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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씨의 속죄-유언같은 육영수 이미지 조작 폭로

강현 (기타,,신도) 2016-11-15 (화) 13:04 2년전 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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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김종필 씨의 양심선언 비슷한 회고를 듣고 많은 한국인들이 놀란 것 같다. 사촌처제 박근혜를 두고 '옛날 (최태민과 어울려 다닐 때) 부터 미쳤었고 지금도 미쳐서 (청와대에서 나가지 않고) 저러고 앉아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니까 별로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 박근혜의 고집을 비롯한 나쁜 성격이 어머니 육영수 씨에게서 물려받은 성품 중 한 면에 기인한다는 회고와 폭로에는 놀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육영수 씨에 대한 이미지가 조작된 것' 이라는 사실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거지만, 그 말이 입이 무겁고 신중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당사자의 조카사위 김종필 씨의 입을 통해, 그것도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며 폭로될 줄은 몰랐다. 조카사위라고는 하지만 육영수 씨와 김종필 씨는 1926 년 생 동갑내기다. 육영수 씨가 1974 년 8 월 15 일 청와대 경호원의 오발로 보이는 탄환에 피격되어 사망했던 당시 김종필 씨는 국무총리였다. 


김종필 씨가 나이 90 이 되어 처음으로 박근혜 씨의 오만한 성정과 비정상적 고집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 육영수 비화를 털어놓기 5 년 전에 싸르니아는 고 육영수 씨의 이미지 조작에 관한 글을 써서 올린 적이 있다. 


2011 년 싸르니아가 고 육영수 여사 이미지에 대한 약간의 견해를 담아서 써 올렸던 글 두 개를 가져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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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기만과 여론조작을 통해 특정인의 인품이나 업적을 과대포장 하는 것은 다반사다. 형편없이 나쁜 인간의 인격을 미화해서 영웅처럼 각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외적으로 조용하고 평범한 사람의 소소한 일상들을 조금씩 아름답게 꾸며서 국민천사로 뒤바꾸어 놓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형편없이 나쁜 인간은 누군가가 아무리 감쪽같이 거짓말로 미화해 놓았더라도 오래 못 가 꼬리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국민천사로 미화되어서 일단 public image 안에 자리잡은 주인공이 <모난 데가 없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과대 포장 이미지가 의외로 오래갈 수 있다. 꼬리 밟힐만한 <당사자의 튀는 언행>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천사 원조 할머니 육영수가 이런 경우다.


육영수는 박정희 씨의 두 번째 부인이다. 박정희는 1979  10  26 일에, 육영수는 그보다 5 년 빠른 1974  8  15 일에 각각 권총으로 피격 사망했다.


대한민국 40 대 이상 기성세대에게 <육영수>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다름아닌 목련이다.


목련은 학명이 magnolia kobus 인 낙엽교목으로 넓고 예쁜 흰 꽃이 인상적인 식물이다.


육영수하면 목련이 떠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sarnia 는 육영수가 한 때 목련팔이소녀였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고, 하다못해 생전에 화선지에 목련꽃 그림을 멋드러지게 그렸다는 일화도 들은 적이 없다.    


<육영수=목련>이라는 이미지 등식을 성립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은 시인 박목월이다. 박목월이 육영수를 목련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박목월이 왜 육영수를 목련이 비유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그냥 무슨 꽃에 비유하면 좋겠는데 <전기> 쓰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게 자기가 예전에 쓴 <4 월의 노래>에 나오는 그 목련이어서 옳거니 하고 가져다 붙인 게 아닐까 싶다.


