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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영성수련원 포스터를 보고나서..

박승환 (대전광역노회,빌립보교회,목사) 2021-03-26 (금) 10:31 3년전 1236  
위의 기장 영성수련원의 포스터 그림은 소위 <판토크라토>(Pantocrator, Παντοκράτωρ)라는 영성 그림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위의 그림을 대하니 지난 주일 세계교회력(Revised Common Lectionary)에 따른 본문으로 선포한 저의 설교가 오버랩되었습니다.
당 교회력의 지난 주일(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2021/3/21)을 위한 본문 중 하나인 히브리서 5:5~10절을 중심으로 <모순된 세상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선포했던 강단의 원고를 아래와 같이 나눕니다. 저의 영성의 자리를 부족하지만 보여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샬롬^^
=================(아래는 설교 원고)=================
'모순된 세상의 그리스도'
히브리서 5:5~10
2021년 3월 21일

오늘의 말씀을 위하여 선택된 본문은 히브리서입니다. 즉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뜻이겠지요. 로마서는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요,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고린도전/후서는.. 또한 사람 당사자에게 보낸 편지들도 있지요..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아들처럼 사랑했던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요, 빌레몬서는 감옥에서 얻은 아들이라고 하는 오네시모를 사랑해서 빌레몬에게 도움을 행하기를 소망하며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로 그의 이름을 사용해서 책의 제목이 되었지요... 등등등...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뜻이 맞아요.
그러나, 이 글이 쓰여질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히브리 사람들(Heberites)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는 아주 오래된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35번 정도 나옵니다. 주로 요셉이야기(창 37-50)와 모세이야기(출 1-12장)에 많이 나옵니다. 요나도 풍랑이 일 때 자기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히브리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히브리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대인들이라고 불렀어요.
히브리란 말이 ‘강을 건너온 자’라는 말이라고도 하고 ‘거류민, 떠돌이’라는 사회학적 용어로 쓰여진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히브리라는 말의 뜻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그냥 쉽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구성되기 훨씬 전부터 부름을 얻던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백성들.. 아니 남한-북한 모두 일컬어 부른다면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까요? 조선사람이라고 부르면.. 그런데 이조 500여년의 나라를 조선이라고 해서 조금은 그 의미가 약해요.. 또는 북조선이라고 북한이 자기네들을 부르니.. 그것도 껄끄럽구요..
그래서 저는 <백의 민족>이라고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흰옷을 입고 흰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뜻이겠지만.. 우리는 전쟁을 싫어하고 흰색의 세마포처럼 옳은 행실을 사랑하는 백성들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으로 생각이 듭니다. (참고: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서 말씀했어요. 또한 송창근 목사님께서 작사하신 찬송가 247장 ‘보아라 저 하늘에’가 역시 떠오릅니다).
히브리인라는 뜻이 바로 그런 의미로 보여집니다. 그 뜻은 ‘강을 건너온 자들’로서 종살이 하던 백성들.. 약한 백성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무리들.. 그러나, 독특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따르는 민족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백의 민족이 나라이름이 아니듯 히브리라는 것이 나라이름으로 씌인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책의 제목이 히브리서이에요.
유대서?라면.. (그렇게 안한 이유가 사람이름으로 쓰여진 유다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겝니다.) 또한 이스라엘서라고 쓰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생각해 보았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 그리고 그분과의 약속을 따르고, 치유받고, 회복하고,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의미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인들의 모형(원형)이라는 의미를 잘 설명하고 알려주고자 이 편지가 씌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그 근본이 처음에 시작점이 어디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조는 누구일까요? 아담과 이브? 아니지요. 모세 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해요. 모세도 시조가 아니지요. 일반적으로 자기네들의 시조를 아브라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도 맘에 안찬 것 같아요. 그래서..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았어요.
그랬더니,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이 나온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 이었더라”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했어요.
그리고 성경 말씀은 아브라함 누구인가가 기록되고 있지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의 회복을 위해, 구원을 위해 멜기세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멜기세덱이 중심이 아니어요. 물론 히브리인들이겠지만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멜기세덱보다 앞선 분이라면 그것은 얘기가 끝난 것이지요. 그 사실을 기록한 책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선택되어진 본문말씀을 통해서 느껴지는 바는 대제사장과 멜기세덱의 이미지가 먼저 지나갑니다. 오버랩됩니다. 그 모습이 ‘겹쳐지나간다’(중첩)는 말입니다.
말씀 드린대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은 창세기(14:18~20)에서 한번 등장하나 그 정체가 비교적 모호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고 이긴 뒤 돌아가던 중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축복을 받았다고 전해 줍니다.
그리고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의 서열이라는 말이 또 한번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구성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히브리서에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원형(예시)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판단하고 중재할 수 있는 인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제사장과 같은 계열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함이 엿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삼각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대제사장, 멜기세덱,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판단하고 중재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 세워집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가는 유비입니다.
이렇게 멜기세덱에 대해서 집중하기 전에 한 마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교회(신앙생활) 내에서 오늘 선택된 구절은 앞 뒤 문맥을 고려치 않고 읽는 것이 오히려 더 강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과 (내려놓음으로) 순종(submission)과 (맞이할) 고난(suffering)에 대한 연관성은 말씀을 나누기 위해 어느 정도 관심을 모아야 합니다.
