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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사상의 핵심과 의미

박재순 (서울북노회,,목사) 2010-03-23 (화) 18:49 14년전 10535  
씨알사상의 핵심과 의미
박 재순
1 씨알사상의 의미

1) 씨알사상은 ‘나’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새롭게 하는 삶의 철학이다. ‘나’는 씨알이다. 씨알의 껍질이 깨져서 새로운 생명활동이 일어나듯이 ‘나’의 껍질이 깨져서 ‘나’의 속에서 무궁한 생명활동이 일어나도록 안내하는 철학이다. 날마다 일상의 삶에서 나를 일깨우고 일으켜 세우며 힘차게 하는 참다운 주체철학이고 생활철학이다. 기술과 물질의 혁명에서 정신혁명으로 나가야 한다. ‘나’를 깊이 파고 새롭게 하는 정신혁명에서 새로운 문명시대를 시작해야 한다.
씨알사상의 주체성은 서구근대의 저항적 투쟁적 주체성, 동양의 반성적 극기적 주체성, 허무와 죽음을 돌파하는 기독교의 자기희생적 창조적 주체성이 결합됨으로써 더욱 강력한 실천력과 깊이를 지니게 되었다.

2) 씨알사상은 새로운 삶의 내용과 양식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사상이다. 씨알사상은 자발적 헌신성과 공공성을 확립하는 시민사회운동의 철학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시민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과 환경생태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7대 대선을 통해 드러난 정치적 혼돈과 이른바 민주정부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그 정치세력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사회적 의식과 운동으로만 완성될 수 없고, 시민·민중·국민이 주체가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정신과 철학이 요구된다는 것을 절감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 전체의 생태학적 위기와 파국을 예상하면서도 절대다수가 성장주의로 치닫는 현실에서 생태환경운동도 생태친화적 정신과 철학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생태친화적 정신과 가치가 몸과 마음에 배지 않으면 생태친화적 삶을 살 수 없고, 아껴 쓰고 줄여 쓰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으면 성장주의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살기 때문에 성장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자원과 에너지를 소진하는 무한성장은 가능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 경제가 안정되고 새로운 문화의 동력을 주기 위해서는 국민소득이 2만 5천불까지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추구할 때이다.

씨알사상은 민주정신과 철학이며 생태 친화적 생명철학이다. 민주정신과 생태학적 삶을 추구하는 생활철학으로서 씨알사상은 민주주의의 실현과 완성 그리고 생태환경운동의 심화 발전을 위해서 새롭게 논의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참답게 실현하고 완성하는 보람 있는 삶의 내용과 양식, 가치와 지향이 새롭게 설정되어야 한다.

3) 씨알사상은 동서를 아우르는 세계문명과 새로운 인류시대의 공동체적 평화철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씨알사상은 동서정신문화의 만남으로 형성되었다. 기독교정신과 서구근대의 과학정신이 동양의 정신문화와 만나서 형성된 세계평화철학이다. 서구문명의 정복적 확산과 침략의 과정에서 식민통치의 고난 속에서 상생평화의 공동체사상으로 형성된 것이다. 씨알사상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세계평화와 인류시대의 철학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2 씨알의 은유와 실재

1) 씨알의 은유와 실재

씨알은 인간과 자연과 신(神)을 아우르는 상징과 비유이다. 사람을 씨알로 파악한 씨알사상은 사람을 자연과 신과의 결합 속에서 파악한 생명사상이다. 자연생명의 주체와 핵심인 씨알을 가지고 역사와 사회의 주체와 핵심인 사람, 민을 나타냄으로써 씨알사상은 자연생명과 역사(사회)를 통합하는 사상이 되었다.