박목월은 전기 <육영수 여사>에서 육영수를 학()에도 비유했다. 학은 목련에 비해 오히려 비유연상이 쉽다. 육영수는 목이 긴 편이기 때문이다. 근데 박목월이 학에 비유한 또 하나의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박목월은 제주도 칠성통 남궁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시인 양중해의 소개로 바닷가에 초가집을 하나 얻어 <휴양생활>을 즐긴 적이 있는데 이 때 목이 긴 소녀 <열아>를 만나서 운명적인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열아는 소녀의 본명은 아니었고 박목월이 소녀에게 멋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었다. 가끔 찾아오는 양중해에게는 그 소녀를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나이 마흔이 넘은 사람이 동거중인 십 대 후반의 소녀를 <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을 만큼 박목월은 넉살 좋은 로맨티스트였다. 


근데 그 로멘틱한 제주도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녀의 아버지가 소녀를 데리러 제주도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같은 날 박목월의 부인 유익순도 어느 날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진 남편 박목월을 잡으러 제주도 초가집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런 과거의 사연들이 박목월에게 아이디어를 떠 오르게 하여 그로 하여금 육영수를 목련과 학에 비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목월이라는 시인은 1940 년대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식민지 농촌을 술 익는 마을로 묘사할 만큼 평소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었으니만큼 관찰력이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한 번 각인된 어떤 사람의 이미지란 바뀌기가 어려운 것이고 가뜩이나 바뀌기가 쉽지 않은 이미지에 충격을 가할 만한 육영수 본인의 튀는 언행도 별로 없었으니 죽은 지 37 년이 지난 지금도 육영수는 여전히 목련이요 학인 것이다.


sarnia 가 보기에 육영수는 다소 사려 깊고 나서는 것 좋아하지 않는 전형적인 시골 부잣집 둘째 딸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제 김종필 씨의 회고에 따르면 싸르니아의 이 추론은 잘못됐다. 육영수는 부잣집 딸이었던 것은 맞는데, 아주 욕심이 많은데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는 인간형이었다는 게 김종필 씨의 충격적인 폭로다)


육영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증오했던 것 같다. 첩을 다섯 명이나 두고 어머니를 맘 아프게 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 딸들의 공통점>이겠지만 정작 문제는 영수가 서울 배화여고에 입학하면서부터 터졌다.     


며칠 전 올린 글 <시끌벅적>에서도 언급했지만 육종관의 첩 5 인방 중에는 자매지간인 두 여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육영수는 자매가 한 남자의 소실로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 장본인이 자기 아버지라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자매 소실 중 언니를 큰 개성댁이라고 불렀고 동생을 작은 개성댁이라고 불렀는데 육종관은 서울 사직동에 집을 한 채 장만한 뒤 언니인 큰 개성댁을 그리로 보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자녀들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육영수 역시 배화여고 학창시절을 그 집에서 큰 개성댁을 <작은 어머니>로 모시며 살아야 했다. 육영수의 입장에서는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참담한 세월이었을 것이다.


sarnia 는 문득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는, 사려 깊은 <양가집 규수> 육영수가 당시의 관념으로는 명백한 불륜임에도 불구하고 유부남 박정희와의 결혼을 왜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고집했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1935 년 박정희와 결혼한 직후부터 끈질기게 이혼을 강요당해왔음에도 무려 15 년 동안이나 꿋꿋하게 버티던 김호남이 1950  11 월에 와서 육영수와의 결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이혼에 합의해 준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나는 그 이유를 각각 이렇게 판단한다.


첫째 이유 <육영수의 불륜>에 대한 개인적 판단이다.


육영수는 잘못된 여자관계를 통해 어머니와 가족들을 괴롭혀 온 아버지 육종관에 대해 <또 다른 잘못된 관계>를 무기로 복수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설명대신 여담 한 마디 하자.  


1969 년에 <개구리남편> 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 또래들이 <황금박쥐> <요괴인간>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조숙한 sarnia 는 태현실 장욱제 박주아가 주연으로 나오는 <여로>와 반공수사드라마 <지투작전>을 주로 보았는데 <개구리 남편>을 그때 본 적이 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암튼 이 드라마는 유부남 과장 최불암과 신입여사원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그렇고 그런 드라마였는데청와대에서 이 드라마를 본 육영수가 불같이 격노하는 바람에 조기 종영된 적이 있다.  


