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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말씀(‘나’의 진리)과 그리스철학의 로고스(이성의 진리)

박재순 (서울북노회,,목사) 2010-03-23 (화) 18:51 14년전 7972  
성경의 말씀(‘나’의 진리)과 그리스철학의 로고스(이성의 진리)

~요한복음 1장 1~14절을 중심으로~

박 재 순

1 세계화와 동서 문명의 만남

우리는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민주화, 고도 산업화, 세계화를 동시에 겪고 있다. 이것은 농업정착 사회를 이룬지 1만년, 기록된 국가문명 5천년 역사에서 우리 세대만 누리는 행운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사적인 변화는 여기에 걸맞는 새로운 정신과 철학을 요구한다. 아무리 민주 제도와 형식과 절차가 마련되어도 탐욕과 당파심에 휘둘리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정치인과 공무원과 국민에게 자유로운 주체와 공심이 없으면 민주화는 완성될 수 없다. 민이 주인 노릇하려면 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물질의 깊고 묘한 세계가 드러나며 찬란한 산업물질문명을 빚어내는데 이 놀라운 물질문명을 건전하게 지키려면 물질의 깊이만큼 정신과 영성의 깊이를 가져야 한다. 물질문명은 갈수록 빛나고 크고 복잡해지는데, 인간정신은 갈수록 메마르고 쪼그라들면 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 민족과 국가와 문명의 벽을 무너뜨리며 인류를 하나의 세계 속으로 몰아넣는 세계화도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세계정신을 요구한다. 오늘 우리가 겪는 민주화, 산업화, 세계화는 주체적인 ‘나’와 세계정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를 요구한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동서 문명의 창조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500년 전부터 서구문명의 팽창과 확산으로 시작된 세계화는 유럽과 미국 밖에서 동서 문명의 충돌과 융합을 초래했다. 정신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지역은 동아시아 3국 한국, 일본,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에서 서구 정신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기독교와 한국·아시아 정신문화가 깊게 창조적으로 만났다. 중국에서는 마태오 리치가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통해 유학자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으나 중국 사회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또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전통종교들을 억압하고 기독교를 배척함으로써 전통문화와 기독교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도꾸가와 막부이래 명치유신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이 근대화과정을 통제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는 저지되었고 기독교는 3만명의 순교자를 내고도 일본사회의 중심부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지배종교들이 쇠퇴하면서 민중이 역사의 중심과 전면에 나서게 되었을 때 기독교가 민족사회의 중심부에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가 줄기차게 진행되었다는 것과 기독교가 민족사회의 중심과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왔다는 점에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오늘 한국사회는 동서 문명의 만남과 융합의 중심에 있다. 동서 문명이 가장 깊고 온전하게 만나는 그 중심의 흐름 속에 우리가 서 있다. 기독교 신앙과 서구철학이 깊이 들어와 있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이은 서구철학이 오늘 우리의 정신과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얼마나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가? 서구 철학이 철학이라고 할 만큼 우리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한다.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생존경쟁으로 내몰리는 현대인에게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철학이 끌리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또 우리에게는 유교·불교·도교와 같은 동아시아 종교문화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풍성하게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한국교회가 새벽기도회를 하는 것은 불교와 도교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의 불교도 기독교와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연립주택 단지 앞에는 작은 수녀원이 있고, 뒤에는 비구니 선원이 있다. 비구니 선원 옆에 약수터가 있어서 자주 가는데 비구니 선원 게시판에 있는 글을 읽고 놀랐다. 사랑에 관한 글 끄트머리에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불교에서는 창조라는 말을 쓰지 않는 걸로 알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100 년 전의 불교와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서 문화가 합류하는 것을 실감한다.

오늘 우리가 동서 정신문화가 가장 깊고 풍성하게 만나는 정신사적 문명사적 과정의 한 복판에 있다는 것은 인류사적으로 특별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생을 위한 힘과 지혜를 제공하고 세계평화의 철학과 정신을 제시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세계평화시대를 열어갈 길을 열 책임을 지고 있다. 어쩌면 인류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평화시대를 열기 위해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이 혹독한 시련과 험난한 고통의 길을 걸어 온지도 모른다.

새로운 정신과 철학이 이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했는데, 우리 민족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함석헌은 말했다. 우리의 종교와 문화는 낙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적당히 피상적으로 넘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어우러져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하나 됨을 느끼는 감정에 치우치면 당파심에 빠지기 쉽고 당파심에 빠지면 주체의식을 갖지 못하고 전체를 아우르는 비전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깊은 종교와 철학이 나오지 못했고 창조적이고 힘찬 예술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족적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고 큰 나라를 이루고 힘 있게 뻗어나가지 못한 것도 깊은 정신과 철학으로 뚜렷하고 힘찬 민족적 주체성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남북분단이 되었으면서도 이만큼 정치경제적으로 힘을 뻗치는 것은 지난 100 여 년 동안 혹독한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민족사 속에서 민주정신과 신앙을 닦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위대한 삶과 정신을 보여준 인물들이 너무 많다. 지난 100 여년의 역사와 삶에서 생각과 정신이 닦여졌고 생각과 정신이 오늘 정치, 경제, 문화를 지탱하는 토대가 된다고 여겨진다.

민주화, 산업화, 세계화 속에서 우리는 문명사적인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밝은 미래와 함께 어둡고 고통스런 미래를 보여준다. 오늘날 자본과 시장 중심으로 전개되는 세계화 속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삶의 뿌리가 뽑혀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기술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가정은 파괴되고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빈곤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화·산업화·세계화는 인류의 새로운 미래와 함께 혼돈과 파멸의 깊은 심연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요구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깊은 불신을 받고 있다. 불신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한국사회 대중 속에 확산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교회제도와 형식도 잘 갖추었고 사람과 돈도 많고 선교에 대한 열정도 넘친다. 철저한 회개와 근본적인 자기성찰이 없다.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고 시대의 아픔과 문제에 대한 통찰이 없다. 한 마디로 깊은 영성과 바른 실천을 지향하는 신학, 철학이 없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서 제 구실을 하려면 깊은 영성과 철학(신학)을 가져야 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한국 근현대의 이런 문명사적 상황과 사명을 깊이 자각하고 주체적이고 세계적인 정신과 철학을 제시했다. 이들은 기독교 정신, 그리스철학과 서구 근대철학의 이성적 사고, 동아시아의 도(道) 철학을 한국의 한(韓, 큰 하나) 정신으로 융섭하여 깊은 영성과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민주적 생활 철학을 닦아냈다.

