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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2

추일엽 (경기노회,수원주님의교회,목사) 2014-04-19 (토) 15:53 5년전 1245  
부활절 설교
모세의 노래 &미리암의 노래
출 15:13~21 주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 민족이 두려워서 떱니다. 블레셋 주민이 겁에 질려 있습니다. 에돔의 지도자들이 놀라고, 모압의 권력자들도 무서워서 떨며, 가나안의 모든 주민도 낙담합니다. 그들이 모두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 주의 권능의 팔 때문에, 주의 백성이 다 지나갈 때까지, 주께서 속량하신 이 백성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돌처럼 잠잠하였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데려다가 주의 소유인 주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주님, 이 곳이 바로 주께서 계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세우신 성소입니다. 주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미리암의 노래
바로의 군마가 그의 병거와 기병과 함께 갈라진 바다로 들어갔을 때에, 주께서 바닷물을 돌이키셔서 그들을 덮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넜다. 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를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지난 수요일 온 국민의 마음을 충격속에 빠지게 한 엄청난 재난이 발생하여 숱한 생명이 죽어 참혹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는 없을까 다시 한 번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죽음의 재앙을 생명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밝혀줍니다. 처음 뉴스에 사망자가 없고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온 국민이 크게 기뻐하여 다행스런 일이라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0여년 긴 세월 동안 애굽의 바로왕 통치하에서 종살이 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화요일 짙은 안개로 두 시간이나 늦은 밤 9시경 인천항을 떠나 수요일 정오에 목적지인 제주항에 도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날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른 아침 침몰해가는 배에서 극적으로 빠져나온 구조자 174명은 정말 죽음의 사선을 넘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머지 300여 명은 사망에 이르거나 실종되어 지금도 학부모와 가족들, 그리고 온 국민의 마음은 무너질 듯 암담하여 괴로움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다.
출애급 사건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오랫동안 종살이하다가 탈출한 사건입니다.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사건에서도 배가 바다 한 가운데서 넘어져 침몰해가는 중에도 탈출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생사의 갈림길에서의 순간을 떠올리면 살아 있는 우리도 그토록 절박한 상황을 떠올리며 아찔하다고 느껴집니다.
역사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적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기원전 1,250년경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심으로 애굽을 빠져나온 것입니다. 기원전 13세기 팔레스타인 일대는 해양민족의 출동으로 애굽의 강대 세력이 약화되는 힘의 공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때에 주변의 여러 작은 민족들의 이동이 많았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팔레스타인 진입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사적으로 볼 때 모세가 맨주먹으로 총칼을 든 바로 왕 앞에 나아가 ‘내 백성을 보내라’(출 5:1)며 요구한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위한 무저항운동을 벌인 것은 그 이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화 운동의 모델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엽에 조선의 교회에 대해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하면 독립운동을 조장했다고 해서 일본형사가 체포하기도 했습니다. 인도 간디의 무저항운동이나 미국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킹 목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의 시민운동, 그리고 근래에 남미의 인권운동이나 우리나라 민중운동도 같은 계보에 속한다고 봅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출애굽 사건은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또한 여호와의 선민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 공동체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사건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 이유를 규명해 주는 것도 바로 출애굽 사건을 통한 구원체험입니다. 그러기에 출애굽 사건 이야기는 구약 전편에 흐르는 중요한 모티브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구약 전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목과도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을 벗어나던 날, 온 백성들과 함께 감격에 넘치는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승객 전원이 구조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온 국민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2절 “그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를 불러서, 주를 찬양하였다. "내가 주를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주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련다.” 이 말씀은 시편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 첫머리에서 모세가 강조하는 것은 “주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점입니다. 우선 “주가 나의 하나님”이라는 부분은 개인의 신앙적인 고백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 중에 부활절을 기하여 세례받는 분이 있습니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언약백성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럽지만 모세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당시에는 굉장히 힘들고도 의미심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다신론적인 문화풍토여서 자연의 모든 세력이 각각의 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애굽에는 만신전까지 있어서 많은 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전만 하더라도 분명히 애굽의 신들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바로 왕과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곧 여호와 때문이라는 확신이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나아가 ‘내 백성을 보내라’고 했을 때 바로는 괘씸하게 여겨 지푸라기도 주지 아니한 채 종전대로 벽돌을 구어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여기에 모세는 자기 백성을 도우려다 오리려 그들의 원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백성을 돕는다는 것이 도리어 더 무거운 짐을 안겨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여러 차례 힘든 고비를 넘기면서 좀처럼 물러서지 않은 것은 이번 여객선 침몰사고에서 보았듯이 물이 배안에 밀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생명엔 아랑곳 하지 아니한 여승무원의 희생어린 구조 모습과 선생님들의 제자사랑, 그리고 물이 밀려오는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그곳에서 물러설 법도 한 어린 학생들이 극적으로 생명을 건져내는 용기어린 모습에서도 엿보게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바로왕의 힘겨루기에서 그의 항복을 받아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시덤불 속에서 ‘나는 여호와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바로 그 하나님만을 믿고 버틴 것입니다.