함석헌에 따르면 에서 ㅇ은 무한 전체, 큰 나, 큰 우주, 하나님을 뜻하고 ㆍ은 작은 나, 소우주, 영혼과 내면을 뜻한다. 은 ‘~할’, ‘~쓸’, ‘~필’에서 보듯이 나와 우주의 합일 속에서 활동하는 생명을 나타낸다. 씨알로 표현되는 생명은 자연이면서 초월적인 신성과 이어져 있다. 생명(生命)은 ‘살라!’는 절대명령을 천명(天命)으로 받고 있다. 이 절대명령은 사랑과 의(義)에 근거한다.

씨알은 속과 겉, 내용과 형식, 본질과 현상, 정신과 육체, 맘과 몸의 온갖 이원론을 극복하고 통합적 일원적 사고를 요청한다. 씨알에서는 몸과 맘, 속과 겉을 분리할 수 없다. 속의 알짬과 겉의 형태를 나눌 수 없다. 다석이 말하듯 “몸은 속알[얼]을 실은 수레와 같다.” 씨알은 몸과 맘(얼)이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씨는 생명의 핵심, 생명을 실어 나르는 주체, ‘나’이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주체인 ‘나’를 지니고 있다. 생명의 씨알인 ‘나’가 죽으면 생명은 다 죽는다. 다 죽어도 씨가 있으면 생명은 살 수 있다. 씨알은 생명의 근원, 알짬이다. 씨알은 생명의 시작이며 끝이다. 모든 생명은 우주의 씨알이고 인간은 우주생명역사의 씨알이다. 생명은 속에 스스로 살고 살리고 생명을 이어가는 씨알을 지녔고 인간은 우주생명의 근원과 목적과 끄트머리이다.

씨알은 큰 변화를 일으킨다.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고 작고 초라한 것이 꽃과 잎과 열매를 낳는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을 지녔고 소박한 것 속에 아름답고 찬란한 것을 가졌다. 씨알은 큰 잠재력,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작은 껍질 속에 무한하고 무궁한 생명을 품고 있다.
씨알은 개체(씨알) 속에 전체(나무)를 품고 있고 전체 안에 개체가 있다. 씨알 하나는 우주자연의 신비한 조화와 협력으로 생겨난 것이다. 씨알은 우주의 창조적 조화와 생명활동에 자신을 개방하고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생명창조활동을 일으킨다.

씨알은 죽어서 사는 길을 보여준다. 자신이 깨지고 죽어서 생명이 살아난다. 이것은 생명의지를 초월한 것이며, 물질과 법칙을 넘어선 정신과 얼, 사랑과 의의 원리를 드러낸다. 씨알은 생명의 자발성, 개방성, 상생조화성, 영속성, 자기부정성과 초월성, 개체와 전체의 전일성을 드러낸다.

2) 복숭아 열매의 껍질과 살과 씨

함석헌은 씨알사상을 복숭아씨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복숭아씨를 도인(桃仁)인이라 하여 씨를 어질 인(仁)으로 보았다. 복숭아는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껍질과 살과 씨다.

열매의 껍질은 사람의 눈을 끌만큼 빛깔이 곱고 아름답다. 껍질은 사람의 겉모습, 말, 개성, 매력, 직위와 봉급, 재주와 솜씨를 나타낸다. 처음 볼 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으나 이것이 인간관계를 지속시키지는 못한다. 우정과 인간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은 복숭아의 살이다. 살은 정(情), 마음을 나타낸다. 인정을 주고 마음을 주기 위해서 껍질, 겉모습, 매력은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살은 주자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정도 주자는 것이다. 과일의 살이 부드럽고 향기롭고 달콤하듯이 마음과 정도 부드럽고 향기롭고 달콤하다. 과일의 살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정도 주지 않고 가지고만 있으면 썩고 만다. 정과 마음을 주고, 받으며 관계와 우정이 깊어지고 지속된다. 그러나 복숭아의 살이 목적이 아니다. 살은 주어버리고 씨를 남기자는 것이 복숭아의 목적이다. 정과 마음도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정과 마음을 아낌없이 주면서 영원한 생명의 씨앗, 진리의 씨앗, 신적 생명의 씨앗을 남기고 전하자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복숭아씨는 딱딱하고 쓰다. 향기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부드럽고 달콤한 맛도 없다. 딱딱하고 쓰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복숭아의 생명을 영원히 이어가는 씨알, 알짬이 들어 있다. 생명의 깊은 신비, 알짬,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지키기 위해 딱딱하고 쓴 맛을 감수한다. 인생의 씨알인 사랑, 참, 정의도 딱딱하고 쓰다. 이것을 지키고 전해야 영원한 생명, 우주적 신적 생명이 살아서 전해진다. 속 씨가 상하거나 썩으면 생명 전체가 썩어서 죽는다. 이것을 지키고 실현하고 전하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고 천직이며 이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순직이다.