오늘은 유영모·함석헌의 철학을 말하기 위한 준비 작업의 하나로서 요한복음의 첫 머리를 중심으로 기독교 정신과 그리스철학의 만남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요한복음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것은 믿음과 앎, 앎과 행함, 개인의 영성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요한복음이 구도자적 수행과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는 동아시아인의 심성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2 그리스의 로고스 철학과 성경의 만남

오늘 읽은 성경본문도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제국에 의해 지중해를 중심으로 세계화가 강력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생성되었다. 예수님과 초대 기독교는 오늘 우리처럼 지중해 세계에서 동서 문명이 합류하는 상황에서 살았다. 지중해 동쪽의 변두리 지역에서 예수님과 초대기독교는 정복과 수탈을 일삼는 서방문명의 지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다스리는 평화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리스 로마의 거대하고 화려한 제국주의 물질문명과 군사력 그리고 이성주의 철학에 맞서 신의 사랑과 정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를 선포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의 사랑과 정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의 화신이었다. 달리 말하면 사랑과 정의가 다스리는 나라의 화신이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로마제국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던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의 거대한 문명의 중심에서 그리스의 로고스 철학과 만나게 되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문명과 맞서면서도 그 문명의 정신적 핵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문명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식민지 백성의 문명과 식민 종주국의 문명이 만나서 합류하였다.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문명의 정신적 핵심을 이루는 ‘로고스’를 받아들였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하였고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요한복음에서 신의 말씀을 로고스라고 번역한 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300년 전부터 유대교에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길 때 이른 바 70인 역에서 말씀을 로고스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히브리 종교의 하나님 말씀과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는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 개념이다. 어떻게 보면 대립적이고 대조적인 두 정신문화가 합류하였고 그 과정에서 신의 사랑과 정의의 말씀이 로고스로 번역되고 히브리 정신과 그리스철학은 유럽문명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되었다. 이것은 위대한 모험이고 창조적인 작업이었다. 둘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성경의 말씀을 로고스로 번역한 것은 문명사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고 그 문제가 유럽역사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개념과 히브리 신앙의 말씀 개념이 서구인들의 삶 속에서 문명적 세계관적 차이를 극복하고 화해와 융합을 이루었다면 서구사회는 위대한 기독교 문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오늘 서구 기독교문명이 해체되고 쇠퇴한 것은 로고스와 다바르(말씀)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참된 화해와 융합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 그리스문명의 군사적 정복적 성격과 그리스 철학

말씀과 로고스는 어떻게 다른가? 먼저 로고스를 살펴보자. 본래 로고스는 “모으다. (수를) 세다, (기억한 것을) 열거하다. 말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본래 로고스는 계산의 의미를 지녔으며, 전체 틀의 윤곽에 대한 직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말이 말하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인간이성의 작용과 행위를 나타내고, “이성, 원리, 법칙, 논리, 말”을 뜻하게 되었다. 로고스는 사물을 창조하거나 생성시키거나 변혁시키지 못하고 주어진 조건이나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소통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변혁시키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성경의 말씀 다바르와는 전혀 달랐다. 로고스가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는 것이라면 다바르는 창조하고 생성시키며 주체적이고 인격적이다.

로고스를 핵심어로 삼는 그리스철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첫째 그리스철학은 그리스 식민지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의 정치사가 그렇지만 특히 그리스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들의 국가이고 문명이었다. 끊임없는 민족전쟁을 통해서 승리한 정복자들이 노예와 식민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제국과 물질적 번영을 누리는 문명세계를 이룩했다. 그들의 철학은 고상하고 귀족적이며 아름답고 심오하지만 그들의 정치와 문화는 매우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지중해지역에서 이룩한 미케네문명은 그에 앞서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미노아문명에 비해서 군사적이고 정복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기원전 12세기에 미케네문명이 몰락한 이후 300년의 암흑기를 거쳐 폴리스 국가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그리스문명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는 산들 사이의 작은 계곡에 고립해서 사는 250여개의 작은 폴리스 공동체들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는 고립된 다수의 작은 공동체들의 공존과 전체적 조화를 지향하였다. 그런데 그리스의 토지 상실자들이 이오니아로 유입되면서 이오니아 식민 활동이 시작되었고 여기서 무역이 활성화하면서 제국주의적인 팽창과 확대가 이루어졌다. 아테네 제국주의를 추구한 페리클레스는 잠시 번영을 이루었으나 그리스는 곧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의 쇠퇴기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는 고립, 분할된 다수 폴리스 공동체들의 공존과 전체적 조화라는 복고적 철학을 내세웠으나 정복적 팽창적인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알렉산더와 로마제국에 의해 그리스·로마의 제국주의가 완성되고 이러한 세계제국의 공간에서 헬레니즘이 꽃피었다. 초기 기독교는 알렉산더와 로마 제국에 의해 형성되고 확산된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그리스의 로고스철학을 만났다.
그리스철학을 그리스·로마의 제국주의와 직접 일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귀족적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노예제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없었고 현실을 변혁하기보다 현실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이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의 정복자적인 문화가 철학에 반영되어 있다. 사물과 존재를 인식하는 인식론 자체가 공격적이고 정복적이다. 대표적인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사물, 존재와 사건을 인식하는 4원인, 형상인, 목적인, 질료인, 운동인을 제시했다. 여기서 원인은 아이티아인데 법정에서 신문과 공격을 뜻하는 말이다. 존재와 사물을 인식할 때 형사가 취조하고 신문하듯이 “네 정체가 무엇이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성분이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였느냐?”고 따져 묻는 것이다. 서구의 인식론에는 인식대상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없다.