이 예화는 두 가지를 시사해 주는데 하나는 육영수가 아버지의 축첩에 대한 심리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1950 년 여름 유부남 박정희를 따라다녔던 것이 진심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 <김호남의 이혼 둥의>에 대한 개인적 판단이다.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이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최소한 딸이 유부남과 결혼하는 파국적인 사태를 막기 위해 사람을 보내 김호남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10 여 년에 걸친 박정희의 폭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혼을 거부하던 김호남이 육영수가 나타난 지 몇 달 만에 흔쾌히 이혼에 동의해 줄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싸르니아의 이 판단도 수정한다. 김종필 씨의 육영수 인물평에 따르면 김호남을 박정희와 이혼하도록 강요하는데 주도적으로 나선 장본인이 어머니 이경령이 아니라 육영수 본인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부인 김호남 씨의 딸 박재옥 부부를 육영수 씨가 죽을 때 까지 해외로 나가있도록 조치한 것 역시 그 이유가 짐작이 간다. 1970 년 3 월 발생했던 정금지 -일명 정인숙- 살해사건도 언젠가는 합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 재조사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재수사라고 하지 않고 재조사라고 한 이유는 일단 이 사건에 대한 재판부 판결이 끝났고 공소시효 또한 만료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수 십 년이 지난 남의 집 가정사를 새삼스럽게 늘어놓는 이유는 딴 게 아니다.


학같이 고고한 사람들의 목련같이 희고 깨끗한 이야기란 처음부터 없었고, 그냥 특별한 지위에 오른 보통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존재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2011.06.26 18:00 (MST) sarnia 


1953  10 월 어느 날, 서울 고사북동 (지금의 성북구 보문동) 언덕배기에 웬 젊은 부부가 코흘리개 계집아이를 하나 데리고 나타났다. 이사를 온 것이다. 키가 작고 가무잡잡한 남자는 이사 온 날 이후에는 어찌된 일인지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남자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고 키도 커 보이는 부인이 아침이면 수돗물을 길러 다녔다. 사는 꼴이 말이 아닌데도 항상 표정이 밝았고 웃는 얼굴로 동네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오전 10 시쯤 되면 딸인 듯 한 조그만 계집아이가 아랫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집 밖 언덕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언제나 같은 노래의 한 구절만을 반복해서 부르곤 했다.


“~ 삼천리 강산에 새 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은 갈고 씨를 뿌린다~ “


아직 소녀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그 아이 집에 찾아 오는 친척은 대개 외가 식구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막내 이모와 외할머니가 함께 살다시피 했다.


헌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는 외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할아버지가 죽었거나 멀리 외국에 나가 사는 것도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외할머니가 왔다 갔다 하는 걸로 봐서는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게 분명한데도 집으로 찾아 오지도 않았고 인사 드리러 가잔 말도 없었다. 그 아이는 그게 이상했다. 나중에 철이 들 무렵에는 외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몹시 궁금해 지기도 했지만 사려 깊은 아이였던 만큼 그 이유를 어른들에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충청북도 옥천의 거부였다. 이름은 육종관이다. 본처인 이경령 외에도 다섯 명 가량의 걸프랜드가 따로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걸프랜드를 가리켜 첩()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여섯 명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가 한 명을 내치는 바람에 다섯 명이 된 것이다. 그 중 한 명은 일본 여인이었고, 다른 두 명은 놀랍게도 자매지간이었다. 그 자매는 개성 출신이었는지 둘 다 <개성집>으로 통했다.  


