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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윤응진 (충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8:01 14년전 6179  
2007.1.28.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출애굽기 17:1-7


1. 들어가는 말: 일상적인 삶 자체가 이미 축복이다.
우리는 새해를 맞을 때마다 많은 소원들을 빕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수많은 복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미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어린이와 한 젊은이의 죽음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제가 느낀 아픔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1) 이정표는 13세(초등학교 6학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작가지망생이었는데,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1년 9개월 동안 삶과 죽음의 기록을 일기로 남기고 지난 14일 눈을 감았습니다. 정표와 골수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이 국내에 5명이 있었는데, 모두 정밀검사를 앞두고 기증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의 생의 불꽃은 남보다 몇 곱절 빨리 사그러져 갔습니다. 정표는 학교생활을 그리워했고, 넓은 바다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항암치료로 식욕이 왕성해졌으나, 정표는 병원에서 주는 멸균식만 먹어야 했습니다. 정표는 라면, 자장면, 햄버거, 계란찜.... 그가 먹고 싶은 음식을 숱하게 일기에 적어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의 시간도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2) 지난 21일, 자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탤런트 출신의 댄스 가수 유니의 죽음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유니는 유난히도 안티팬들이 많았던 연예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가수 데뷔 후 아역 탤런트 시절보다 부쩍 성숙해진 얼굴과 몸매 때문에 성형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의 섹시 컨셉 때문인지 인터넷뉴스의 댓글란에는 악플이 다른 가수들보다 서너배 이상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맘씨 착한 처녀였다고 합니다. 그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네티즌들입니다.
유니와 함께 한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였던 SBS 프로덕션의 김형민 PD는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려서 유니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김PD는 ".... 유니는 마음이 예쁜 사람이었다"며 ".... 며느리 삼고 싶은 아가씨였다"고 썼습니다. 김PD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몸을 요염하게 흔드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몸매 참 착하다"고 얘기했었지만 저는 싱긋 웃으며 "마음도 착해"라고 말하고는 했지요. 너무 착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받아온 상처가 깊어서 그랬는지 유니씨는 건조하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히는 마른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녀가 몸을 뜯어고쳤다고 헐뜯고 독설을 퍼붓고 말발길질을 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고인의 뒤안길에다 대고도 "잘 죽었다"고 저주하더군요. 자신의 상처만큼이나 상대의 아픔을 생각할 줄 알았던 한 예쁘고 참한 처녀가 생을 포기하는데 그들의 존재가 밧줄 또는 최소한 디딤돌 역할을 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반성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표도 유니도 어린 나이에 서로 다르게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들의 때 이른 죽음을 우리는 마음 아파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며,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이 있고, 또한 이웃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받은 삶이 위태롭게 될까봐 불안합니다.
「한겨레 신문」 보도(2007.1.3)에 따르면, 현재 우리 국민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걱정거리들은 주택 및 부동산, 고용안정 및 일거리, 노후, 자녀교육, 북핵 및 한반도 평화 문제라고 합니다. 특히 우리 국민의 열에 아홉은 집 문제와 일자리 문제를 매우 심각하거나 심각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성경말씀은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조건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식수가 없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마저 느끼며 절망하여 절규하고 있습니다.

2.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출애굽의 여정: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출애굽기의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17:3) 고 합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도자, 모세를 따라서 이집트 제국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을 감행한다는 것, 즉 소수의 노예들이 강대국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는 것은 그 계획 자체가 무모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제국은 한편으로는 히브리인들의 종족말살을 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제국의 기틀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를 설득하기 위해 10번의 재앙이 필요하였습니다. 10번째 재앙은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집트인들의 맏아들들과 짐승의 맏배들까지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12:29-30).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들은 이 엄청난 재앙을 겪고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를 떠나도록 재촉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밤에 황급히 쫓기듯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서는 불가능해보이던 해방 사건이 기적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마음이 바뀌어 “이집트 병거부대를 모두 이끌고”(14:7)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였습니다. 파라오가 추격하는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울부짖으며 모세를 원망 하였습니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14:11-12)
모세가 대답 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여라....”(14:13)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으나, 뒤 따라오던 이집트 군대는 바닷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사건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기적을 완성하였으나, 파라오와 그의 군대에게는 몰락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그렇게 이중적인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과 같은 광야를 가로질러서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생명의 공동체를 꽃피울 새로운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서는 숱한 어려움들과 고통들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광야로 나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라는 지역에서 물을 찾았으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백성들이 마시게 하셨습니다. (15:22-2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동행 하면서 어려움들을 돌파하도록 돕는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지 두 달째 되어 ‘신’ 광야로 이동한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모세를 원망 하였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16:3) 굶주린 백성의 이런 원망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하면서 해방의 여정을 계속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또 다시 갈증으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더라면 갈증으로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현재의 고난 때문에 가나안 땅을 향한 해방의 행진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곤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들을 구해주셨던 행동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그들은 늘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출애굽의 여정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인 출애굽 사건에 휘말려서 노예 해방을 주도하던 지도자 모세는 지쳤습니다. 계속되는 난관 때문이라기보다는,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백성들의 노예근성과 불신앙 때문에 지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며 부르짖습니다 : “이 백성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지금이라도 곧 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17: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위를 깨뜨려서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다니! 인간의 상식을 깨는 약속이 아닙니까? 그러나 인간의 상식이란 얼마나 연약한 것입니까? 인간의 상식이 내릴 결론은 절망 아니었던가요?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나일 강을 친 그 지팡이로 호렙산 바위를 쳐서 식수가 터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나일강 물을 먹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지팡이(7:20)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반석에서 마실 물이 나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위가 깨지는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던 상식도 깨어집니다. 바위에서 쏟아지는 생수는 기대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증언합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므리바’라고 부른답니다. 모세를 비난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린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민수기 20:1-13에도 나옵니다.