**국어사전: 복종(服從)은 ‘남의 명령이나 의사를 그대로 따라서 쫓음’이라고 했고, 순종(順從)은 ‘순수히 따름’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세밀하게 집중하지 않으면, 단순하게 멜기세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대제사장이고 지배자(왕)로서의 모습(image)에만 관심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는 의도하지 않게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교육하시기 위해서 펼치시는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기도만을 들어 주신다고 의도치 않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서 기자가 이것을 의도한 점이 없다고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글은 저술가들은 자기들이 의도한 것과 관계없이 읽혀질 때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정말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2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말씀을 읽으면서 능력(힘)과 위험점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지배자이고 대제사장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때 나타나는 오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전지전능하시 분으로서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말씀을 청취하고자 했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고자 하는 중심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점은 누구에게나 자주 일어납니다. 말씀을 읽어가면서 말씀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너무 무겁다고 느끼거나 믿기에 너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전해주어야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멜기세덱에 관해서 기묘하고 놀랄만한 모습(image)이 오히려 고난과 순종과 복종에 대한 점을 찾고 듣기가 어렵게 됩니다.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너무나도 감정적이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남용으로 그 본모습을 바닥에 가까울 정도로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남용으로 무기가 된 과거의 생각들과 본문들로 너무도 급하게 몰아갑니다. 그 이유는 적어도 본문과 무관한 것으로서의 그러한 경험들(고난과 복종과 순종)을 해체하는데 남용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어려운 부분들에 대항해서 말씀을 읽어나갈 때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부분들을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대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움에 대해서 설명하고 풀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즉, 그것은 겸손하고 도전을 주는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저 대용하는 희생물로 그 어떤 것이 아니라고 성찰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사랑의 신실함을 분출시킬 수 있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 자체로부터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합류할 수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소명에 앞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히브리서 2장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점차적으로 4장과 오늘의 5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의 근접한 측면으로 대제사장의 역할의 틀을 만들어 갑니다.
살과 피로 인해 태어나고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인 우리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 우리가 확실히 다가갈 수 있는가? 묻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한계적 존재라는 점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술적(그림) 묘사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둘은 상당히 상반됩니다. 간단한 구별과 설명이면서도 서로가 모순적입니다.
즉... ⑴ 첫 번째 형태는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측면은 배제되고 오직 전능하신 분으로 영광적인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그분에겐 그림자 없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전능자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의 왼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영원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가르침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축복을 표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런 그림을 판토크라토(Pantocrator, Παντοκράτωρ)라고 말합니다. 즉,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승천하신 후 모든 능력과 위엄을 지니신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또한, 심판의 주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⑵ 둘째로, 이에 반해, 또 다른 모습은 슬픔의 사람(인간)으로 표현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망가진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 모습은 전형적으로 피투성이의 모습입니다. 상처투성이로 너덜너덜해 진 모습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 어거지로 머리에 꾹 눌려 씌여져 있습니다. 또한, 공포의 고문의 무기들이 그 주위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슬픔의 인간으로 표현된 중세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을 보면 공포영화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슬픔의 모습으로 그려진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희생을 당하고 있으며, 애처로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습을 통해,
➊ 판토크라토(Pantocrator) 그리스도의 그림에서는 그리스도는 가장 높으신 분, 강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10번 씌여집니다. 고린도후서 6:18에서 한번 씌여지고(이는 예레미야서 31:35을 인용하면서 씌였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나머지 9번이 씌여지고 있음을 봅니다. 그 뜻은 대강, 요한계시록 1:8에서 말하는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라는 뜻입니다.
➋ 슬픔의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그림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장 취약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부르짖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즉, “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고 계신 모습이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기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이 두 가지 모습이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판토크라토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한 때 슬픔의 인간으로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판토크라토 그리스도가 진정한 전능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슬픔의 인간이셨던 그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지 상처나고 깨진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통치하는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희생으로 가까이 다가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원한 제사장”으로 남도록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복합적으로 종말론적 역할을 맡고 계십니다. 이 복합적 역할은 통치하시고, 판단하실 뿐만 아니라 중재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역할은 실제적으로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에게서는 불협화음이 조화를 찾아나갑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목적과 역할의 본보기(예시)로서 무명의 외국 통치자(멜기세덱)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여러 가지, 다소 모순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순은 걸림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모순된 세상에서 희망의 근본이라는 확신입니다.
===============================
***첨언: 위의 설교 원고를 통한 저의 영성의 자리를 어느 정도 느끼셨다면... 본 게시판 아래에 서너 번에 걸쳐 올린 '기장을 사랑하는 저의 고견'을 생각하심에 도움되시지 않을까 합니다. 게시판에 글을 그만 쓰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샬롬^^

박승환(,빌립보교회,목사) 2021-03-27 (토) 15:24 3년전
**3/27 오후 우연히 다시 나의 원고를 읽다보니.. 어쿠야~ 앞의 서두 부분에 이름들이 앞 뒤가 바뀌어 타잎이 되었었네요. 읽으시며 이미 발견하신 분도 계셨을 것입니다. 글은 정말 한 자, 한 자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ㅎㅎ 수정하였습니다^^ (박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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