육종관은 본처인 이경령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아들 이름은 육인수, 큰 딸이 육인순, 둘째 딸이 육영수, 막내 딸이 육예수였다. 본처인 이경령 외에 다른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낳은 열 여덟 명의 자녀를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육종관의 자녀들은 1 개 소대 병력에 좀 못 미치는 총 22 명인 셈이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됐던 그 해 (1953. 7.27) 가을에 고사북동 언덕배기 적산가옥으로 이사 온 코흘리개 계집아이는 육종관의 둘째 딸 육영수의 소생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외가 식구들 중 알거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모 두 명과 외삼촌, 외할머니 이경령 뿐이었고, 각각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난 열 여덟 명의 이모와 외삼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은 적조차 없었다.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 육종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가 않은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자료 두 개를 꼽으라면, 박목월이 쓴 <육영수 여사>와 대구매일신문이 연재한 적이 있는 <청년 박정희>를 들 수 있다. 


친일시인과 친박언론이 쓴 이 전기들은 의외로 육종관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마지못해> 진술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육종관은 일제시대에 대지주로서 소작과 정미소와 양잠업 등을 대규모로 운영하고 있었다. 1920 년 대 그는 옥천군내에서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소작료를 한 푼도 깎아주지 않는 악덕 지주로 유명했다.’


육종관이 악덕 친일지주였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므로 어용<전기>들 조차 그 사실을 은폐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 어용전기들은 이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즉 육종관은 악덕지주였지만 그의 부인 이경령이 평소에 동네 사람들에게 후덕하게 대했기 때문에 해방 후 봉변을 모면했다는 것이다. 이경령의 <후덕함>덕분에 육종관이 분노한 소작인들로부터 봉변을 모면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해방 후 보복을 피해 잠수를 타며 도망 다녀야 했다는 사실이다.   


육종관의 의 맏딸 육인순은 홍순일과 결혼했다. 육종관의 사위이자 <고사북동 계집아이>의 생모 육영수의 형부인 홍순일은 일본 괴뢰정부인 위만주국의 고등문관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 됐다. 북한 점령 당시 북한 당국에 의해 친일 혐의로 체포돼 연행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훗날 홍순일의 처제 육영수의 남편이 된 박정희는 같은 위만주국 주둔 관동군 장교를 지냈지만 홍순일을 동서로서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육종관에게는 형제들이 있었는데, 큰 형인 육종윤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해 아예 이름을 나리타 코쿠준으로 바꾸어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았고, 둘째 형 육종면은 일본에서 로스쿨을 나와 일제시대에 판사로 재직했다. 어떻게 보면 그 아이의 외가 쪽은 온통 일본 제국주의 덕에 승승장구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왜 외할아버지 육종관을 만날 수가 없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 아이의 부모, 즉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에 얽힌 평범하지 않은 내막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나서 약 1 주일 후인 1950  9  21 일 저녁. 부산 영도의 어느 제과점 구석 자리에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20 대 중반으로 보이는 단아한 용모의 아가씨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결심한 듯 눈을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하염없는 눈길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결혼 제의를 수락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여자가 남자의 결혼제의를 수락 한 것이라기 보다는 남자가 내일 (9  22 ) 당장 대구로 떠나야 했으므로 떠나기 전날인 이 날 저녁 제과점에서 만나 결혼을 다시 합의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 해 8 월 부산 영도에 있는 여자의 피난 셋집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첫 눈에 서로 눈이 맞아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다. 남자 보다는 여자가 더 적극적이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남진에 밀려 패색이 짙어가던 1950  8 월 어느 날, 자기 부관인 소위 송재천의 소개로 부산 피난 셋집으로 인사를 간 박정희 소령은 그곳에서 여자의 아버지인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을 만났다. 박정희를 소개한 송재천은 이경령의 조카이자 육영수의 이종오빠였다. 그 날 이 집에는 육종관 이경령 부부와 송재천 육영수, 그리고 육영수의 동생이자 육종관의 막내 딸인 육예수가 있었다. 육영수는 그 날 밤 남자가 어떠냐는 동생 육예수의 물음에 이런 대답을 했다.


