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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주관 부활절 새벽예배 설교문

관리자 (기타,총회본부,목사) 2021-04-06 (화) 10:41 2년전 1455  
NCCK 주관 부활절 새벽예배 설교문

지난 4월 4일 새벽 5시 30분부터
NCCK 주관 부활절 새벽예배가 
서울 중랑구 신내동 신내감리교회에서 있었습니다. 

NCCK 교회일치위원장 육순종 목사가 하신 새벽예배 설교 전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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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부활절 새벽예배

 

그리스도의 부활, 새로운 희망!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신명기 30:1-4, 로마서 8:22-25, 마가복음 16:9-16)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와 한국교회, 그리고 이 땅 위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따뜻한 봄 기운이 온 땅에 가득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코로나라고 하는 차가운 어둠에 묶여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 만물의 영장임을 과시하던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졌습니다.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우리 시대 교회는 빛이 없는 등불처럼, 맛을 잃은 소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금 그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는 우리의 탐욕과 욕망의 걸음을 멈추라는 것, 뿌리로부터 자신을 성찰하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접하며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처한 모든 상황이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고 키운 것임을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살아야 할 우리가 맘몬에 뿌리를 내리고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이웃을 내 몸처럼 대하지 않았고, 자연과도 더불어 함께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이 욕망 가득한 이기적인 삶을 돌이켜 주님 앞에서 섭니다. 그리고 돌이켜 선 그 자리에서 우리의 다짐을 담아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에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현실이 힘들뿐더러 미래가 매우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2천 년 전에도 부활의 소식은 믿기 힘든 소식이었습니다. 당대의 최강대국 로마의 식민 통치 아래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소식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았을까요?

오늘 마가복음을 보면 부활의 아침에 예수께서 맨 처음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일찍이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셨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우선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여성 마리아의 증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려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고, 그것도 여성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해고 노동자들, 이주민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소리도 이제 그만하라며 외면합니다. 인명 살상이 진행되는 미얀마의 아우성을 지구촌 강대국들은 깊이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나아졌다고는 하나 한국교회 교단정치만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여성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편견, 자기중심주의가 부활의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2천년 전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이 제자들에 귀에 들리지 않았던 이유, 그녀가 전한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았던 이유, 아니 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소식이 믿을만한 소식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 안의 오래된 편견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기에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1612-13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두 사람도 돌아와서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으나 그들은 그 말도 믿지 않았다.”(16:12-13) 부활하신 예수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활은 잠깐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소생이나 과거로의 회생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의 근원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우리 뇌의 스키마 작용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쉽게 다른 모습,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일종의 관성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려면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고정관념, 낡은 패러다임으로는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다가오신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지 않으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메마른 씨앗에서 사과나무를 보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말라붙은 가지 끝에서 꽃의 향기와 벌의 날개짓을 보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깊고 진한 어둠 속에서 동터오는 태양을 보는 것이고 대낮에 하늘을 우러러 은하수를 보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이미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이웃을 보는 것,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옛 사람과 결별하고, 옛 패러다임과 결별하고, 낡은 질서와 결별할 때 나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때 다른 모습’. ‘새로운 존재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그래서 열 한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음식을 나누고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고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의 편견과 고정관념, 낡은 틀이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탄식이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 변화하지 못한 세계는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볼 수 없으므로, 옛사람, 낡은 질서 안 갇혀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탄식은 한 사람의 탄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탄식은 인간의 탄식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서는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다고 증언합니다. 아담은 이는 내 뼈 중 뼈요, 살 중 살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너와 내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너는 곧 나라는 고백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또 성서는 인간은 흙에서 왔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왔다는 증언입니다. 인간과 생태계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오늘의 팬데믹 상황은 피조세계가 얼마나 상호의존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이 상호의존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마저 고통스러워졌는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로마서에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한 구성원이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고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이 말하는 진통은 해산의 진통을 뜻합니다. 모든 것이 파멸하는 절망의 진통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낳는 희망의 진통입니다. 몸의 속량을 기대하는 진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 팬데믹의 고통이 희망의 진통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멈추어 서서, 우리 안의 욕망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 신명기 말씀은 새로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 둔 모세의 고별설교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재난과 재앙이 닥쳐올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혹 탐욕과 불순종으로 그런 재난 상황 속에 빠져들 때 그들이 선택해야 할 길을 명료하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던 삶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것 같은 고통에 던져질지라도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도 마음을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개역개정으로 다시 한번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30:1-4)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회개의 요구도 강렬하고, 하나님의 회복의 의지도 강렬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전환하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회개, 돌이킴은 우리의 몫이고, 회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돌이킴, 회개와 결단이 선행해야 함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부활절을 맞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른 모습, 새로운 존재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를 만나 일곱 귀신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았으나, 옛사람 그대로, 낡은 질서에 묶여 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의 비늘이 벗겨지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무슨 결단입니까?

사람들은 코로나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 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코로나 19를 오게 한 그 탐욕과 무절제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고, 소외시키던 승자독식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무한정 자연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착취하던 옛 질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자연과 하나였던 상생의 질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로 돌아가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더 이상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결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공존과 상생의 새로운 일상을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돌이키는 결단의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봄입니다. 겨우 내 움츠렸던 나무에서 새순이 돋습니다. 새순은 신비롭게도 가지의 가장 약한 곳을 뚫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신비를 기억하며, 우리 시대 가장 약하고 여린 순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는 부활생명을 주목합니다. 그 희망을 주목합니다. 우리 시대 가장 약한 곳, 가장 낮은 곳, 가장 아파하는 자리에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님께로 돌이켜, 새로운 존재,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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