모세의 확신에 찬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조상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을 가나안까지 인도해 주신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복잡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세의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기해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해방의 노래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찬미하며 그분만이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요 나의 구원이시라고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 여객선 침몰 사고로 안타까운 생명들의 죽음 소식에 절망하고 낙심하여 삶을 포기하고 두려움 가운데 사는 자들이 있겠지만 이 가운에서도 남을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고귀한 삶을 마감한 용기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온 국민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기도 한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는 용사시라
모세의 노래 중 두 번째 부분에서 3~5절에 “ 주는 용사이시니, 그 이름 주님이시다.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홍해에 잠겼다. 깊은 물이 그들을 덮치니, 깊은 바다로 돌처럼 잠겼다”는 말은 여호와가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던져 그들이 돌처럼 가라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고현장에서 죽기 살기로 승객들을 구조해 생명을 건진 아름다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정작 선원법에 명시한 것을 잊은 채, 세월호 침몰에 먼저 탈출한 선장이 피해가족과 국민의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선장은 사고 직후 선체에서 무사히 탈출해 이날 오후 2시 전남 진도군 진도읍 한국병원으로 이송돼 찰과상 치료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바닷물에 젖은 5만 원짜리 두세 장과 1만 원짜리 10여 장을 치료실 온돌침상에 말리고 있었고, 승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선장이 가장 먼저 탈출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분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선원법을 살펴보면 제10조에는 '선장은 여객이 다 내릴 대까지 선박을 떠나서는 아니 된다'라고 나와 있으며 제11조에는 '선장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구조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선장과 직원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희생자구조에 총력을 기울이며 죽음의 희생까지 당한 분들에 관한 뒷 이야기일 것입니다.
바로의 기마병들이 물에 잠겼다는 것은 용사이신 여호와가 그들을 치신 결과이며, 철병거를 끄는 말들이 진흙탕 속에 빠져 발을 떼지 못하고 또한 병거바퀴에 진흙이 엉겨 붙어 옴짝달싹 못하는 과정에서 물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모두 쓸려나간 것을 지칭한다고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 자기 백성을 무사히 건너게 하신 것은 바다 신을 제패하여 용사이신 하나님이 전사로서 신들의 싸움에서 적들을 모조리 물리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우는 용사가 되어 출애굽 사건 이후에도 광야를 유랑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치셨고, 사사시대에도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셨습니다.
셋째, 여호와의 오른손
  모세의 노래 세 번째 부분은 여호와가 그의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약속의 당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6절 “주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쳐부수셨습니다” 12절 “주께서 오른팔을 내어미시니, 땅이 대적을 삼켜 버렸습니다” 16~17절 “그들이 모두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 주의 권능의 팔 때문에, 주의 백성이 다 지나갈 때까지, 주께서 속량하신 이 백성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돌처럼 잠잠하였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데려다가 주의 소유인 주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주님, 이곳이 바로 주께서 계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세우신 성소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마치 장군이 오른손으로 힘을 내어 자기 백성을 지휘하며 이끄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오른손의 인도하심으로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되고,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해방의 기쁨을 시로 읊으며,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후세들도 그때의 감격을 맛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재현하여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부활절도 부활의 기쁨을 한껏 누린 초대교회의 신도들이 뜨거운 가슴에 감격어린 부활소식을 증거함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본질을 계승하도록 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26절에 부활에 대한 생생한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출애굽기 15장 하나님의 바다기적
이 찬송시는 모세와 이스라엘이 읊었다. 예배의 회중을 향한 찬양의 요구가 개인적인 감사의 노래에서 나온 하나님 찬양의 개인적인 의도의 표현으로 바뀌었다.
