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역사 60주년 선언서
우리 교단이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이름으로 새 역사의 길에 나선 지 어언 60년이 되었다. 그 새 역사의 길은 교권적, 사대적, 개인지향적 기독교로부터의 엑소더스의 길이었다.
우리 기장은 교리와 교권의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논의에 열려 있는 자유로운 신학을 추구했다. 또한 신학의 사대성에서 탈피하여 서구 신학에만 의존하지 않는 학문적 자주성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한국 신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서구 신학에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우리 기장은 신앙이 교회 내에 국한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신앙지평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인권 신장과 민주화와 분단 극복에 헌신하였으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 왔다. 이 여정에서 자매 교회들의 비방과 불의한 권력의 탄압으로 교회의 성장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장의 역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한 신앙의 역사라고 자부하며, 이 길로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6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당시와는 다른 사회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정보화의 가속화, 시민사회의 약화, 소비사회의 심화, 소득과 부의 양극화, 남북관계의 악화, 사회적 차별의 심화, 다문화사회로의 전환,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등이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기독교는 이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회의 발전에 역행하는 종교집단으로 지탄받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성적 사고와 사회적 실천을 겸비한 온전한 신앙을 요구하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는 이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중적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사회적 공신력을 잃었으며, 신도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 기장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교단의 ‘처음정신’ 곧 ‘기장성’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처음정신을 되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이자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이다. 그리고 새 역사 6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단이 해야 할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위기 앞에서 ‘기장성’을 점검하고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추구해 온 기장성은 한 교단만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따라서 우리 기장의 존재의미는 이 정체성을 확산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다.
제38회 호헌총회 선언서는 우리 기장의 정체성을, 복음과 신학의 자유를 확보하고, 자주의 정신을 함양하며, 세계교회와 교류하고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우리의 기장성에는 신앙과 지성의 대립이 있을 수 없다. 한국 기독교는 신앙을 빙자한 반지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맞닥뜨린 위기의 결정적 원인이다. 몰지성적인 신앙과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언어는 세상의 언어와 단절되고 말았다. 기독교는 세상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세상은 기독교의 언어를 외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뜨거운 신앙의 기초 위에서 지성을 가지고 세상과 자유롭게 소통하고자 한다.
우리의 기장성에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분리도 있을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는 지금도 구원의 본질은 오직 개인의 영혼구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은 개인 영혼에 국한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개인과 사회만 아니라 온 우주를 포함하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와 지구의 모든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우리의 기장성은 포괄적이고 온전한 평화, 곧 샬롬을 추구한다. 이 평화는 힘의 평화가 아닌 사랑과 정의의 평화이다. ‘다름’을 포괄하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로 받아들임으로써 차별을 극복하는 평화이며,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 아래 하나 되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강대국의 한반도 지배전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자주하게 하는 평화이며, 남과 북의 대결과 대립이 아닌 민족의 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이다. 또한 이 평화는 모든 생명체가 생태계의 위기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에게 부여된 생명을 온전하게 누리는 평화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 영역에 이 평화를 구현해내고자 한다.
우리의 기장성은 물량주의를 배격한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성장이 드리운 그늘을 직시하면서, 성장을 위한 성장과 규모에 집착하는 성장을 경계한다. 한국 기독교는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성장이 교회 존립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인간들의 대형 조직이 되었다. 성도 간의 인격적 교제와 신앙적 교제가 불가능한 조직이 되었다. 대형교회 출현의 반대편에는 미자립 교회의 증가가 있다. 교회들 사이의 양극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한 지체는 비대해지고, 다른 지체는 말라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성장이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 어떤 성장인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 기장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교단의 보존과 확대를 위한 성장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양성을 위한 성장, 곧 성숙이다. 이는 독차지하거나 모으지 않고 나누고 흩어지는 성장이며, 다른 지체와 함께하는 공존의 성장이다. 큰 교회와 더불어 건강한 ‘작은 교회’가 확산되는 성장이다. 이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고양하는 성장,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장을 지향하고자 한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쇠락하는 지금의 위기 앞에서 기장성이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것으로 믿는다. 지금 한국 사회는 신앙과 지성을 겸비하여 사회와 소통하는 교회, 뜨거운 믿음이 헌신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는 교회, 민족의 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교회, 자기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 시민과 함께 고민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교회,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지원하는 교회, 다른 지체와 함께하는 공존의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장성을 되새기면서 지난날 우리의 인권운동, 민중운동, 여성운동, 통일운동, 환경운동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갈 것이다. 또한 근자에 등장한 시민운동의 영역으로도 신앙의 지평을 확대하면서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 관심을 사회정치 부문을 넘어 문화 부문으로까지 확장할 것이다. 이런 노력은 시대적 요청에 대한 부응이자 기장성의 발전적 계승이다.
우리는 과거 60년을 성찰하면서 교단의 정신과 역사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며 발전시키려고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의 모든 부문에서 다시금 철저하게 실천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 기장의 모든 구성원들은 굳건한 믿음 위에서 마음과 뜻을 다해 기장성을 구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할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것임을 선언한다.
2013년 6월 10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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