3) 씨알은 민중, 맨 사람의 비유, 엘리트주의 비판

류영모는 대학에 나오는 친민(親民)을 “씨알 어뵘”(씨알(民)을 어버이처럼 받듬)으로 풀이했다. 흔히 유교에서 백성은 충동에 휘둘려 본성을 훼손하는 어린이, 소인으로 보고 임금과 대인을 나타내는 군자(君子)는 본성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존재로 보았다. 류영모가 씨알(民)을 어버이로 본 것은 씨알을 섬겨야 할 어른으로 본 것이며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원칙을 밝힌 것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씨알은 민중 또는 시민의 민을 나타내거나 사회적 신분이나 제약에 규정되지 않은 ‘맨 사람’을 뜻한다. 대통령도 부자도 자신의 지위나 소유를 떠나서, 탐욕과 허영에서 벗어나 오직 몸과 맘만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씨알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씨알은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개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이 자신의 지위와 소유에서 자유롭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류영모와 함석헌은 사회의 특권적 지위와 부를 누리지 못하는 민중과 씨알을 동일시했다.

씨알은 치장하지 않은 생명을 나타낸다. 민중, 맨 사람을 뜻한다.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 있는 치장하지 않은 존재이다. 씨알을 금상자나 은상자에 싸놓으면 생명의 창조활동을 할 수 없다. 씨알이 명예나 권력이나 부에 매달리면 씨알노릇을 할 수 없다. 다 버리고 흙 속에 들어갈 때 생명의 창조활동이 일어난다. 자기를 깨트리고 죽임으로써 생명활동을 일으킨다. 씨알사상은 모든 엘리트주의를 거부하고 명예와 권력과 부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거기 의존해서 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생명 자체, 영혼 자체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3 씨알사상의 기본 원리

일본에서 10 여 년 전에 경제가 갑자기 추락하였다. 미국과 유럽을 능가할 것으로 여겼던 일본경제가 추락했을 때 일본 사람들이 당황했다. 그러다가 기술과 자본은 있는데 사상과 정신이 없어서 일본경제가 추락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상연구에 열중했다. 교토포럼은 공공성의 철학을 탐구하여 20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교토포럼의 대표가 김태창 박사인데 “나를 살리고 공의 영역을 열어간다”(活私開公)는 주장을 하고 있다. 김 박사의 이런 주장은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씨알사상은 나의 속의 속(씨알)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사귐으로써 나를 살리고 공공성, 공동체의 차원을 열어가는 사상이다.

나라의 보물인 숭례문이 불탔다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나라의 정신적 초석이 되고 기둥이 되는 씨알사상과 씨알정신이 나라의 참된 보물이 아닐까? 불로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불이 붙으면 붙을수록 아름답게 빛나고 힘차게 살아 움직이는 보물이 씨알사상과 씨알정신이다.