둘째 그리스 철학은 비신화화, 신화비판에서 시작했다. 그리스 철학은 자연 현상과 역사 사건에 대한 인식에서 신의 개입이나 기적을 배제하고 자연 현상과 역사 사건들의 인과 관계를 밝히고 객관적 항구적 법칙성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리스 철학은 처음부터 이성적 과학적 성격을 지녔다. 최근에는 그리스철학이 처음부터 신비적 요소를 지녔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그리스철학에서는 물질과 생명과 정신의 실체와 원리, 성격을 밝히려 했지, 신의 창조, 변혁의지가 철학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철학에서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수준 낮은 신이 대장장이처럼 재료를 가지고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창조자 신과 창조 자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인간정신인 이성이 파악한 인간과 세계의 불멸하는 항구적 원리가 훨씬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스철학은 인간이성인 로고스를 인간의 본질과 본성으로 볼 뿐 아니라 국가와 역사, 우주와 신의 본질과 본성이라고 보았다. 인간이성의 작용인 로고스를 우주와 신, 국가와 역사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서구근대철학에서는 이성이 주로 인식론적 기능을 한다면 그리스철학에서는 인식론적 기능뿐 아니라 존재론적 구실을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이성적 대처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주어진 조건에 체념하고 순응하거나 조정을 통해 조건을 완화하려고 했지 주어진 조건을 초월하거나 전적으로 변혁하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조건들에 속박되었기 때문에 우연[운명]과 필연[법칙]이 일치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자연적 위력들이 신들로 표상되었다. 위력적인 타자, 주어진 조건들을 이성능력인 로고스를 통해서 소통하고 설득하려고 했다. 타자, 현실, 조건을 이성적으로 로고스적으로 조종하고 움직이려 했다. 경영하려고 했다. 자아와 타자, 우주와 정신세계가 로고스적으로 질서지워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의 사유는 공간적 폐쇄성과 시간적 영원성을 강조함으로써 닫힌 원운동에 머물렀다.

그리스철학이 이처럼 인간의 로고스 안에 머물렀기 때문에 로고스의 인식대상인 물질현상과 우주세계 그리고 로고스의 인식내용인 관념, 이데아의 세계, 실체와 법칙, 논리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철학은 주어진 조건에 충실한 사유였다. 언제나 주어진 재료, 생각, 의지(행위)로써 일과 사물이 제작되고 생성된다. 따라서 그리스철학에서는 주어진 현실, 조건, 재료 없이 이루어지는 창조, 다시 말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사상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주어진 물질세계(자연 우주 현실)와 인간이성에 의해 파악된 이상 세계(이데아와 관념의 세계, 원리, 법칙, 이론의 세계)가 탐구될 뿐 순수한 주체 ‘나’의 절대적 초월적 자유와 의지를 말하지 않았다. 주어진 현실과 조건을 혁명적으로 변혁하거나 초월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고 맞추어 유리하고 현명하게 대처해가자는 생각이었다.
플라톤에게서 인간의 덕은 “적극적인 탁월성의 성취요, 인간의 온갖 능력이 이상적으로 발휘되어 완성에 도달함”을 뜻한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네 가지 덕을 말했다. 지혜는 국가의 궁극적 목적, 이상적 가치에 대한 지식이며, 용기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향락에의 탐닉을 물리치는 견고함이며, 절제는 강자와 약자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덕이며 균형의 원리이다. 정의는 이 세 가지 덕이 함께 모여서 이루게 될 절정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세 계급은 영혼의 세 부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생산자 계급의 욕망은 절제의 덕과 상응하고 전사 계급의 기개는 용기의 덕과 상응하고 지배계급의 이성은 지혜의 덕과 상응한다. 인간 영혼의 최고의 덕은 이성의 능력에 있다.

이러한 로고스 중심의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공격적 인식론의 반성이다. 초월적 차원, 신을 배제하고 인식대상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없는 공격적 분석적 인식론이 과학을 위해 필요하나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인식론이 과학과 기술을 자연과 인식대상에 대해서 적대적 공격적 정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태계패괴와 공동체 파괴는 이런 인식론에서 나온 게 아닌가? 인식대상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지닌 인식론이 과학을 이끌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임지순 교수가 지난 해 큰 발명을 할 때 기도를 열심히 했다고 하는데 발명에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발명을 위해서도 영감이 필요하고 인식대상에 대한 감정이입(感情移入)과 존중,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분석적이고 지배적인 이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그리스 철학은 사회정치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그리스철학은 그리스인들이 비교적 안정된 조건 속에서 살았음을 뜻한다. 제국주의적으로 정복자로서 식민지와 노예들을 통치하고 경영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더욱 그렇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산들에 둘러싸여 서로 고립된 작은 도시국가들 안에서 자유민들로서 안정되고 독립된 삶을 사는 그들에게는 혁명적 초월적 의지와 사고를 가질 필요가 없고 주어진 현실과 조건에 맞추어 지혜롭고 평화롭게 이성적으로 사는 일이 중요했다.


2) 하나님의 창조와 주체성의 진리

이에 반해 성경에서는 주체성의 진리가 강조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떠돌이요, 종살이하는 억눌린 백성이며 패배자요 희생자였다. 이들은 결코 불의하고 잔혹한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기보다 이 조건을 돌파하고 새롭게 창조하고 초월해야 했다. 따라서 현실을 변혁하고 돌파하는 의지, 주체가 강조된다. 이렇게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민중의 고난의 상황에서는 단순히 사물과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데 머물 수 없고, 현실의 감추어진 이면을 꿰뚫어보고, 현실을 변혁하고 넘어서는 실천적 의지와 행동이 요구된다. 이들에게서 창조 신앙이 나왔다. 이들의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 “빛이 있어라!”고 명령하니 없었던 빛이 생겨났다. “육지와 바다가 갈라지라!” 하니 그렇게 되었다.

