가 기념비에 함께 새겨져 있다.

초가 첫 성전. 신앙의 순수함이 묻어난다.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둔전교회 117년은 지역사이나 그 지역사의 가지들이 합쳐져 한국사의 맥락이 됐다. 순교자기념비로 남은 두 명의 삶은 어찌 보면 한국기독교사 본질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웃을 폭력으로부터 지키고 싶었고, 신앙과 교회의 가치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예수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우리 땅에 뿌리를 두고 내 이웃과 예수의 평화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제 아버지(김효성 장로·작고)는 세상적으로 불쌍한 분이셨습니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소년가장처럼 살아야 했으니까요. 생전 할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먼 산을 보시곤 했어요. 말 수가 줄어드셨죠. 그런 아버지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거예요.”

1948년 성전 봉헌 후 김태수 장로 가족. 김 장로 가문은 4대째 섬긴다.

이날 김태수 장로의 손자 김현섭 집사가 ‘순교자 가문’의 축복과 고단했던 삶을 얘기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같은 어려움이 그들에게도 배어 있었다. 김현섭·정재하 부부는 자녀까지 4대가 둔전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둔전교회는 해방 이듬해 8칸 초가 예배당을 헐고 새 성전을 헌당했다. 지금의 위례신도시에 있던 일본군 막사 자재를 소달구지에 실어 운반한 헌당이었다. 이때 막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를 졸업한 현석진 전도사는 함태영 목사(부통령)를 모시고 뜻깊은 헌당예배를 했다. 함 목사는 1944년 둔전교회에 부임했으나 신사참배 거부와 일제의 교회 탄압 등으로 카타콤 예배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해방과 함께 공직에 나가 심계원장(감사원장) 등을 지냈다.


그때 김태수는 현석진과 함께 교회를 이끌었다. 농사꾼의 아들 김태수는 결혼과 함께 법랑 회사에 취직한 안정적 신분의 기술자였다. 그가 20세 무렵 서울 연동교회에서 함태영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실히 일하던 중 신사참배와 주일성수 등의 어려움으로 고민하던 중 법랑 기술자가 갖는 지위의 세상적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구원의 주님 안에서 살기로 하고 둔전리로 낙향했다. 그리고 둔전교회 2대 장로가 됐다.

현석진은 평북 개천 출신으로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다니던 엘리트였다. 그러나 민족운동 등으로 쫓기게 됐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함남 함흥에 뿌리를 내렸다. 그때 장로회 지도자인 함흥 남부교회(현 서울 창신동 남부교회) 김형숙 목사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함흥YMCA 총무 등으로 활약하던 그는 해방과 함께 조만식 선생의 민주당에 합류했으나 김일성의 박해에 김형숙과 함께 3·8선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초 여름성경학교 율동 시간. 지금은 비행장이 된 둔전리 풍경이다.

둔전교회 교인들은 둔전교회 중심으로 지금의 송파·분당·판교·청계산과 남한산성 아랫마을 등을 순회하는 젊은 목사에게 흰 무명두루마기를 선물했다. ‘강대상에 선 그의 말씀 선포는 마치 천사와 같았다’고 작고한 교인들이 기록을 남겼다.

해방 후 사상 투쟁이 노골화되면서 현석진과 김태수는 광주 일대에 스며드는 공산주의 손길을 감지하고 지역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했다. 순식간에 마을이 점령됐다. 요시찰 인물이 된 두 사람은 피난 권유에도 교회를 지켰다. 1950년 7월 13일 현석진의 동료 목회자들이 찾아와 피난을 권하며 교회와 나라 걱정을 했다. 현석진은 그들을 예배당 지하실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강대상에 엎드려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비슷한 시각. 김태수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대왕면 인민위원회가 반동 검거에 나서던 무렵이었다. 교인들은 교회 장로이자 반공청년단장인 그에게 피난을 떠나라고 종용했다. 김태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 목사가 교회를 지키고 있는데 그만두고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14일 새벽 3시. 인민위가 들이닥쳤다.

“현석진, 월남자로 미국놈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국방군에 음식을 제공했다.”

“김태수, 인민을 종교라는 아편에 물들게 한 반동분자이자 우리들의 적.”

그렇게 검속된 두 사람은 대왕지서, 광주경찰서, 서대문형무소로 끌려다니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부르며 끌려간 목사와 장로였다. 대환란의 전쟁은 3년을 끌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교인들은 매년 7월 14일 모여 순교자 추모예배를 지속하고 있다. 성경구락부(분당교회 전신), 성남 효성고교 등이 순교자의 유업을 잇는 헌신에서 나온 열매다. 성남 일대는 둔전교회가 개척·분립한 교회가 10여곳에 이른다.

순교자기념비. 매년 7월 14일 기념예배를 갖는다. 맨 오른쪽이 임창세 목사.

둔전교회 임창세 목사는 “순교자 정신을 기리는 역사관 등을 설립해 지역민과 신앙의 후대들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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