씨알사상과 씨알정신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1) 스스로 함의 원리--정신혁명의 철학
역사와 우주생명의 주체로서의 씨알; 생명의 알짬, 속 깊은 불씨, 얼, 神

씨알은 ‘나’를 나타낸다. 나는 자유로운 주체인데 주체는 물질이 아니라 영과 얼과 정신이다. 씨알은 법칙과 타자의 힘에 의해 존재하고 움직이는 한갓 물질이나 물체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고 움직이고 변화해가는 생명의 주체를 나타낸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스승인 남강 이승훈이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1922년 봄

3·1운동의 결과에 대한 회의와 함께 새로운 국제사회주의세력과 합작하여 목표를 달성하려는 사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3년 동안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남감이 일본 공산당과 손을 잡고 독립을 추진하자는 공산주의 청년 곽균에게 들려준 교훈의 일부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대주의에 짓눌리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짓밟힌 민족의 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말씀이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정신이 남강의 민족자주정신에 뿌리를 둔 것을 알 수 있다. 씨알사상과 정신의 싹을 여기서 볼 수 있다.(박재순)

씨알사상은 오산학교의 남강 이승훈에게서 비롯되었다. 안창호가 1907년에 조직한 신민회에 이승훈이 참여하여 신민회 활동의 하나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오산학교에서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셋 사이에 깊은 정신적 일치와 결속이 이루어졌다. 1910년에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교사로 오면서 오산학교가 기독교 학교로 된 것은 사실이나 류영모가 이승훈을 기독교로 이끈 것은 아니다. 이승훈은 1908년에 오산장로교회 설립을 위해 토지를 헌납했고, 1909년 1월에 순종이 오산지역을 순시할 때 “야소교인으로서 교육에 열심인 이승훈”을 친견했다는 총독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류영모를 만나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기록과 자료에 류영모가 이승훈을 개종시킨 것으로 나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므로 바로 잡아야 한다.

씨알은 어떻게 스스로 움직이는가? 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씨가 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성령의 불씨다. 속에 하늘의 명령, 뜻, 말씀, 인의의 씨, 속알(덕), 성령이 있다. 이것이 불 탈 때 스스로 할 수 있고 스스로 할 때 만족하고 기쁘다. 나, 주체는 스스로 움직이고 새로워지며 변화한다.

생명은 숨이고 숨은 불타는 것이다. 몸에는 생명의 불이 붙고, 마음에는 생각이 솟고 혼에는 사랑이 불타야 한다. 생명이 불타는 것은 숨 쉬고 노동하는 것이며, 몸의 불탐에서 생각이 솟고 생각에서 참 생명,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랑이 나온다. 몸-생각-사랑(하나님)이 하나이다. 생각은 사랑과 노동의 삶에서 나온 것이다. 함석헌은 노동에서 생각이 솟는다고 했다. 유영모는 사랑이 불타는데서 생각이 나온다고 했다. 숨, 생각, 사랑은 주체가 일어섬이다.

함석헌은 인간을 우주의 씨알로 보았다. “우리는 터져 나가는 우주에 산다. 우리가 터져 나가는 우주다. 우주의 씨알이다. 우주의 한 없는 겨레가 터져 나올 씨알이다.” (“새 삶의 길”, 함석헌전집2. 212)

함석헌은 우주를 살아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다. 우주는 자라는 생명체이고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를 가진다. 우주는 자신을 터뜨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을 폭발시켜 버리고 자신을 초월하면서 앞으로 나간다.

이런 우주 속에 사는 우리도 자신을 터뜨리며 솟아올라 앞으로 나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우주 안에 있으면서 우주를 품고 있는 우주의 주인이다. 우리가 우주 자체이다. 우리는 우주의 새로운 주인들을 낳을 씨알이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과 맨 앞 끄트머리에 있다.(박재순)
스스로 나아가는 삶을 살려면 끊임없는 자기혁명과 쇄신이 요구된다. 씨알사상은 정신혁명과 자기 쇄신의 철학이다.