자연과 물질의 세계 이전에 관념과 법칙의 세계 이전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하시는 의지가 있었다. 의지의 주체가 있었다. 신의 창조는 주어진 현상과 존재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주어진 물질세계가 (그것이 하나의 점이라고 해도) 어떻게 변화되고 발전되고 전개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를 말하는 것은 주어진 물질세계 이전에 그 세계가 존재하고 작용하기 이전에 없음과 빔 속에서 그것을 있게 하고 움직이는 의지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와 운동의 동기와 와 목적, 근거와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물질과 현상 이전에 주어진 조건과 현실을 창조하고 변혁하고 초월하는 정신과 의지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우주 위에 우주의 중심에 자유로운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얼, 영, 정신인 주체가 우주의 주인으로서 있다!
이런 주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주체가 없다고 생각하면 우주 전체가 캄캄하고 황막하여 죽은 것 같은데 이 우주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면 우주 전체가 살아 생동하고 나의 몸과 맘이 우주 전체와 하나로 이어져 소통하는 것을 느낀다.

3) 이성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

우리의 생각, 감정, 의식, 판단에는 엄청난 편견과 폭력이 담겨 있다. 육체적 생존요구인 본능과 물질적 욕망에 이성이 사로잡히면 이성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한다. 자기에게 필요한 사물만 보이고 다른 것은 보지 못하기 쉽다. 또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크게 보이고 다른 것은 작게 보이거나 낮게 보인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편견에 차 있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 눈길에 이미 엄청난 폭력이 들어 있다. 사람이나 사물에 어떤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더라도, 단순히 바라보기만 해도 이미 엄청난 편견과 폭력의 죄를 지은 것이다. 바라보는 눈길 속에 이미 편견과 욕망과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편협한 가치관이나 선입견이 우리의 눈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라봄의 폭력’이라고 한다. 사물이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깨닫고 해탈한 이들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한다. 산을 산으로 물은 물로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모든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산을 산으로 볼 수 있고 산을 산으로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다.
우리의 이성과 의지에는 욕망과 편견, 폭력과 왜곡이 들어 있다. 학문적인 사유나 실천적인 행위에도 욕망과 편견이 스며 있다. 우리의 의지와 행위는 위선에 흐르기 쉽고, 이성적 사유와 학문적 논의는 진리와 진상을 왜곡하기 쉽다. 논리와 개념에 충실한 학문이 삶과 현실의 깊은 내면과 진실을 보지 못하고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논의에 머물기 쉽다. 삶과 현실을 깊고 전체적으로 보려면 이성이 본능과 사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성이 본능적 욕망과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영성과 결합하여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성보다 높은 영의 인도를 받을 때 이성은 현실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깊고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이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뵈었을 때 내게 이르셨다. “큰 학문을 하시오. 사람에게 본능과 이성과 영성이 있는데 이성이 본능의 지배를 받지 말고 영에 이끌리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본능과 이성과 영성을 아우르는 큰 학문을 하게 됩니다.” 이성과 의지가 본능에 휘둘리고, 악마에게 봉사하면 악마의 창녀가 된다고 루터는 말했다. 이것은 이성에 대한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비판이었다.


4) 영혼과 물질의 해방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지나치게 돈을 사랑하는 데 있다. 무슨 이념과 구실을 내세워도 그 속에는 돈에 대한 사랑과 집착, 숭배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힘이 없고 불신과 미움을 당한다. 오늘 한국교회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오늘 한국교회에 예수님이 살아 있다면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창조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숭배하지 않고 돈을 돈이 되게 한다. 영혼은 영혼이 되고 물질은 물질이 되어야 한다. 이성과 의지가 물욕에 사로잡히면 욕망하는 물질이 신격화, 우상화하여 절대화된다. 이것은 주체인 이성과 의지를 물화시킬 뿐 아니라 물질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돈을 돈으로 물질을 물질로 소중하게 다루는 윤리가 요청된다.

성육신의 진리는 영혼과 물질의 실현과 완성을 지향한다. 영혼은 영혼답게 물질은 물질답게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오늘날 물질의 깊은 신비가 드러나며 엄청난 힘과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물질 속에 놀라운 보물을 숨겨놓고 인간에게 찾아서 적절하게 쓰라고 하신 것 같다. 모든 물질은 우주적 깊이와 신비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닿아 있다.
물질과 영혼이 구별되어야 각자 완성될 수 있다. 물질은 인과관계의 법칙을 따르고 영혼은 자기 안에 원인을 가지고 있다. 현대과학에서 물질에 대한 정의가 어려워지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 입자와 파동, 물질과 에너지, 정신과 물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물질은 인과관계와 법칙으로 설명된다. 모든 물질은 서로 인과관계 속에 있다. 현대과학에서 불확실성이론을 말하는 양자역학의 영역에서도 물질현상은 확률적이지만 원인결과의 합법칙성이 인정된다. 인체의 신경세포나 생리현상에서는 고전물리학의 인과율이 적용된다. 물질은 존재와 활동의 원인, 이유, 까닭이 밖에 타자에게 있다. 프리고진은 미시적 요동의 결과로 거시적으로 안정된 새로운 구조가 생성됨으로써 물질의 자기조직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어떤 동인이 주어질 때 자기조직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비가역적이지만 물질의 인과관계는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물질과 현상을 움직이는 주체 ‘나’, 의식적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 정신, 영혼은 물질적 구조, 신체, 유기체 안에 있으면서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다. 물질 현상은 다원적이고 다양하며 복잡하지만 주체인 영혼은 하나 됨(통일)을 추구한다. 모든 영혼은 내적 통일성과 큰 하나의 전체성을 지향한다. 주체인 영혼은 내적 통일. 초점을 가짐으로써 존재한다.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전체는 물질과 이성의 빛이 들어갈 수 없다. 하나 또는 전체는 분석이나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이며 전체를 지향하고 하나와 전체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주체(영혼)는 존재와 활동의 까닭을 자기 안에 가진다. 제가 저의 까닭이다. 신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와 활동의 근원적인 이유이고 까닭이다. 인과관계가 끊어지는 자리이고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생성되는 자리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절대 자유하고 모든 것에 대해 무한 책임지는 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모든 물질과 관념의 인과관계와 법칙과 논리와 원리를 넘어서 아무 것도 매일 것이 없는 빔과 없음의 자리에서 주체인 ‘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인격적 주체와 의지의 자유가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모든 생명과 정신, 역사와 사회의 진정한 변화와 창조는 인격적 주체의 자유의지에서 온다. 물질의 인과관계와 법칙은 인간 로고스에 의해서 발견되고 설명될 수 있으나 창조와 변화의 주체인 나의 자유 의지는 신의 말씀 안에서 생겨나고 움직인다.