2절a(“주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가 나의 하나님이시니”)에서도 감사의 노래형식(시편 118:4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여라”, 이사야 12:2b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나는 주를 의지한다. 나에게 두려움이 없다. 주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이시다”)이 계속 이어지며, 이것은 2절 하반절(“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련다”)에 의하여 더 확대된다. 여기서 감사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도움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3절 객관적인 찬양의 진술로 넘어가며 맨 먼저 야훼 자신이 “용사”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이러한 사실의 확인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 진술의 의도는 야훼를 “전쟁의 신”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야훼가 이스라엘에 의하여, 그의 백성을 위하여 손수 전쟁을 수행하며 행동하는 분으로(14:14 “주께서 너희를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진정하여라”, 14:25하반절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지 말고 되돌아가자. 그들의 주가 그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사람과 싸운다!' 하고 외쳤다.” 애굽인들의 인식). 야훼의 전쟁을 수행하는 분으로(민 21:14 “그래서 '주의 전쟁기'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수바 지역의 와헙 마을과 아르논 골짜기와 ”, 삼상 18:17 “사울은 (자기의 손으로 다윗을 직접 죽이지 않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마음먹고,) 다윗에게 말하였다. "내가 데리고 있는 나의 맏딸 메랍을 너의 아내로 줄 터이니, 너는 먼저 주께서 앞장 서서 싸우시는 '주의 싸움'을 싸워서, 네가 정말 용사인 것을 나에게 보여라”, 25:28 “이 종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군께서는 언제나 주의 전쟁만을 하셨으니, 주께서 틀림없이 장군님의 집안을 영구히 세워 주시고, 장군께서 사시는 동안, 평생토록 아무런 재난도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경험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4, 5절에 애굽의 전차부대가 바다에 가라앉았다. 야훼의 압도적으로 강대한 힘, 그의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공포스러운 힘에 대한 일반적인 찬양이 비롯되고, 이것은 야훼를 찬양의 대상으로 부르면서 17절까지 계속된다. 야훼의 오른손, 적들에 대한 야훼의 불타는 분노는 또한 바다에서의 기적적인 행위의 동기로 언급되고 있다.
8절 (“주의 콧김으로 물이 쌓이고, 파도는 언덕처럼 일어서며, 깊은 물은 바다 한가운데서 엉깁니다.”)콧김=숨을 몰아쉴 정도의 분노, 바닷물이 “쌓이다”, “일어서자”, “응결하다”14장 15절 이하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부르짖느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집트 사람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겠다.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병거와 기병들을 전멸시켜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바다기적의 묘사.
9절(“원수는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뒤쫓아 따라잡고, 약탈물을 나누며, 나의 욕망을 채우겠다. 내가 칼을 뽑아 그들을 멸망시키겠다' 합니다.”) 적의 오만한 태도는 순식간에 야훼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10절 “그러나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바다가 그들을 덮었고, 그들은 거센 물속에 납덩이처럼 잠겨 버렸습니다”).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을 일으킨 바람, 강한 돌풍(14:21“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밀었다. 주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니, 바다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다. 바닷물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다. 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었다”).
갈대바다의 노래에는 애굽인들이 바다에 덮였다(5절 “깊은 물이 그들을 덮치니, 깊은 바다로 돌처럼 잠겼다”, 10절 “그러나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바다가 그들을 덮었고, 그들은 거센 물속에 납덩이처럼 잠겨 버렸습니다”). 그 바로 뒤에서 그들이 바다속에 가라앉았다.
바다기적의 주제는 11절(“주님, 신들 가운데서 주와 같은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와 같이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시며, 찬양받을 만한 위엄이 있으시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그런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에서 사실상 끝난다. 이런 비교의 질문은 자주 등장하는 전통적인 찬양형식의 한 요소이며, 찬양받으시는 하나님을 신들의 무리 가운데서 유일무이한 분으로 구별한다.