눈빛이 번쩍번쩍한 게 굉장히 무서웠어…… 그런데 구두 끈을 매는 뒷모습이 믿음직해 보이더라         


그런데 얼마 후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가타부타 말이 없던 아버지 육종관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기를 쓰고 딸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어용<전기>들의 공통된 진술은 육종관이 딸의 결혼을 반대한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전쟁 중에 딸을 군인에게 시집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서였고, 둘째는 여태까지 고분고분하던 딸 영수가 갑자기 남자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껴서였을 거리는 것이다.('여태까지 고분고분'이라는 어용전기들의 기록도 김종필 씨 증언으로 거짓말임이 들통났다. 육영수는 부모 말이라고는 도통 듣지 않는 고집불통 딸 이었는데 박근혜가 이런 고집을 물려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sarnia 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첫째, 전쟁 중이어서 딸을 군인에게 시집 보낼 요량이 아니었으면 이종조카인 송재천의 중매제안이 있을 때부터 거절했을 것이다. 둘째, 아무리 딸에게 배신감을 느꼈더라도 고작 그런 이유로 세월이 흘러 사위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까지,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딸 부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여기에 대한 sarnia 의 분석 결과는 이렇다.


그는 1950 년 여름 박정희를 만난 이후 그에 대한 뒷조사를 따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럴만한 재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카 송재천과 부인 이경령도 박정희가 처자식이 있는 기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육종관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육종관이 딸의 결혼을 반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가 기혼자라는 사실 때문이었으며 자기 딸과 혼담이 오간 그 시점에는 박정희가 본처인 김호남과 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엄연한 기혼자였음에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 딸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격노하게 만들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박정희가 김호남과 이혼을 한 것은 1950  11 월인데, 대구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린 날짜는 1950  12  12 일이다. 육영수와의 결혼을 위해 김호남과의 이혼을 급하고 강제적으로 밀어부친 게 분명해 보인다. 이상한 것은 박정희가 1948 년경 당시 이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 학년 재학생이었던 이현란과 결혼하려고 했을 무렵에도 본처와의 이혼을 시도했었는데, 부인 김호남의 강한 반대로 성사시킬 수 없었던 이혼을 이때는 어떻게 성사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박정희가 육영수의 가족과 첫 대면을 한 것은 부산 피난 시절인 1950  8 월이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이 사귀면서 혼담이 오갔으니 아버지 육종관의 입장에서는, 딸이 처자식이 엄연히 있는 유부남과 불륜 행각을 벌이는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때문에 딸의 결혼을 극력 반대했을 거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시끌벅적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태어난 고사북동 그 때 그 아이가 내년이면 만 60 세가 되고, 아울러 대한민국의 제 18 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물론 박근혜 씨의 가족사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가 책임 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씨 가족사가 그에 대한 나의 지지-반대 여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전혀 되지 않는다. 다만 이제부터 그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자료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참고사항 정도랄까?    


사실 sarnia 는 박근혜 씨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가, 그가 그래도 대한민국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라는 사실에 자극 받아 그의 1974  8  15 일부터 1979  10  26 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열람부터 틈틈이 해 보려고 작정했었다. 근데 이 공부는 아무래도 캐나다에서 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올 가을 한국에 나가서야 비로소 풍부한 자료와 취재원(?)을 만날 수 있게 될 것 같다.


박근혜 씨는 자기 어머니 육영수가 죽은 직후부터, 다시 아버지가 죽고 유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퍼스트레이디였던 자기 어머니 육영수가 했던 역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극적인 정치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나는 (비록 대한민국의 현역 유권자는 아니지만) 한민족 공동체 구성원이자 예비역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유신시대 행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재검토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가 유신시대에 수행한 성인으로서의 <자발적> 행동에 대해 지금은 어떤 평가를 스스로 하고 있는지 듣고 싶기도 하다.          


 

2011. 6.24 (MST) sa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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