성경에서 말씀은 신의 명령, 계명을 뜻하고 말씀, 명령의 내용은 신의 사랑과 정의이다. 사랑은 주체인 생명의 근원이고 본질이며 힘이다. 사랑 안에서 생명과 생명의 주체인 영혼은 생기고 자라고 완성된다. 정의는 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더불어 자라고 실현되고 완성되는 질서이고 관계방식이며 구조이다. 신의 사랑과 의의 말씀 안에서 ‘나’는 창조되고 자라고 완성된다. 말씀 안에서 영혼이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물질은 물질답게 실현되고 완성된다.

5) 하나님의 이름--야훼 “나다!”

히브리인들의 창조자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만물과 뭇 생명의 근원이고 주체이므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영원한 주체, 거룩한 영, 얼, ‘참된 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 영, 혼이 ‘나’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 생명, 정신을 움직이고 진화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주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주었다. 주체를 상실하고 종살이하는 백성에게 참된 주체를 회복시키라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였다. “스스로 있는 자” 다시 말해 “나는 나다.”라고 하였다.(출3,13~4) 이것은 여호와, 야훼, 에흐예 에흐예라는 히브리어의 풀이말이다. I am that I am. I am! 가장 정확한 풀이는 그저 “나다!”이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이 자기 이름 말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영원한 주체, 영원한 ‘나’이신 하나님은 모든 물질과 존재, 생명과 정신의 창조자적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연현상이나 사건, 개별적 존재자들처럼 이름 지을 수 있는 한정된 대상이 아니다.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고 한정지을 수 없는 영원한 궁극적인 주체, 자유, 의지일 뿐이다. 모든 것을 살리고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자라게 하고 완성하는 주체이고 근원일 뿐이다. 그래서 “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나다!”라고 자신을 알리는 역사의 자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국의 불의와 억압으로 고통당하며 종살이하는 상황이다. 짓밟힌 민중이 주체를 상실하고 고통 받는 자리에 하나님은 “나다!”하며 영원한 창조와 역사변혁의 주체로 나서신다.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이 편집되고 완성된 자리도 바벨론에서 종살이 하던 상황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나다!”하면서 역사 속으로, 민중현장으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어떤 절망적인 조건과 상황도 희망으로 바꾸고, 돌무덤을 열어젖히고 부활의 생명으로 채워주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불신을 신앙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신이다.

3 요한복음 풀이

강대국에 의해 패배당하고 정복당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경전화한 것은 그리스철학이 승리한 정복자의 나라에서 신의 개입을 배제하고 형성된 것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 성경이 실패하고 정복당한 희생자의 진리라면 그리스철학은 노예들의 희생 위에서 안정된 삶을 사는 자유민의 진리이다.

승리한 자유민의 진리와 패배한 희생자의 진리가 만나서 화해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류사의 목적이고 완성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좌절하고 패배한 민중의 상황을 드러내며 기독교 진리는 희생자의 진리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요한복음에서 신의 사랑과 의, 말씀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은 매우 과감한 것이다. 역사적 화해를 시도한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된 로고스는 그리스철학에서 쓰이는 로고스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이성과 그 이성의 내적 작용을 나타내는 로고스로써 성경을 말씀을 번역한 것은 매우 모험적인 일이었다. 신의 사랑과 의의 말씀이 인간 로고스와 결합된 것이다. 해방의 말씀이 정복자의 이성과 융합되었다.

이제 요한복음의 말씀에로 돌아가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
요한복음은 그리스 철학의 핵심어 로고스를 끌어들이면서도 구약성경의 핵심사상을 부각시킨다. 창조의 말씀이 세상을 빛과 생명으로 채운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의 첫머리는 구약성경의 중심사상을 강조하였다. 구약성경은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로서 긍정했다. 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가 세상을 멸시한 것과는 대조된다.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의 중심과 그리스철학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로고스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그리스철학에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로고스는 창조나 생성의 의미를 가질 수 없고, 사랑이나 은혜를 나타낼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는 창조의 주체이고 근거이며 생명과 빛, 은혜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1) 말씀에 매달린 세계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의 깊음 위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 우주와 자연과 인간, 정신과 관념과 신(천사)들의 존재 이전에,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동격이고 동질이다. 모든 물질세계의 존재에 앞서서, 무(無)와 공(空)의 심연을 넘어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가 천명(天命)이 하늘의 뜻이 우주보다 먼저 있다. 물질세계를 초월한 공과 무를 넘어서 말씀이 있다. 말씀에서, 사랑과 의에서 우주물질세계가 나왔다. 우주만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말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우주만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말씀에 매달려서 존재한다. 신의 사랑과 의가 우주만물의 창조적 근원이고 지탱하는 근거이고 힘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혼돈과 공허의 깊음을 넘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말씀이 아니면 우주세계는 혼돈과 공허의 심연 속으로 몰락한다. 말씀이 없으면 우주 세상은 몰락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인데 사랑과 정의 안에서 우주세계는 창조되고 지탱되고 발전하고 진화하며 실현되고 완성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없으면 우주 생명 세계가 생겨나지 않았고 존재할 수 없고 완성되고 목적에 이를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순전히 자연과학적 성찰로는 확인될 수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안에서 우주만물과 생명, 정신이 창조되고 생성되며 자라고 완성된다는 것을 우리의 영혼은 믿고 느끼고 고백할 수 있다. 인간의 지나친 탐욕과 불의가 자연생태계를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파괴하는 현실은 생태계가 사랑과 정의 안에서 지탱될 수 있을 확인해 준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곧게 되고 하나 됨에 이른다. 초월자 하나님, 우주의 ‘나’는 모든 다양하고 복잡한 물질세계를 초월한 하나, 통일이다. 영혼의 나는 통일된 초점을 가질 때 비로소 힘이 나고 생동한다. 생명과 정신은 말씀이 없으면 혼돈과 공허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말씀에 의해서만 ‘나’는 혼돈과 공허를 딛고 하나님께로 솟아오를 수 있다. 영혼은 하나 됨(통일)에서 살아나고 힘이 난다. 절대 하나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영혼은 생동한다.

