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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

윤응진 (충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8:03 14년전 8592  
2007.7.15.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4-18)


1. 아, 호치민!
지난 6월 말, 저는 18년 만에, 즉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 길에 올랐습니다. 직원 퇴수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목적지가 베트남의 하노이였습니다.
‘베트남’이라는 말만 들어도 저는 부끄럽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일부 한국군들이 저지른 양민학살을 비롯한 폭력행위만이 아니라, ‘라이 따이한’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트남 국민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적개심이나 원망은 묻어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찾은 곳은 북부지방이기에 한국인에 의한 직접 피해를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베트남 여행에서 인상 깊은 풍경은 물론 하롱베이의 절경이었지만, 마음에 깊이 새겨진 것은 호치민의 삶이 주는 강한 감동이었습니다. 호치민의 지도력은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 체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통일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호치민(호지명: 胡志明, Ho Chi Minh, 1890.5.19~1969.9.3)은 1890년 청빈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본명은 탄(Nguyen Tat Thanh)이었다. 그는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21살 때(1911년)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는데, 수배령이 떨어지자, 조국 인도차이나를 떠나 프랑스 여객선의 요리사 보조 노릇을 하며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프랑스 파리에서 그는 정원사, 청소부, 하인, 사진 수정사 등 다양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구엔 아이 퀙’(阮愛國, ‘애국자 구엔’)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 조직에서 반식민주의 투쟁의 대의를 알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참석한 강대국 대표들 앞으로 보낸 8개 조항의 탄원서에서 호치민은 프랑스가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하여 유명해졌다.
호치민은 늘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서 쉰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며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는 1942∼1943년 중국국민당에 체포·투옥당한 무렵부터 ‘호치민’ (‘깨우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베트남 민중들이 총봉기하도록 지도하여, 구엔[阮]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하였다(8월혁명).
그해 9월 2일, 바딘 광장에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군중 앞에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ㆍ자유ㆍ행복을 주었다……!"
호치민은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노선을 추구한 탁월한 외교가였으며, 기회만 된다면 힘이 아니라 설득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소박한 삶을 살다가 1969년에 베트남 통일을 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75년 4월 30일,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공산주의자들이 사이공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호치민의 비전과 의지와 지도력이었다. 베트남인들은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꿈으로써 '살아있지 않은' 영웅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시했다.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던 호치민은 그가 사망하면 화장하여 재를 베트남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호치민이 사망하자 그의 추종자들은 시신을 소련으로 보내어 방부제로 처리하여 영구보존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5년 9월 2일, 건국 기념일에 맞추어, 그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던 바딘 광장 옆에 묘지를 조성하였다. 그의 묘지에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참배객들은 검색대를 통과하여 침묵을 지키며 그의 시신이 안치된 방으로 향한다. 그의 모습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노인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묘지 인근에 위치한, 호치민이 살았던 거주지와 관저는 2층 구조의 간소한 주택인데, 집 앞에는 연못이 있다. 집 안에는 작은 나무 책상과 간소한 침대가 놓여 있다. 그가 남긴 유품들은 몇 되지 않지만, 바로 그의 소박하고 서민적이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그는 말년에, 아무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연못의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

호치민의 묘소와 관저를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였습니다.
호치민에 대한 편견과 경계심이 무너져 내리면서, 오히려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 가득 채워졌습니다.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으면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관례를 깨고, 그는 그의 삶 자체를 사회주의 혁명의 표준 모델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과연 베트남 민족에게는 출애굽 사건을 주도한 모세와 같이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였으나 그 열매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졌듯이 말입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무소유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무덤조차 지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이후, 그의 몸은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의 소유가 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부패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마땅한 그의 몸을 방부제로 처리하여 유리관에 영구보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진정으로 그를 기억하고 그를 배우고 그의 삶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교육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를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웅으로 혹은 심지어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 정부에 국민들의 마음을 묶어두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영구보존 되어야 하는 것은, 죽은 호치민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정신과 바른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