12절과 13절에서는 바다에서의 구원, 광야에서의 인도하심, 땅의 수여라는 세 가지 주제 를 언급하면서 갈대바다의 노래 두 번째 주요 주제인 농경지로 들어감의 주제로 넘어간다. 12절 “땅에 의하여 삼키웠다”=애굽인들이 바다에서 죽은 다음에 지상에서 사라져 지하의 죽음 세계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한 후에 야훼의 거룩한 거처로 인도되었다(13절 “주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여기서 “야훼의 거룩한 거처(목초지, 체류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 전체를 가리킨다. 삼하 15:25 “그런 뒤에, 왕이 사독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께 은혜를 입으면, 주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예루살렘 성전 30절 “다윗은 올리브 산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스라엘의 땅 전체). 그 땅이 야훼의 소유, 그의 기업(17절 “주께서 그들을 데려다가 주의 소유인 주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주님, 이 곳이 바로 주께서 계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세우신 성소입니다”), 즉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인도되어 들어갈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하나님의 소유로서의 땅/ 이스라엘인들이 야훼의 나그네요 체류자로서 머물러 있는 (레 25:23 “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야훼는 이 땅으로 들어가려는 길 부근에 살고 있는 민족들에게 두려움과 큰 공포를 내려 이스라엘에게 길을 터주었다. 우선 만방에 관하여 14절 성반절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 민족이 두려워서 떱니다. 블레셋 주민이 겁에 질려 있습니다” 맨 먼저 불레셋 땅의 주민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역에 정착하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소식을 가장 먼저 들었던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다음에 15절에 “에돔의 지도자들이 놀라고, 모압의 권력자들도 무서워서 떨며, 가나안의 모든 주민도 낙담합니다.” 이처럼 에돔과 모압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이 동쪽 요단 땅 남부지역(신명기 2:1이하 “우리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방향을 바꾸어서, 홍해로 가는 길을 따라 광야에 들어섰으며, 여러 날 동안 세일 산 부근에서 떠돌았다. '너는 이 백성을 데리고 오랫동안 이 산 부근에서 떠돌았으니,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서 북쪽으로 가거라' ... '너희가 세일에 사는 에서의 자손, 곧 너희 친족의 땅 경계를 지나갈 때에는,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할 터이니, 매우 조심하여라.”)을 통과하여 크게 우회하였음을 나타낸다. 16절은 그들이 모두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 주의 권능의 팔 때문에, 주의 백성이 다 지나갈 때까지, 주께서 속량하신 이 백성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들은 돌처럼 잠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언급된 가나안은 후대의 이스라엘 거주지역 전체를 의미한다(17절 산악지대 “주께서 그들을 데려다가 주의 소유인 주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주님, 이곳이 바로 주께서 계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세우신 성소입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 중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된 부분은 특히 산악지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야훼의 거처에 있게 된 것이다.17절 “ 야훼가 자신의 처소로 삼으려고 예비하신 장소”가 이 지역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소는 야훼의 소유로써 하나님의 거처 지역으로서의 거룩한 땅 전체이며, 18절(“주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위에서 나타난 “야훼의 영원한 왕적 통치”를 객관적인 찬송시적인 양식으로 다시 한 번 진술한다.
이 노래에서는 장래 사건들을 미리 다루는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기적을 홍해에서 경험한 구원의 기적(구속, 13절)에 바로 연결시켜서 이스라엘이 지난날 물벽 사이를 걸어갔듯이 이제 돌같이 침묵하는 이방 민족들 사이를 지나서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산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인 땅에 대한 자신들의 온갖 관심보다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이 노래는 ‘여호와는 영원무궁히 임금이시다’. 그것도 여호와 홀로 11절 ‘신중의 왕이시다’라는 고백에서 절정에 이른다.