신이 주권적 자유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변혁한다. 이것은 주어진 조건에 안주할 수 없었던, 불의와 억압 속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신앙이다. 주어진 현실의 조건을 돌파하고 혁신하고 초월하려는 강력한 의지와 신앙에서 나온 진리다. 조건을 초월하고 변혁하고 창조하는 주체인 ‘나’의 자유와 진리가 성경에서 제시된다. 신의 명령, 말씀, 의지가 사랑과 정의가 불의하고 잔인한 현실을 변혁하고 초월한다. 불의와 억압의 현실은 혼돈과 공허의 심연이며, 모든 생명과 정신이 빠져드는 멸망과 쇠퇴의 늪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양한 복잡한 물질세계를 넘어서 한 분 하나님에게 이른다. 초월, 절대, 하나는 같은 말이다. 이성과 물질의 빛이 닿을 수 없는 절대 초월의 자리는 나뉠 수 없는 전체 하나의 자리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일자(一者)는 다양하고 복잡한 다수의 세계를 넘어서 조화와 일치를 말한다. 현실세계의 분리, 갈등, 대립, 모순을 은폐하거나 위장하는 관념론이 되기 쉽다. 유일신 하나님이 제국주의적 정치권력과 결합되면 다양성과 차이를 억압하는 불의와 죄악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자 하나님은 불의하고 악한 현실을 사랑과 정의 안에서 창조하고 해방하는 하나님이다. 없음과 빔에서 창조한 하나님은 절대 자유, 절대 주체로서 생명과 정신의 본성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자이고 억압과 불의에서 해방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의 토대이고 근거이다. 함석헌은 땅이 있어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하늘이 열려서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땅을 얻기 전에 먼저 마음속에서 하늘이 열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 말씀을 받아야만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마음속에서 하늘과 통하는 말씀이 없으면 나라는 무너지고 멸망한다.

2) 말씀을 받은 신의 자녀

세상에서는 말씀을 모르고 영접하지 않으나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 우리의 고향, 집, 본적은 하나님 계신 하늘이다. 땅에 살되 하늘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뿌리가 하늘에 있으니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나그네이고 하늘이 고향이라고 하였다.

요한복음은 물질과 욕망의 지배에서 ‘나’를 해방한다. 감정과 본능, 욕망과 집착에 휘둘리는 나는 자유로운 나가 아니다. 그것은 물질화된 나, 물질의 종이 된 나일뿐이다. 물질이 된 나를 놓아버림으로써 내가 없어짐으로써 죽음으로써 말씀으로 사는 나가 살아나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에 매인 육적인 나가 죽고 영의 나로 얼의 나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밀알처럼, 씨알처럼 깨지고 부서지고 녹아지고 흙 속에 버려져서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나를 놓는 일이다. 물질로부터 나를 놓아버림이 믿음이고 영으로 사는 길이다. 참 나가 아닌 나, 감정, 물질에 휘둘리는 나를 놓아버림이 믿음이다. 사랑할 수 있는 나,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나, 자유로운 나가 되기까지 나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의 눈에서 편견의 들보가 뽑힐 때까지, 이기심과 탐욕의 들보가 빠질 때까지 나를 놓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하여 진실을 보고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사랑이 솟을 때까지 정의의 실천을 하는 용기가 나올 때까지 나를 놓는 것이다. 함석헌은 아주 작은 티끌처럼 먼지처럼 작은 ‘나’, 사심이 눈동자를 가리면 온 세상이 캄캄해진다고 했다. 사심에 물든 나, 티끌 같은 나만 떼어버리면, 나의 이해관계만 빼버리면 세상이, 모든 일이 대낮처럼 밝아진다.

기독교에서는 나를 부정하고 버리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죽고 버림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고 부활한다고 한다. 바울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역사한다고 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함께 나는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말씀과 소통하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말씀으로 물질을 넘어서는 때 비로소 영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 사랑과 의 안에서 주체적인 자아가 창조되고 자라나고 실현되고 완성된다. 말씀이 우주의 꼭대기, 근원, 목적이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맨 처음의 창조에 참여한다. 우주 이전의 자리, 우주의 꼭대기에 서게 된다. 말씀이 우주보다 먼저이고 우주보다 높고 우주보다 크다. 말씀을 품은 사람은 우주를 품은 사람이고 우주보다 크고 존귀한 존재이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말씀을 받은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말씀은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마음이고 뜻이다.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어버이의 마음으로 산다. 하나님은 인간과 우주를 어버이 마음으로 사랑하고 보살핀다. 마치 아기를 돌보고 기르는 심정으로 대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창조자 어버이의 마음을 지닌다. 우주만물도 자라나는 아기의 생명처럼 정성으로 알뜰살뜰 보살펴야 한다.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생명사랑의 마음, 영혼과 정신을 돌보고 살리는 어버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창조자 하나님의 마음, 자녀들의 마음이다. 상처받고 죽어가는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어버이 마음이다. 이 마음 없이는 우주만물, 자연생명세계의 주인노릇을 할 수 없다.