2) 공동체성의 원리--통일의 철학

주체와 전체의 일치, 부자유친(父子有親), 하늘과 사귐(親天)

스스로 함의 원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나온다. 씨알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씨알이 있다. 씨알사상은 개체와 전체의 일치를 추구한다. 하나님을 만날 때만 참된 ‘나’가 생겨난다.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귀는가? 씨알 속에 속의 속에서 하나님, 하늘, 성령, 말씀을 만나고 사귄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하고, 유교에서는 하늘이라고 한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하늘로 나타낸다. 하늘을 대하는 태도에 세 가지가 있다. 知天, 樂天, 親天이다. 지천은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을 나타낸다. 공자는 나이 50에 천명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낙천은 맹자가 큰 나라가 횡포를 부리지 않고 작은 나라들과 잘 지내는 것을 낙천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큰 나라가 가진 힘을 다 쓰지 않고 하늘의 도에 따라서 작은 나라들과 편하게 잘 지내는 것을 낙천이라고 한 것이다. 친천은 유영모가 쓴 말인데 하늘의 하나님을 어버이로 알고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父子有親의 관계를 바르게 갖는 것을 친천이라고 하였다. 지천은 하늘을 아는 것인데 하늘을 지적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이고 낙천은 하늘을 즐거워하는 것인데 역시 하늘을 대상으로 여긴다. 친천은 하늘을 사귀고 섬기는 것인데 주체와 주체로서 만나고 사귀고 새롭게 되는 관계이다.

하늘의 어버이 하나님과 섬기고 사귀면 하늘의 일, 창조의 일을 할 수 있다. 창조자의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노릇을 하는 것이다. 하늘의 아들은 천자(天子)이다. 다 천자의 구실을 하면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 하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주체이며 하늘의 일, 천명을 이룬다.
유영모는 중용(中庸)을 ‘가온 쓸’, ‘줄곧 뚫림’으로 풀이했다. 속의 속이 비고 뚫려서 하나님, 우주생명, 성령과 소통함을 중용으로 보았다. 다석의 이런 중용이해는 유교의 사유지평과 기독교의 사유지평을 융합한 것으로서 유교와 기독교에 없었던 새로운 사유지평을 열었다. <중용 中庸>에서는 “희로애락의 미발(未發)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중절(中節)된 것을 화(和)”라고 했다. 여기서 중이란 희노애락 등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의 내면적 마음을 의미하며, 화는 이미 촉발된 정(情)이 중에 의해 조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시중설(時中設)은 본래적인 모습을 지키면서도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대처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본래의 내면적 마음을 중이라 하고 이 중을 지킴으로써 변화하는 삶에 맞게 적절히 대처하는 것을 강조하고 신, 성령과의 소통을 말하지 않았다. 또 기독교에서는 신의 일방적 구원과 인간의 조건 없는 회개와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적극적 주체적 참여를 말하지 않았다. 다석은 신과의 소통을 말하고 인간의 내적 혁명과 쇄신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관점을 바탕으로 삼고서 인간의 본성을 살리고 키우는 유교적 수행과 실천을 강조했다.

우주의 한 가운데가 나의 속이며 이 속이 뚫림으로써 하나님, 우주, 사회 전체와 소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막힌 속(中)을 뚫어서 ‘나’를 살려내고 전체, 공공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속알을 밝히고 속알을 살려서 바탈(본성)을 키우고 살려서 하늘의 뜻, 공적 사명을 이룬다. 삼일신고에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유영모는 이것을 “바탈을 트고 맡음을 마침”이라고 풀이했다.