2. 오직 여호와만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오늘 우리가 경청한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모아놓고 행한 연설의 핵심구절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제91회 총회는 이 말씀을 총회주제로 선정하여 일 년간 기장 가족들이 신앙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선포한 말씀의 뜻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 나온 성경말씀의 맥락을 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24장은 이스라엘의 12부족이 세겜에 모여 계약을 갱신하는 축제를 여는 자리에서 여호수아가 행한 연설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겜 회의의 주제는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24:2-13에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행동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말씀’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4-24절에는 선택을 요청하는 말이 이어지고, 24:25절 이하에서는 계약체결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주, 야훼) 하나님’ 만을 섬길 것을 천명하고 있으며, 동료 인간들에게 그의 결단에 동참하도록 촉구합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밝히는 것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주, 야훼)를 섬기겠노라” - 이 선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선언 앞에 제시되고 있는 신앙고백에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출애굽(Exodus)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신 분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집트 제국에 대한 정치적 저항운동일 뿐만 아니라 이집트 제국을 정당화하는 종교이데올로기에 대한 ‘위대한 거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대가로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는 이집트 제국주의자들의 수호신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제국의 희생자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자유와 권리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시는 분임을 명백히 드러내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 출애굽의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애쓰시는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것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고대근동지방의 종교 관념에 따르면, 신들은 각기 자신의 지리적 영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들은 특수한 지역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수호신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단이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다른 신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인하여 지리적 영역에 따라 신들의 영향을 받던 종교적 관행이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낯선 지역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를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호신이 통치하던 영역에서 불러내어 인류 구원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한 동반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역을 옮겨가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동행하심으로써, 방랑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모델로 하여 새로운 대안공동체를 형성하심으로써 인류전체를 구원할 꿈을 키우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을 선택하시고 불러내셨던 인격적인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지역의 수호신을 택할 것인가? - 이것은 이스라엘이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직면하였던 양자택일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풍요를 보장한다는 물질의 신, ‘바알’(Baal)이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고달픈 유목민의 삶을 마감하고 안정된 농경생활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한 차례 중대한 결단을 하여야 했습니다: 여호와인가? 바알인가? 이 양자택일 앞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던 자들은 가나안 땅을 지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섬기면 풍년이 들어 물질적인 축복을 누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바알의 축복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빈부격차는 신의 뜻으로 정당화됩니다. 이런 바알 신앙은 결국 계급적인 불평등 구조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종교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혹은 바알을 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출애굽 사건을 통해 꿈꾸어 왔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형성할 것인가 혹은 농민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계급사회에 편입될 것인가를 선택하여야 하는 정치적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여호수아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결단에 직면한 12지파를 향한 것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주, 야훼)를 섬기겠노라”- 이 선언을 통하여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즉 여호수아는 이 선언을 통해 억압과 착취가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훗날 바빌로니아 제국의 전쟁포로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이 선언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쟁포로들은 거의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호신인 권력의 신, ‘마르둑’(Marduk)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를 선택할 것인가 양자택일하여야 하는 결단의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약소민족을 침략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수호신과 그런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선택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새로운 신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발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할 것인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즉 제국주의자들의 수호신을 거부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다는 것은 바로 제국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삶, 곧 약자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돌보는 삶을 실천하여야 함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한 사람은 제국주의자들의 수호신이나 물질주의를 조장하고 정당화하는 신과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는 자들과는 전혀 다른 삶, 곧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사회를 여는 대안적인 삶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여호와만을 섬기는 삶
성경은 오직 출애굽의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의 경험과 증언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신앙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그분의 길을 따라 걸어가면 참된 삶, 곧 구원받은 삶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기에, 우리는 그분을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라 부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새찬송가 455장을 부르면서 “....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여야 하겠습니까?
저는 베트남에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군대가 저지른 범죄와 개신교가 우세한 미군이 저지른 범죄로 인하여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나 군목들을 앞세워 침략을 정당화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미군들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1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생명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중부 베트남의 정글을 아예 초토화시켜버렸습니다. 그것은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행위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범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자’ 호치민은,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으나, 프랑스와 미국의 어느 지도자보다도 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였으나 실제로는 물질과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결국 바알과 마르둑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반역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치민은 그들에 의해 고난 받는 베트남 민족의 ‘출애굽’을 위하여 투쟁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약소민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든 제국주의 세력들에 저항하여 투쟁함으로써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한 종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라지만 우리 사회는 물질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한 경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바알과 마르둑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입시경쟁도 학문을 향한 열정과는 아무 상관없는 생존경쟁일 뿐입니다. 요즘 이른바 ‘대권 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경쟁도 국민을 섬기는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권력투쟁일 뿐입니다.
이웃을 섬기고 국민을 향해 봉사하려는 자세들은 실종된 채, 생존경쟁과 권력투쟁만이 난무하니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수아의 선언에 참여해야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주, 야훼)를 섬기겠노라!” 다른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입술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 고백이 삶으로 실천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긴다면, 우리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여호와만을 섬기는 교회로 우뚝 설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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