손에 소고를 든채 춤추며 노래하는 것은 삼상 18:6, 7(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고 군인들과 함께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소구와 꽹과리를 이 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에 나오는 관습, 곧 싸움터에서 돌아오는 용사들을 여인들이 박자에 맞추어 거듭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하는 관습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찬송의 대상은 전쟁에서 이긴 어떤 사람이 아니라 병거부대보다 강하신 야훼이신데, 초기 이스라엘에는 병거에 맞설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수 17:16 “요셉 자손이 말하였다. "그 산간지방은 우리에게 넉넉하지 못하고, 그 골짜기 땅, 곧 벳스안과 그 변두리 마을과 이스르엘 골짜기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다 철 병거가 있습니다”, 삿 1:19 “주께서 유다 지파 사람들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들은 산간지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낮은 지대에 살고 있는 거민들은, 철 병거로 방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하였다”, 삿 4:3 “야빈은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하게 억압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주께 울부짖었다”)
 
요한복음 20장 1~10절 빈무덤
부활절은 안식일 이후 주간의 첫날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 마리아는 무덤 앞에 놓여 있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보게 된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마리아는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간다. 혼란 속에서 그녀는 어떤 사람들이 무덤에서 그를 가져갔다고 말한다. 아마도 권세 가진 자들이 시신을 치워버렸거나 묘지 도굴꾼들에 의해서 도적맞은 것이리라(마 28~15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제자들이 이 일에 책임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논점들이 관찰되어야 한다.
1) 오직 남자들만이 유대교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었다 여인들의 증언은 믿을 수 없고 부정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절에 관한 모든 복음서 기록은 여인들의 증거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거의 초대교회에 의해서 꾸며진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2) 예수의 부활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빈무덤의 광경에 넘치게 기뻐하는 대신에 그들은 당황하여 어절 줄을 몰랐다. 마리아의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는 진술은 9, 13, 14절 등과 21:4에 유사한 진술들로 반영되고 있다. 예수께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반면에 제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13:1,3,18; 16:19,10; 19:28을 13:7; 14:5; 16~18과 비교하라). 그들에게 빈무덤은 우선 설명되어야 할 수수께끼를 의미한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적용된다(2:19~22; 14:18,19,28; 16:16). 부활절 믿음은 제자들의 바램의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견치 못했던 사건의 산물이다.
베드로는 서둘러 무덤으로 간다. 곧 다른 제자에 의해 합류된다. 이 다른 제자가 무덤에 먼저 도착한다. 그가 베드로를 앞지른 것이 더 젊고 건강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그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덤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구부리면서 세마포가 거기에 놓인 것에 주목한다. 두 제자의 행동 사이에는 의도적인 대조가 있다. 사랑받던 제자가 먼저 도착은 하지만 안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베드로는 뒤늦게 도착하여 그 즉시 무덤으로 들어간다. 베드로의 이같은 행동을 단순히 그의 충동적인 성격의 만영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세마포를 본다. 또한 머리를 감싼 수건이 딴 곳에 개켜져 있는 것을 관찰한다. 나사로가 그의 무덤에서 그이 장례를 위한 붕대를 질질 끌며, 그의 얼굴은 아직 수건으로 감싼 채, 나오던 장면을 상상해보라(11:44).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뒤에 남겨두신다.
이제야 다른 제자도 안으로 들어간다. 비록 베드로가 들어간 첫 번째 사람이지만 오직 이 다른 제자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 “그가 들어가 보고 믿더라”. 다음 절이 ‘그들이 아직 성경말씀을 알지 못하였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한 고대 본문은 ‘그가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그 경우에 마리아는 부활의 진리를 제자들에게 전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을 것이다(17절). 분명하게 제자가 믿었던 것은 단순히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마리아의 보고가 아니다. 그는 이제 주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장에서 처음으로 “보는 것”괴 “믿는 것”이 연결된다(17, 18, 25~29). 다음 절에 나오는 복수 ‘그들’은 두 제자들 모두가 이제 믿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랑받던 제자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십자가 아래 있었으며(19:26, 35), 빈무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과 증거가 요한복음서의 기초를 이룬다. 요한은 이방 기독교와 그 믿음 대변자로 그리고 베드로는 초대 유대교적 기독교의 대변자로,
시각은 믿음을 산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아직 어떻게 성서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적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9절이 전하려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제자들은 믿기 위해서 모아야만 했다. 그때조차도 그들의 부활절 믿음은 완전치 못했다.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후에야 이것은 완전하고 기쁨에 찬 확신이 되었다. 독자들은 무덤을 보거나 예수를 직접 ‘봐야 할’ 필요가 없다. 그는 믿음을 위한 모든 필요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성서들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증인의 증거(19:35; 21:24).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었다는 사실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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