다석의 이런 논의는 서구신학에서 계시의 접촉점 논쟁이나 인간구원에서 인간협동에 관한 논의를 비켜가거나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거스틴이래 루터와 칼빈, 그리고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주류신학은 두 가지 주장을 견지했다. 첫째 인간 속에 신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부정하고 오직 신의 은총과 능력으로 신과 인간의 만남과 계시사건이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둘째 인간을 구원함에서 있어서 인간자신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고 오직 신의 능력과 은총으로 인간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석은 속을 줄곧 뚫고 비워서 성령과 소통함으로써 속알을 살린다고 하였다. 다석은 사람의 속을 줄곧 뚫고 비워서 신(성령)과의 소통을 말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자기부정과 신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자기부정과 신과의 소통이 강조됨으로써 나의 본성인 속알이 살아난다고 하였다. 이로써 접촉적 논쟁이나 협동설을 비켜가면서도 다석은 신과의 만남과 함께 인간의 주체적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작은 개체가 지닌 씨알의 생명은 공공성, 항구성, 절대성을 가진다. 동서, 민족, 국가를 넘어서 우주적 보편성과 영속성을 가진다. 生命은 살라는 명령, 天命이다. 하늘이 내린 사명과 직분이 있다. 사랑과 정의를 드러내고 생명을 살리고 물성을 따라 사물과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씨알은 스스로 하는 주체이면서 우주생명과 감응하고 공명하며 상생조화한다. 우주천지의 창조활동에 자신을 열고 맡기고 참여하면서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한다. ‘나’의 속에서 하나님, 우주 전체를 보고 ‘너’에게서 ‘나’를 본다. 함석헌은 예수를 “‘너’를 ‘나’라고 한 이”라고 했다. 너와 나의 일치 속에서 나와 너를 살려간다. 모든 ‘너’에게서 ‘나’를 보는 무한책임의 강력한 주체철학이면서 ‘나’, ‘너’, 우주 전체의 일치를 추구하는 통일철학이다. 모든 것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은 참 삶, 늘 삶의 궁극적 깨달음이면서 그 첫 걸음이다. 씨알사상은 안과 밖, 정신과 물질, 인간과 신, 역사와 자연(우주)을 아우르고 통합하는 통일철학이다.

3) 자람과 새로움의 원리

스스로 함의 원리는 자람과 새로움의 원리로 이어진다. 스스로 한다는 것 자체가 밖에 대해서 주어진 것(환경)에 대해서 힘 있어지고 새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함과 새로움의 원리는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에서 나온다. 속이 뚫리고, 얼과 영을 체험하면 제소리, 새로운 소리가 나온다. 다석은 ‘나’는 ‘나가는’ 존재라고 했다. 끊임없이 ‘낫는’(生) 존재이며, 위로 솟아 앞으로 나가는 존재이다.

씨알은 작은 것에서 크게 자라고 새롭게 되는 원리를 나타낸다. 씨알은 싹이 트면 날마다 자라고 새롭게 된다. 자라지 않는 것, 새로워지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 살아 있는 혼과 정신은 자라고 새로워진다. 바울이 말했듯이 “겉 사람은 갈수록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린도후서 4,16)

하나님을 만나 사귀면 스스로 하게 되고 스스로 하면 자라고 새롭게 된다. 함석헌은 민중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면 위대한 예술과 종교와 문화가 나온다고 했다. 민중이 씨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섬기고 사귀면 큰 일이 일어난다. 루터는 민중과 하나님이 직접 만나도록 하려고 종교개혁을 했는데 다시 하나님과 민중 사이에 많은 장벽이 생겼다.


4) 희생과 상생의 원리--밀알의 희생과 죽음

씨알은 하나가 죽음으로써 전체를 살린다. 잎, 꽃, 열매가 아닌 씨앗은 명예도 고움도 자랑도 없다. 누리자는 것이 아니라 바치자는 것이다. 내 속에 민족, 나라, 인류, 생명의 참 씨알이 들어 있다. 내가 깨지고 죽음으로써 전체를 살린다. 씨알은 전체생명의 먹이이며 밑동이다.
씨알들은 역사의 희생양, 그리스도이다. 씨알은 역사의 짐꾼들이다. 그리스도는 큰 짐꾼이고 씨알들은 작은 짐꾼들이다. “세력 있는 자는 힘으로 짐을 떠넘기고 지식인은 교묘하게 짐을 떠넘긴다. 서로 짐을 떠넘기는 세상에서 짐은 갈수록 불어난다. 못난이, 힘없는 이, 착한 씨알들만 짐을 넘길 줄 모르고 진다. 짐을 짐으로써만 역사와 사회는 구원된다.”(함석헌)

무한경쟁을 내세우고 나의 이권과 출세를 위해 남을 짓이기고 희생시키는 세상이 망하지 않으려면 전체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씨알이 있어야 하지 않나?

