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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설교/ 죽다 산 사람

추일엽 (경기노회,수원주님의교회,목사) 2014-04-18 (금) 15:23 5년전 1439  

이스라엘의 부활

창 22장 1~19절

12장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 소명 이야기의 결론으로 본다.

부활절에 이 말씀을 통해 이삭의 부활은 곧 이스라엘의 부활이며, 이것은 하나님 선민의 부활과 이어진다는 점을 살펴본다.

첫째, 여호와 이례와 이레 여호와

막이 오르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산에 오른다. 등산객들이 배낭을 메고 올라간다. 여기서 아버지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아들은 나뭇짐을 지고 올라간다. 보통은 칼이나 톱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나뭇짐을 해서 지고 내려오는 게 자연스럽다. 여기서는 오히려 이상하게도 나뭇짐을 지고 산에 올라간다. 우리는 막이 오르기 전 산에 나레이터를 통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키 위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 자신은 시험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삭도 자신이 제물로 드려질 것이라고는 알지 못하고 있다.

산 중턱쯤 올라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여기 제사드릴 나무도 있고, 칼과 불도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어요?” 아들의 질문에 순간 아버지는 “네가 제물이야”라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물음은 자신이 들고 있는 칼로 가슴을 오려내는 듯한 아픔이었을 겁이다. 어디 세상에 자식 사랑치 않는 부모가 어디 있나? <여객선침몰> 안산 단원고 "연락된 구조 학생 외의 부모가 얼마나 안타깝게 자식 소식에 애를 태우는가?

이삭은 어떤 아들인가? 얼마나 귀하게 얻은 아들인가? 어버지는 아들의 질문에 사실을 밝힐 수는 없고,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한 마디 툭 내뱉었을 지도 모른다. 산 위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때 아브라함이 눈을 들러 살펴보니 수양이 수풀에 뿔이 걸린 것을 보고 붙잡아 제물로 드린다. 어찌 보면 행복한 결말로 보일 수도 있다. 산에 오를 때와는 달리 부자간에 산에서 내려 올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아닐 수 없다. 여객선 침몰사고에서 연락도 되지 않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식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의 감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레이터는 아브라함이 그 산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했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여호와가 준비하신다’는 뜻이다. 어느 나라든 고대설화에는 원인론적 사담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지명이나 지형의 역사적 유래가 남아 전해진다. 창세기 나레이터는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를 밝혀준다. 더욱 깊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산위에서 수양을 준비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레 여호와’ 즉 ‘하나님 경외’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자의 순서를 바꿔보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희생하면서까지도 하나님을 공경했다는 의미이다.

본문의 클라이맥스는 17절, 18절에 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창 12장 2, 3절(“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말씀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복의 근원이 되어 그 후손들이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의 실현과정은 험난하여 요원하기만 하다. 당장 12장 하반부에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빼앗기는 위기를 맞는다. 아내 없이 어찌 후사를 볼 수 있겠는가? 15장에서 다시 아브라함은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3절)라고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니”(4절)하고 약속하시며, 그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신다.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편법을 써서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게 된다. 18장에는 아브라함이 99세이고 사라가 90세인데, 내년 이맘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20장에 아브라함은 또 다시 아내를 빼앗기는 수모와 위기를 맞는다. 21장에 가서야 드디어 아들을 잉태하게 되어 약속이 성취된다. 그런데 21장 후반부에는 서자인 이스마엘을 내어버린다. 그리고 오늘 본문 22장에 중대한 고비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한다.

이렇게 12장부터 22장까지 조마조마한 위기의 순간을 여러 번 넘기면서 전 과정을 살펴볼 때 이삭을 얼마나 힘들게 얻게 된 것을 수 있게 된다. 이제 아브라함은 100이니 몸도 쇠약해졌고 더구나 후사로 삼을 수 있는 이스마엘까지 내쫓았으니 장래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막다른 지경에 이른 것이다. 유일한 희망의 원천인 이삭을 바친다는 것은 그의 머든 것을 잃은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12장부터 여러 곳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도 이제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의 인간적인 고뇌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사라의 안타까움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두 번이나 “Here I am”(1, 11)라는 답변을 했다. 마르틴 루터가 1521년 독일 보름스 의회에서 재판을 받으며, “Here I am”는 그의 답변을 통해 그가 겪었을 당시의 상황을 집작해 볼 수 있다. 보름스 교회당 뜰 안에 있는 루터 동상 앞에는 지금도 루터가 말한 그 말을 새겨놓은 석판이 땅에 깔려 있다.

둘째, 이삭의 부활

  성경에 이삭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 않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야곱의 아버지라는 임무만 다하는 것으로 보도한다. 이삭은 하마터면 제물이 되어 희생될 뻔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했을 때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창세기 야곱의 가솔 70명이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창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 1:7). 그 수가 많아져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하늘의 별과 같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스라엘 역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기구한 운명의 역사임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너무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4천년 역사로 자랑하지만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북쪽에서는 대륙 사람들이 침략해오고, 남쪽에서는 섬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와 시달림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중국대륙의 인력과 일분의 기술력으로 질곡속에서 고통 가운데 힘들어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도 북쪽 메소포타미아의 강대 세력과 남쪽 애굽의 세력이 서로 번갈아 가며 대륙 사이의 통로인 팔레스타인을 넘나들면서 약소국 이스라엘을 짓밟아 왔던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자그마한 두 나라가 어떻게 그 명맥을 유지하여 지탱해왔는지 기적에 가까운 구원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삭 이야기가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무척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독립국가를 이루고 난 다음에도 끊임없는 외세에 시달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난 그들의 모진 목숨은 이삭처럼 죽을 뻔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이삭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이었다. 그는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다. 그가 다시 살게 된 것은 덤으로 사는 인생과 간다. 이스라엘은 이삭 이야기에서 자신들의 자화상을 읽고 있다. 이삭의 부활은 곧 이스라엘의 부활인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의 부활

창 21장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다. 그래서 사라는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낸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은 적자와 서자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토해서, 그리고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정통성이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중동의 이스라엘 주변 아랍국가 사이의 갈등으로 계속되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주께 묻기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할 때가 언제 입니까?” 묻고 있다. 여기 나라의 회복이란 다윗 왕국의 회복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그리고 유다는 기원전 587년 고대 근동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이스라엘 민족만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신약시대까지도 국가적인 회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2천년의 공백기를 거쳐 1948년 이스라엘 나라는 드디어 회복되어 국가체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부활을 거론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세계 만민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의 역사가 끝나면서 국경선 넘어 이방 땅과 이방 민족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신약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곧 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예전의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여러 가지 죽음의 고비를 많이 겪게 된다. 바울의 말한 대로 세상 권세 주관자들이 주의 백성을 위협하며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는 사자가 삼키듯이 다니는 세상을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은 그를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새생명의 선물이다.

부활절 아침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삶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복음으로 다시 살아난 덤의 인생이기도 하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쁨과 소망을 우리 주님이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영생이 부활의 기쁨 속에서 비롯된다.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온 누리에 전하여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결코 이 세상에서 멸절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해 주신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실현된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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