3) 육신이 된 말씀: 흙(물질) 속에 묻힌 하늘(주체, 영혼)


“(하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의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늘이 땅 속으로 들어오고, 말씀이 육신 속으로 들어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이다. 주역에서 지천태괘(地天泰卦)를 길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괘라고 했다. 하늘이 땅 위에 있으면 흉하고 위태롭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이 겸허하게 땅 속으로 들어오면 평화롭고 형통하다고 했다. 성육신과 지천태는 통한다.
그리스철학에서는 하늘의 이데아를 존중하고 땅의 현상은 무상하고 덧없는 것으로 낮추어본다. 위로 올라가는 것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늘이 땅 속으로 내려온 것을 강조한다. 물질 속에 숨은 말씀이다. 질그릇 같은 몸에 보화인 그리스도의 생명, 영이 들어 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성육신 인카네이션이라고 하는데, 플라톤철학에서는 인카네이션(육신을 입음)이 이데아 또는 형상이 물질이나 육체에 부분적으로 관련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데아가 물체와 전적으로 동일화되는 것을 뜻하지 않고 물체에 성격을 부여하는 정도로만 관련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전적으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와 몸, 말씀과 세상을 일치시키면서도 대립시킨다. 하나님과 혈통, 육정을 대립시킨다. 세상과 물질을 존중하나 세상과 물질의 악한 원리와 경향은 부정한다. 요한복음은 물질과 몸을 전적으로 긍정하면서 물질과 몸의 절대화, 우상화, 악한 원리는 철저히 부정한다. 일원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물질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이다. 물질세계를 완성하고 영광스럽게 하고 빛나게 하려고 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끝까지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몸으로 부활하고 다시 세상으로 오는 하나님이다. 이 세상에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가득하다. 권력이나 부, 명예가 아니고 말씀으로 우뚝 서게 된다. 말씀은 참으로 영광스럽게 빛나게 우뚝 서게 한다. 사랑과 의가 생명이고 빛이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고 참 자유이고 참 생명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앙은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이 물질을 더럽게 보고 버릴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은 세상을 생명과 빛으로 채운다. 세상을 악마에게 내어주고 세상을 떠나자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병을 고치고 밥을 나누어먹고 눈물을 흘리며 찬미를 부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한다. 물질과 세상을 악마에게 죄악과 멸망의 세력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와 다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말씀이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신의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유영모는 노자가 말하는 진인, 참 사람의 최고 높은 경지인 화광동진(和光同塵)을 햇볕에 그을린 농부의 얼굴에서 보았다. 흙 속에 묻혀 사는 농부에게 하늘의 진리, 최고 가치가 있다. 노자에 대한 이런 해석은 다른 데서 찾아 볼 수 없다. 말구유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보고 어린이와 민중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성경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농부에게서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은 권력욕, 소유욕, 명예욕, 물욕과 색욕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삶의 바닥에 선 이다. 인생의 바닥에 설 때 십자가에서 부활생명, 하나님의 사랑, 구원을 본다. 거기서 물질, 육신과 함께 썩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4 유영모의 자유로운 삶: 맘대로, 몸 되게

1) 맘대로 몸 되게

이 세상에서 초월과 주체는 하나 됨, 통일을 뜻한다. 말씀 안에서만 사랑과 의 안에서만 하나 됨과 통일에 이를 수 있고 통일되어야 초점을 가지고 영혼이 생동한다. 그래야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으며 정의를 행할 수 있다. 말씀 안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 됨의 통일의 주체가 된다. 사랑과 의 안에 있어야 통일되고 통일되면 사랑과 의를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에 붙잡혀 있다. 물질의 포로가 되어 있다. 모든 욕망, 명예욕, 권력욕, 지배욕은 다 물질에 잡힌 것이다. 물질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물질을 절대화, 우상화하여 거기 사로잡히면 물질세계 전체를 혼란과 파멸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물질에 잡히지 않아야 물질을 물질로 존중하고 물질이 물성에 따라 실현되고 완성되게 할 수 있다. 모든 욕심은 바깥의 물질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며 마음이 물질에 잡힌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능도 심리도 인과관계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의식도 욕망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심지어 우리의 어떤 선의도 이기심에 물들어 있다. 그런 한에서 물질적 인과관계와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에는 자유로운 ‘나’가 없다.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는 나,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힌 ‘나’는 자유로운 주체, 사랑과 의를 행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면 마음도 물질도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고 완성할 수 있다. 영혼은 물질적 인과관계의 모든 결정론에서 벗어나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맘과 마음의 집착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자연과 타인을 정복하거나 괴롭히지 않게 된다. 이 자유로운 삶의 경지를 다석은 ‘을 대로 하고, 몸은 몸대로 되게’로 표현한다. 다석의 ‘대로’는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식의 ‘맘대로’가 아니다. “서양에는 자연을 정복해야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데 동양에서는 그 따위 소리 않는다.” 반대로 “몸에 대해 부자연하게 간섭하지 말라...자연을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 노릇하고 몬은 몬들 절로 되게’!”하라는 것이다. 이러면 “만족한 세상 온다.”는 것이다.(하게 되게. 1, 809-12)
다석의 ‘대로’는 욕심과 물질에 매이지 않은 ‘맘대로’다. 욕심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산을 옮기는 것보다 물욕과 자기애에 뿌리박힌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더 어렵다. 자기를 제물로 불태우고, 믿음과 진리, 영과 말씀으로 움직일 때 ‘스스로’, ‘절로’, ‘맘대로’가 된다.
대로 절로의 길은 허공 속에 있다. “道는 길이고 허공이 진리다.”(주기도. 1. 837-40) 그 길은 집착 없는 삶에 이른다. “절대 집착함이 없이 살아간다. 예술가는 得意作 속에 거주하거나 자족하지 않으며 시인이 自成品 속에 해골을 눕힐 수는 없다. 종교가가 자설법 속에 열반할 수는 없을 것이다...작품 시집 업적 경전 보감 의사당, 교회 사회 등등은 色界의 그림자다.”(빛. 1,853-6) 자신의 생명, 몸, 영혼, 생각과 업적,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불살라 제사 지내고 하나님을 향해 솟아올라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태우고 솟아오를 때 맘대로 절로의 길에 이른다.