5) 섬김으로 이끄는 원리--민주와 평화시대의 지도력
흙의 겸허. 흙에 묻힌 하늘의 씨알

십자가와 성만찬은 희생의 길이 구원의 길임을 보여준다. 어버이의 마음, 어른의 마음이 아니고는 이런 길을 갈 수 없다. 나보다 남을 앞세우고 남을 높이고 살리는 어른, 어버이의 마음이 세상을 살리고 구한다. 요즈음 섬기는 지도력, 종의 지도력에 관한 말들이 유행한다.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섬기는 지도력이 요구된다.

씨알은 흙속에 들어가야 하늘의 생명창조활동을 일으킨다. 하늘을 품은 씨알이 흙 속으로 들어간다. 주역에서 지천태(地天泰)는 하늘이 땅 아래 들어온 것으로 크게 길(吉)하고 평화로운 것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육신(成育身)도 하나님의 말씀(하늘)이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온 것을 나타내는데 세상의 구원과 평화를 나타낸다. 지천태와 성육신은 흙 속에서 생명활동을 펼치는 씨알과 일치한다.

오늘의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교육자는 마땅히 흙 속에 들어가 민중을 섬기는 지도력을 보여야 할 때이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스승이었던 남강 이승훈은 섬기는 지도력의 귀감이었다. 궂은 일, 험한 일을 도맡아 하고 남을 앞세우고 제자를 내세우고 제자에게 배움으로써 큰 스승이 되었다.

4 씨알사상의 실천적 원리

1) 죽음으로써 사는 원리

씨알은 자신이 깨지고 죽음으로써 풍성하고 창조적인 삶을 펼친다. 씨알이 깨지고 죽지 않으면 창조적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삶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넘어서 사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만 매달리는 인간은 자유롭고 힘 있게 살 수 없다. 죽음을 잊고 죽음을 넘어서서만 힘 있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삶에 갇힌 사람은 두려움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없다.

함석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방법을 묻는 사람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방법을 몰라서 묻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을 각오를 하면 무엇을 어떻게 할 지 길이 환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몸을 가진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삶을 힘 있게 살 수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가져야 하고, 물질과 몸을 넘어서 영과 얼로 살 수 있어야 하고, 삶 속에서 죽음을 보고 죽음 속에서 삶을 보는 신앙적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씨알은 내가 깨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 내가 깨지고 죽으면 삶의 큰 기적이 일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참된 혁명과 변화는 내가 죽을 각오를 하는데서 시작된다. 사랑과 의를 이루기 위해서 내가 깨지고 죽는다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세상에 사랑과 의는 사라질 것이다. 예수만 특별해서 십자가 희생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씨알이라면 누구나 모든 씨알이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는 욕심과 허영을 버리고 나를 깨트릴 수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일과 작은 관계들 속에서 자기를 비우고 깨트릴 때 참된 씨알의 생명이 활동을 시작한다.

2) 씨알이 자기 속에 우주적 삶의 알짬을 지니고, 과거와 미래의 모든 생명을 품고 있듯이 사람도 자기 속에 모든 희망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밖에서 물질들에서 희망의 조건을 찾거나 가치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물질세계와 외적 조건은 희망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물질 자체가 가치를 주지도 못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 자체가 가치와 희망은 아니다. 삶의 가치와 희망은 삶 자체 속에 있을 수밖에 없고 삶의 주체인 ‘나’에게서 가치와 희망이 나와야 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모든 것이 ‘나’에게서 시작하고 ‘나’에게로 귀결된다는 ‘나의 철학’을 내세웠다. 이들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말 그대로 해석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 자체이다. ‘나’를 떠나서는 길도 진리도 생명도 없다. 하나님이라는 인격적 주체가 있어서 우주만물을 창조했다고 성경이 말할 때 하나님의 인격적 주체인 ‘나’가 우주만물의 창조적 근거이며 모든 희망과 가치의 원천임을 밝힌 것이다. 씨알이 생명이고 힘이듯이 사람도 그 자체가 희망이고 가치이며, 생명과 진리가 되고 스스로 길이 되어야 한다. 씨알이 있는 곳에 희망과 가치가 생겨나고 생명이 살아나고 진리가 드러나며, 길이 열려야 한다.

