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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왕’을 기다리며

윤응진 (충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8:03 14년전 6677  
 
2007.11.25.

‘정의로운 왕’을 기다리며
(예레미야 23:1-6, 골로새서 1:11-20, 누가복음 23:33-43) 



1.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
백화점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절을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상인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체 어떤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는 대체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인가요?
기다림은 없이 다만 연례행사처럼 성탄절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갈망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방금 우리는 매우 큰 분노에 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렘 23:1) 이 하나님의 저주선언은 매우 구체적인 이유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23: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이 저지른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에서 ‘목자’들이란 유다 왕국의 ‘왕’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부귀영화만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하여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민족공동체는 내부로부터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일부 계층에만 권력과 물질이 집중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가 될 의욕을 상실하기 마련입니다.
당시에 유다 왕국을 통치하던 왕의 이름은 시드기야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훼는 나의 구원이시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왕국을 지켜주실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결국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왕하 24:17-25:21). 수많은 백성들이 살해당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전쟁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 땅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현실을 내다보시며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어리석은 왕들, 사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3) 고 다짐하십니다. 더 이상 역사를 지배자들의 손에 맡기지 않고, 친히 역사에 개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에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이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5)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기대,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처럼 정치지도자들의 거듭되는 폭정과 실정에 대한 절망과 탄식을 역사적 배경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기대된 메시아는 이 땅 위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통치자입니다. 그 메시아에 의해서 기대되는 구원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표준새번역: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메시아는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통치하면 유다 왕국 전체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샬롬이 깃든 “안전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게 될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6절 하반부의 내용을 '주님(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표준새번역은 '주님은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이시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원이란 죽음 이후의 개인 영혼 구원이 아니라, 정의로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정의실현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은 우리의 정의이다”라는 번역을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구원의 개념은 다만 사후의 개인영혼 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경험한 메시아
누가복음의 보도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의 고난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도들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의 소유물을 강탈한 폭력사범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시도하였던 정치범들을 평가절하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로마제국의 십자가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는 ‘로마의 평화’를 파괴한 정치범으로서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있습니다.
23:35의 보도에 따르면,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함께 처형당하고 있는 사람도 예수를 모독하며 말하였습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그들은 마치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인지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처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메시아가 어떻게 지배자들에 의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유대 민중들을 구원할 수 있는가? - 이 문제제기는 어느 면에서는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존의 지도자상, 즉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제압하고 군림하는 영웅에 대한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란 무기력한 몽상가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무기력한 패배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망하고 조롱합니다.
군중들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들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예수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예수에 대한 실망과 절망 혹은 지배자들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암시합니다.

3. 메시아를 기다림의 의미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은 무기력하게 죽어간 예수에게서 진정한 메시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여느 지배자들처럼 폭력과 권력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자들의 폭력에 의하여 고난받는 사람들과 연대함으로써 폭력정치를 심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로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자들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그들의 평화가 거짓된 것임을 폭로하였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심판한 자들을 심판대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형수 예수에게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었고, 고난을 무릅쓰고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골로새서 1:15-20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의미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예수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된 예수에게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노래합니다. 그의 죽음은 패배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화해’의 행동이었다고 찬양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1:20)”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된 유대청년 예수의 모습에서 고난받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로마의 평화’가 지닌 허구성을 폭로하였고, 로마 제국주의자들과 그들 편에 섰던 식민지 유다의 지배자들이 결코 정의로운 지도자들이 아님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저항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희생당함으로써, 예수는 스스로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 정의로운 지도자임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모든 지배자들을 능가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 예수가 정의를 세우는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현실을 지배하는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위험한 존재였던 메시아, 그래서 제거되어야만 했던 그 위험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또 다시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은 대선을 앞두고 있어 여느 때보다 더 시끄럽습니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특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는 특정 정치세력의 수호자로 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받는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의 뒤를 따르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예수의 오심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렇지만 기다림의 계절은 우리에게 수동적인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예수의 삶에 참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에 우리 자신이 다시금 예수를 따르는 작은 메시아들로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도록 힘을 모아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정의의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께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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