2) 물질과 주체의 완성

정이천과 주희는 격물을 이치에 대한 탐구로 보고 왕양명은 마음의 뜻과 생각을 바로 잡는 것으로 보았다. 격물에 대한 논의에서 전자가 사물과 인간본성의 이치를 탐구하고 후자가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에 힘썼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다석은 사물과 타인과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격물을 이해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서 “진리를 파악해서 생명을 완성시킨다. 물성을 알아서 그것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물건을 완성시켜야 나도 완성된다.”고 했다.(여오. 1,831)
‘나’의 호기심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물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 존재와 본성이 완성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기심이나 욕심을 가지고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덕(속알)이 영근 사람은 물성과 인간성을 알아서 완성시킨다. 성숙한 사람이 물성을 완성시킬 수 있다. 성숙해야 ‘좋고 싫고’하는 주관적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편견에서 벗어나야 모든 일이 법도대로 처리되고 사람의 삶이 올바르게 된다. 그리고 물건을 완성시켜야 나도 완성된다. 남을 완성시켜야 나도 완성된다는 것이다. 물성의 완성과 ‘나’의 완성은 순환적으로 맞물려 있다.
온갖 시비판단을 넘어서서 물성과 인간을 완성시키는 일은 “나쁘게 가는 마음을 참고 어질게 가는 마음을 살려 모두를 잘 살게 하자”는 신의 마음에 이르러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가야 편견을 넘어서고 만물을 살릴 수 있다. 다석은 격물치지를 서로를 완성시키는 생명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격물치지의 근거와 궁극적인 목표를 하나님에게 두었다. 유영모는 하나님 안에서 물성을 완성시킬 것을 말한다.
이런 모든 편견과 감정,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신의 사랑과 정의의 말씀이다. 말씀 안에서 비로소 물질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고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나’에 이를 수 있다. 신의 말씀 안에서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나는 나로서 자유로운 나가 될 수 있다.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날수록 생명과 정신의 주체인 ‘나’가 실현되고 완성된다. 말씀 안에서 나의 감성과 지성과 영성이 자유롭게 발현되고 실현되고 완성된다. 하나님께 갈수록 예술가의 감성과 과학자의 지성과 신앙인의 영성이 발휘되고 실현되고 완성된다. 유영모는 세상에서 솟아올라 하나님께 나아갈수록 나아지고 나아간다고 했다.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옳은 것이고 나아지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로 올라갈 때, 물질은 물성대로 되게 하고 영혼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다. 이 육신을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다. 물질과 이성의 빛이 닿을 수 없는 참 하나의 전체, 절대 자유의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영생이다. 창조의 말씀을 잡고 사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며, 물성을 물성대로 완성하는 길이다.


5 큰 하나의 종합

창조의 말씀과 인간 이성의 로고스는 결합될 수 없는가? 유영모는 이성적인 사유로써 과학적인 추리를 하다 보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영감에 이른다고 했다.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지듯이 가다가 날아오르듯이 추리를 하다가 영혼의 진리인 영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생각을 하다보면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또 생각하게 된다.”고 함으로써 이성적 사유와 영성적 사유를 결합했다. 그리스철학의 이성적 과학적 사유와 성경의 영성적 창조적 사유가 만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의 시대와는 달리 기독교 정신과 그리스철학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신문화 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간다. 한국사회는 전통종교인 불교와 유교의 영향이 여전히 강력하고 기독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의 이성적 과학적 사고도 지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정신문화, 기독교 정신. 그리스의 이성 중심적 철학에 근원을 둔 서구의 과학적 합리적 정신과 사고가 오늘 우리의 정신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생각과 정신에는 이 세 가지 정신문화의 흐름이 합류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정신문화는 도(道), 길로 표현되고, 그리스 철학에 근원을 둔 서구철학의 핵심어는 로고스, 이성이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어는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dabar)이다.

중국 성경은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를 “도가 사람의 몸이 되었다.”(道成人身)고 번역했다. 도는 생명과 정신이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존재와 활동의 과정이며 원리이다. 오랜 세월 농본적 사회질서 속에 살았던 동아시아에서는 자연생명질서와 사회생활의 일치와 조화 속에서 살았고 자연생명과 사회의 삶이 함께 실현되고 완성되는 과정과 원리를 도라고 했다. 도는 삶의 본성과 원리이며, 삶의 본성이 실현되고 완성되는 과정이며 목적이기도 하다. 도는 생명의 정신의 본성이고 과정이며 목적을 나타내는 포괄적 개념이다. 서양에서 길 way이 목적과 구별되는 과정,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과 구별된다.

중용(中庸) 첫머리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했다. 하늘 명령, 하나님 말씀이 인간과 만물의 본성이고, 이 본성을 따름이 길(道)이고, 길을 닦아나가는 것이 가르침이라고 했다. 성리학에서는 하늘명령이 인간의 본성인데 본성은 사랑과 의(仁義)이며 이것이 이(理)라고 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理)에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사랑과 의가 내포되어 있다. 서양의 로고스에는 서로 소통하고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법칙과 질서가 있으나 사랑과 정의가 들어 있지는 않다. 말씀이 주체(영혼)의 진리라면 도는 전일적 관계적 생명의 진리이고 로고스는 법칙적 논리적 과학의 이해와 소통, 설득의 진리이다.

로고스, 말씀, 도(道)가 오늘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규정하는 핵심어이다. 유영모·함석헌은 성경을 볼 때 이 세 핵심어, 범주를 가지고 보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세 문명이 합류하고 있다. 로고스와 말씀과 도가 만나고 있다. 세 문명이 합류하는 방식과 원리를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에서 찾았다. ‘한’은 개체와 전체를 아우르는 큰 하나이며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대종합의 정신이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곧음과 초월을 나타내고 그리스철학의 로고스는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보편적 이성을 나타내며, 동아시아의 도는 천지인의 조화와 합일에 이르는 길과 원리를 뜻한다. 한의 정신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융합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넘어 큰 평화바다로 나가는 길을 열 수 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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