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궁극적기도(ultimate pray)

홍성표 (서울북노회,예수제자,목사) 2018-04-23 (월) 23:27 2년전 831  
우리는 입술로 수 없이 기도한다. 소위 통성기도하는 자는 보수이고 은혜를 사모하며 받거나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려든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호흡이며 신앙과 믿음을 견지하는 생명줄이라 한다. 남북 민족세계전쟁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기도운동은 한국교회 양적성장에 기여한 바 크다. 

굶주리고 의지할 것 없는 가난한 민중들이 그 기도모임의 집회에 인산인해 몰려들었다. 거기에 이단이고 삼단이고 가 없었다. 배고프고 의존할 것이 없는 전쟁의 페허속에 성서의 말씀 자체는 희망의 근원이고 거기에 바르트고 메첸이고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른 것이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인간과 세상을 의지할 수 없으니 신을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야훼 이든 혹은 아브라함의 신 이든 아니면 유대교의 유일신이든 기독교의 하나님이든 송창근이 만났던 하나님이든 이용도가 만났던 하나님이든. 길선주나 혹은 손양원이 만났던 하나님이든 하나님은 구세주였다.  

132 년 된 개신교회는 어찌 되었든 배가 부르게 되었다. 비행기 티켓이나 배 삯이 없어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신학 유학을 못가는 시대는 아니다. 성서학을 통해서 히부리어나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아람어나 고대 상형문자들을 해독하고 성서의 가장 오래된 복사 본을 주석하는데 주저함이 없으면, 바울과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 웨슬레 등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신신학이라 칭하든 초대교회 신학으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리츨과 하르낙 트롤취 쉴라이에르막허 바르트와 본회퍼 톨트만과 구띠에레쯔와 보니노 등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서남동과 안병무, 강희남 문익환 은명기와 박형규 등 우리의 기라성 같은 신학과 신앙의 선배들과 스승들을 다 알고 있다. 

칼을 적게 갈았든 많이 갈았든 몰트만의 제초제이든 혹은 골을 비취이는 골비처이든 우리는 적어도 많은 신학자의 이름을 안다. 라인홀드 니버와 리처드 니버 형제, 흑인신학의 제임스 콘, 과정신학의 화이트헤드 등 미주 신학자들의 이름도 거반 들었다. 거기에 폴 틸히의 조직신학과 그리그도교의 사상사도 읽어 .  보았다. 

어느 신학자의 신학을 제 대로 이해 하였든 수박 걷 핥기 하였든 우리는 많은 신학적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 많은 신학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어렵다. 하비칵스의 세속도시를 통하여 변하는 종교의 미래를 보기도 하였고 한스 큉의 교회를 보면서 교회신학의 큰 틀을 이해하기도 한다. 

성서의 양식비평을 통해서 삶의자리를 찾아 보든 사회학적 비평과 문학 비평 등을 통하여 사회의 구조악을 들여다보고 정치신학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의 썩은 유착관계를 이해해 보기도 한다. 자연을 개발 이름아래 착취하는 인간의 탐욕을 통해서 생태신학과 생명신학, 그리고 땅의 신학과 우주적 새 지평으로 눈을 돌려 보기도 한다. 

신학적 학위를 통해서 소위 학교 강단에서 가르치는 자도 있고 성서와 삶의 현장을 보면서 민중과 일선에서 성서적 삶을 실천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존재의 틀과 내용을 서로가 채우며 깊이와 넓이를 확대하고 견고하게 해 나가기도 한다. 소위 신학자와 현장 목회자의 앎과 모자람을 무엇으로 구별할 것인가? 

우리의 궁극적 기도는 노회장이나 총회장 혹은 공천위원이나 공천위원장을 통해서 썩은 교권의 물을 생명수처럼 마시고 사는 자들이 아니다. 총무가 되기 위해서 이쪽 저쪽 눈치보면서 교권 정치를 하는 것도 아니다. 정의를 외치면서 가장 불의하고 비겁하게 살고 사랑을 오치면서 가장 악하고 간교하게 사는 거짓 인간으로 사는 것은 더욱 아니다.

총장이 되기 위해서 무슨 행보라도 하면서 낮바닥을 내고자 교수가 되는 것도 아니며 꼭 자신이 해야만 한신이 사는 것도 아니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 진실을 사는 자라야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겸손으로 자기를 낮출줄 알며 아픈 자의 상처를 싸매줄 수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짓과 불의에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자이어야 환다. 신의를 지키고 약속은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는 자라야 한다. 

신학과 신앙의 오만과 자만은 금물이다. 더러운 협상과 시궁창 같은 타협은 모든 진리를 파괴한다. 자기가 초기의 전략가이며 자기만이 문제의 해결자라는 추악한 오만을 버려야한다. 한 가지 사안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 하는 자는 경계해야 한다.이런 자를 가까이하면 여혼까지 상처를 받는다. 삶과 인생의 선배란 단순히 날 수만 많이 지났다고 해서 선배가 아니다. 진리와 정의를 배신하는 자는 선배가 될수가 없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불으와 거짓을 타파하고 진리와 길과 생명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형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다. 기장과 한신의 희망을 기대한다는 것은 이러한 추악한 모드 거래들의 민낯을 드러내는 역사적 계시에 의해서이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 츲ҺڻȰ 忩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п ⵶̰߿ 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