3) 씨알은 제 스스로 생명활동을 펼치면서 다른 씨알들과 연대와 협력 속에서 상생과 평화의 길을 간다. 씨알은 결코 진리와 생명과 세계를 독점하려고 하지 않는다. 선을 행하되 홀로 하지 않고 함께 하려고 힘쓴다. 씨알의 조직은 늘 열린 조직이고 남에게 기회와 자리를 열어주는 조직을 추구한다. 교리나 종파, 이념과 당파에 매임 없이 삶 속에서 서로 손잡고 생명과 평화의 길을 열어간다.

4) 씨알은 꿈틀거리는 생명운동이다. 마음이 움직여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하나로 되고 꿈틀거림이 일어나야 한다. 사업과 정신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 맨 처음 시작하는 것도 씨알이고 맨 마지막에 책임지는 것도 씨알이다. 씨알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씨알의 정신과 혼이 살아 움직여서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틀 때 새 역사의 운동이 시작된다. 먼저 마음 속에서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생각과 열정이 불타올라야 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생명과 영혼의 꿈틀거림이 생겨나고 마음이 통하고 이어져서 새로운 운동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씨알은 먼저 나의 마음 속에서 얼의 씨알이 싹트게 하고 서로의 마음과 삶 속에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씨알이 싹트게 해야 한다. 대지에서 하나의 씨알이 싹트면 수많은 씨알이 함께 싹트듯이, 우리 각자의 마음과 삶에서 씨알이 함께 싹트게 해야 한다.

5) 씨알은 사치나 폭력을 모른다. 현대물질문명의 본질은 사치와 폭력에 있다. 함석헌은 현대문명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살고 죽고 교육을 하고 뜻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것을 빼놓고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씨알은 본성적으로 사치와 허영을 싫어하고 폭력과 강제를 거부한다. 사치와 허영에 싸인 씨알은 썩고, 총과 칼로 짓밟으면 씨알은 파괴된다. 씨알이 사는 길은 사치와 허영,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폭력으로 씨알이 싹트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치와 허영으로 치장한 씨알이 어떻게 생명의 창조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까?

사치와 폭력은 물질적 탐욕에서 비롯된다. 탐욕과 허영에서 벗어난 가난한 마음에서 가난한 삶이 나온다. 가난한 마음과 삶이 공동체적 생태학적 평화의 기초이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저들의 것이다.”라고 한 말씀을 실천할 때이다. 낡은 문명의 멸망에서 벗어나 새 나라, 새 문명을 열기 위해서는 가난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가난하게 사는 길을 모색할 때이다. 가진 자들, 부자들도 이제 가난하게 사는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가난을 교조적으로 획일적으로 요구하거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가 매우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관념적으로 획일적인 삶의 기준이나 양식을 강요할 수 없다. 남에게 어떤 기준을 요구하기 전에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형편과 처지에 따라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하고 더불어 사는 생태학적 삶을 향한 꿈틀거림이 일어나야 한다.

노자는 씨알의 삶을 위한 세 원칙을 전해 주었다. 사랑(자비), 검소함, 남보다 앞장서지 않음. 사랑은 생명의 본질과 원리이고 검소함은 생명의 양식이며 남보다 앞장서지 않음은 살림과 섬김의 기본자세이다. 씨알은 자기를 깨트리고 버리는 사랑으로 살고 알몸과 알맘의 검소함으로 살며 남을 희생시키거나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남을 세움으로써 세상을 이끌어간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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