3.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얼마나 다른가?
하나님께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들을 해방시키신 것은 무슨 뜻을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하셨습니다. 사막과 같은 광야를 가로질러서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은 혹독한 자연조건과 싸워서 살아남아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길은 이집트 제국에서 감수해야 했던 고난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난의 행군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값진 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 고난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차라리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려움들을 극복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경험하면서도 난관에 부딪치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출애굽의 여정을 벗어나 과거로 되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겪게 되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불평과 원망만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겪는 고난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혹독하고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은 삶의 의미나 목표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육체적인 존속을 갈망하는 갈급한 마음은 있으나 인간다운 삶을 희구하는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형식은 남아 있으나 삶의 의미 있는 내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삶의 태도들에 대하여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비웃게 되고 비난하며 심지어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인내와 무한한 은총에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과연 그 이스라엘 백성들과 얼마나 다를까요?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우리의 출애굽의 여정에서 늘 성숙하고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어려움들을 돌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광야 같은 세상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우리도 당장 눈앞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습니까?
기적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나 좋은 환경에서는 환한 웃음으로 기쁨을 표현할 수 있고, 마음의 여유마저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믿음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믿음과 신뢰를 지닌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6월 항쟁(1987년)이 발생한지 20주년 되는 해이며, 민주정부가 출범한지 10주년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대통령과 정부를 비난하는 소리들이 높습니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뉴라이트 운동을 벌이며 우리사회의 민주화 여정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가려는 일종의 과거회귀운동입니다.
물론 대통령이 말실수한 것도 있고, 그의 참모들이 정책을 잘못 집행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출애굽 운동이던 6월 민주항쟁을 통해서 얻은 성과마저 짓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행여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모세에게 행하여지던 비난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각박하고 불안하다고 해서 출애굽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현재의 고통과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불안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행진엣 비롯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출애굽이 미완성됨으로 인해 발생한 것입니까? 정부에 대한 비판은 가나안 땅을 향한 행군의 방향이 바로 설정되었는지를 기준으로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얼마나 성숙한 자세로 그 길에 참여하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맺는 말: 나의 삶의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
저는 17개월째 한신대학교 총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17개월 동안 수많은 어려움들이 발생하였습니다. 마치 파도가 치듯이 어려움들이 연이어 밀려왔습니다.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저는 마치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서 있는 것 같은 절망감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시간들은 숨을 쉬기조차 힘겨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로서 그리고 신학도로서 저는 그 어려움들에 직면해서도 그것들을 통해 제시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건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때로 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잠 못 이루며 고뇌와 고독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크나 큰 어려움들이 극복될 때마다 마치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위하여 그 때마다 지팡이를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이처럼 저는 총장으로서 일을 하면서, 제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그리고 그분이 은총의 하나님이심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려움에 봉착하면 저는 잠 못 이루며 고심하곤 합니다. 마치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믿음을 저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저의 부족한 믿음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머리로는 하나님께서 또 홍해바다를 갈라주실 것을 믿으면서도 마음은 불안감에 흔들리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해에 더욱 성숙한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원합니다. 더욱 여유 있는 마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서 한신대학교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굳게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때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넘어지고 실망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가 기적과 기적 ‘사이’에 서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또 홍해바다를 갈라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역경을 뚫고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당장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고 해서 우리를 부르신 분을 불신하거나 마치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처럼 끝없는 고독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잊고 절망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도울 방도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제가 총장으로서 헤쳐 나온 고통과 고난의 시간들을 바라보신다면 여러분은 제가 드리는 말씀이 단순한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저의 간증임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그 어려운 시간들을 홀로 그리고 저의 능력으로 헤쳐 나왔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이 길에 들어섰고 그분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따라 지금까지 저의 길을 걸어왔을 뿐입니다. 그 모든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러분 앞에 건강한 모습으로 서서 이 말씀을 증언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과 용기를 갖고 광야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은 광야에서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녀야 하는 의심은 다만,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과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라면 우리는 홍해바다도 건널 수 있으며, 광야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기적과 기적 ‘사이’에서 굳센 믿음으로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는 희망찬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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