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기장과 한신대의 터닝 포인트

홍성표 (서울북노회,예수제자,목사) 2018-05-21 (월) 17:58 2년전 767  
요즘 수유리 한신대학원에서 목요일마다 한신 신학의 뿌리 찾기 강연이 진행된다. 
필자는 나름 그 흐름을 듣기 위해서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신학은 무엇을 위한 학문인가? 

학문이라 하면 인간의 이성적 인문과학이다.
굳이 인간학을 말하면 신으로부터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 
초월적인 신이 전제되어 있다. 

위로부터의 신학이 있고 
아래로부터의 신학이 있다. 
신을 위한 지배자적 입장의 신학이 있고 
인간을 위한 신의 낮은데로 임한 신학이 있다. 

중세(5세기)이후 유럽과 북미는 교회사요 신학사라고 볼 수 있다. 
특히 5세기부터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중세사는 신을 앞 세운 종교사업이 번창했었다. 
종교개혁 30년 전쟁 이후 신은 민중들과 함께 했는가? 적어도 중세 교황 중심의 때보다는 그랬다는 
평가를 해 볼 수 있다.

종교개혁 500년을 지난 오늘의 개신교(protestant) 현 주소는 어떠한가? 식민지배 세력들이 
한 손에는 총칼을 들고 한 손에는 성서를 들고 소위 하나님의 나라를 강요해 왔다.
 이것이 소위 근대문명의 시작이라고들 말한다. 

영국의 산업화와함께 자본주의가 발전 확대 재생산해 오면서 인간의 탐욕을 위한 좋은 방편이 성서를 근거로한 
복음주의 운동으로 둔갑하여 구한말 어지러운 혼란의 시기를 틈타서 동북아와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왔다. 
의지할 것 없는 민중들에게는 희소식이요.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을 살고 있다는 강대국들은 이러한 성서의 교리들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용하여 역사의 패권들을 확장 재생산하여 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칼. 맑스의 공산당 이론이나 자본론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분명 이것은 민중들을 속이는 아편으로 비쳐질 공산이 크다. 

바울의 은총론 이후 히포의 어거스틴의 은총론, 루터의 은총론과 칼 바르트와 몰트만 그리고 북미의 은총론들로 한반도의 기독교는 기름칠을 해 오고 있다. 물론 칼 바르트를 비롯하여 역사를 위한 훌륭한 신학자들의 노고나 노작들은 역사를 하나님의나라 만들기에 존재의 존재 됨을 다 쏟았고 그것들은 위대한 작품들임에 틀림 없다. 

우리가 그들만큼의 고뇌와 성서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위대하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위대한가?는 따져 봐야한다. 성서 아니 하나님 때문에 먹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점에서 봐도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좋으신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 이시다.

아버지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앞 세워 민중들을 속이고 사기치는 자들이 무수히 많다. 아마도 밥벌이와 먹고 살기 위해서 이단들과 사이비들도 그러하지만 정통을 주장하며 민중들을 교묘히 속여 종교귀족이 되어 사는 야누스의 존재들이 더 많다. 

사람들은 어려울수록 메시아를 기다린다. 의지할 것 없고 상처받으며, 상한갈대가 되고 꺼져가는 등불이 되어 
벼랑 끝에 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에, 위로자요 , 돕는자요 상담자요, 고치는 자요, 피난처가 되시며, 숨을 바위가 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의지할 유일한 분이 되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상품화 부렌드화 해서 협박하고 위협하면서 한 손에는 폭력의 도구로 한 편에서는 억압과 착취의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최고의 무기가 되는 것이 소위 신을 앞 세운 종교의 도구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우리 삶의 모든 희망의 원천이요. 희망의 생수이며. 희망의 동행자이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을 상품화해서 거짓된 욕구와 욕망과 탐욕을 삼는 자들이 역사 속에는 시글시글, 우글우글 하다는 것이다. 정통에서 보는 이단과 사이비들은 물론이고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이단들이 넘치고도 넘친다. 

종교개혁 누가 하는가? 신과 성서, 예수와 성서를 앞 세워 사기치는 사기꾼들이 개혁자요 역사를 새롭게 한다는 것인가? 아니다. 모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아니 자신들이 생산한 물질로부터도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들. 민중들만이 역사를 새로 쓸 수가 있다. 

남북의 진정한 통일이 되려면, 권력과 자본이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남북의 민중들이 나서야 한다. 
역사의 지탱과 유지가 여기까지 있게 된 것은 숱한 억압과 멸시를 감내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기꺼이 삶의 재물로 내어 놓은 민중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민중은 예수도 아니고 하니님과 동격은 더더욱 아니다. 민중은 상처 받고 아파하며 시대마다의 권력과 자본의 중심, 자신들이 만든것으로부터 소외 당하여 역사의 주변에서 삶의 벼랑 끝에 걸쳐사는 불쌍한 착취받는 자들이다. 민중들에게는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과 도우심과 상담과 치유가 절실하다.

그런데 이러한 연역한 갈대와 등불들의 마지막 진액까지도 짜내며 착취하는 거짓 된 종교세력, 불의한 권력과 자본을 우리는 뿌리 뽑아야 한다. 먹물들은 권력과 자본에 아부하고 아첨한다. 자본과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정말로 샘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들 자신이 권력과 자본의 동질이기 때문이다. 

갈 바르트든  몰트만, 골비처 든 그들이 민중들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민중들에게 그러한 신학들이 무엇을 주는가?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하며 다가가야 한다. 민중신학은 상황을 말하고 민중들의 인권을 말하지만 성서와 신학하고는 상관이없다? 그런가? 하나님이 역사의 한 복판에 오시고 민중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새 나라를 꿈꾸며 그 나라를 위해 처형되고 다시 살아 나셨지를 않는가? 

하나님도 팔고 민중들도 상품화 하며, 통일도 상품화 한다. 사기꾼들은 기회주의자이다. 장사꾼들은 새로운 상품에 눈독을 들인다. 사람들은 새것에 유혹되고 미혹을 당한다. 당하는 자보다 사기치는 자가 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있어야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민중들이여 하루 벌어 하루 살기가 빠듯하고 허리가 휘며 등골이 빠지도록 일하지만, 역사를 알고 배우며 역사를 새롭게 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아편을 주사하는 교회당 보다는 역사책을 알고 역사를 공부하자. 성서에서 역사를 꿰뚫는 혜안을 갖자. 더 이상 속지 말고 역사를 가르치는 목자와 교회를 살펴 나가자. 진실과 정직을 사는 곳을 찾자. 그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사랑과 정의를 이루는 길이라 믿는다. 

정의와 민중을 말하지만 속은 다른 셈을 하는 민중팔이도 조심하자. 
통일의 노래를 부르지만 통일장사하는 것도 동참해서는 안 된다.
하여 남북한 민중들이 교류하고 만나서 함께 사는 민족과 평화를 이루자. 

민중은 예수도 아니며 하나님은 더더욱 아니다 민중은 민중이고 민중은 신의 사랑과 예수가 동행해야할 연약하며 그러나 민중만이 역사의 변혁과 혁명의 주체인줄 알라. 하나님은 역사의새로움을 위하여 민중을 시대마다 택하신다. 신학적인 인식과 판단만으로는 민중을 알수 없다. 민중이 진정한  역사의 이스라엘이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 츲ҺڻȰ 忩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п ⵶̰߿ 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