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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와 뱀의 유혹

박재순 (서울북노회,,목사) 2010-03-23 (화) 18:52 12년전 7605  
선악과와 뱀의 유혹; 선과 악의 가운데 길(中道)

오늘 우리 사회는 한 마디로 길 잃은 사회, 길 없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땅 위에 난 길이야 잘 닦여 있지만 사람이 걸어야 할 떳떳한 길은 막혀 있는 것 같다. 길을 잃은 사회다. 현대인들이 누구나 하는 말은 “바쁘다!”는 것이다. 다 바삐 달려가는데 목적지를 알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다 함께 바삐 가는 길이 망할 길이고 죽을 길이라면 불행이고 비극이다. 오늘 이 시대는 길을 잃고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닐까?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라는 어머니의 소리에 화가 나서 어머니를 죽인 소년이 있다. 추석에 친정에 먼저 가나, 시대에 먼저 가나 아내와 다투던 30대의 사내가 17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삶의 길이 막혔으니까 이렇게 된다. 삶의 길을 알고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런 일로 그렇게 죽을 수 없다.
오랜 민주화 운동 끝에 어렵게 국민의 정부, 국민 참여의 정부를 세웠는데 민주정부 10년만에 정당도 정부도 길을 잃은 것 같다. 국민들이 그렇게 열렬히 지지하고 지원했는데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의 마음을 얻는 길이 막혀 버렸다. 국민에게 통하는 길을 잃어버렸다. 국민들도 길을 잃은 것은 마찬 가지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는데 도덕이나 정의에는 관심 없이 경제에만 매달려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길이 열리는 듯, 하면서도 길이 막혀 있다. 동아시아에도 평화와 협력의 새로운 길이 열릴 것 같으면서 열리지 않고 있다.
우리 속에서부터 큰 길이 확 뚫려야 한다. 유영모 선생님 말씀대로 속이 줄곧 뚫려야 한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성령과 소통하는 길이 뚫려야 이 사회와 역사에 큰 길이 열린다. 어디서 길을 찾나? 예수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길이다.”고 한 예수가 없어지고 사라졌으니 길이 사라지고 길을 잃은 것 아닌가? 중국 성경에서는 “道成人身”(길이 사람 몸이 되었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길은 예수의 삶과 정신 속에 있다.

“나는 길이다.”고 말한 것은 예수 개인이 길이라는 말이 아니라 ‘나’=길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道는 생명의 본성이 실현되는 과정과 질서, 원리와 목적을 뜻하고 道理, 道義를 뜻한다. 길은 생명이다. 길 가는 이와 길이 하나이고 삶과 길도 하나이다. 길은 밖에 있지 않고 나의 삶에서 뚫려야 한다. 남이 간 길은 내 길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나’와 내가 하나로 됨이다.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와 내가 하나로 되는 사건을 뜻한다. 유영모는 중용을 ‘줄곧 뚫림’이라고 했다. 속이 뚫려서 성령과 소통하면 하나님에게 가는 길, 하나 되는 길이 열린다. 하늘과 나와 땅이 하나로 뚫리고 나와 너, 사회가 하나로 뚫린다.

1 예수의 물음: 살리려 하느냐 죽이려 하느냐?

오늘 교회는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잃은 교회가 되었다. 길 없는 교회, 길 잃은 교회가 된 것이다. 어디서 길을 찾을까? 길은 어디서 열리는가? 바리새파, 사두개파의 율법학자들은 길을 찾으려고 교리, 이론, 관념에 매달렸고, 성경의 문자풀이에 집착했다. 그러나 예수는 삶 속에서 길을 찾았다.
이것이 예수의 길을 여는 물음이다. 살리려느냐, 죽이려느냐는 물음에서 삶의 길이 열린다. 삶 밖에 길이 따로 없다. 삶에서 길이 생겨나온다. 삶, 삶의 주체인 나, 길은 하나다. 나와 삶이 뚜렷하면 길이 뚜렷이 드러난다. 내 속에서 내가 뚫려야 길이 생긴다. 나 밖에 삶 밖에 따로 길이 없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가 우리 속에 들어와야 우리 속에 예수의 길이 나지 우리 밖에 있는 예수는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고 우리의 길이 될 수 없다.

오늘 교회는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가 되었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처럼 예수의 삶과 정신을 살려고 했다. 오늘 교회가 예수의 교회라면 교회에 예수가 살아 있어야 하고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예수 없는 교회, 예수를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다.

예수의 삶과 정신이 무엇인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율법학자들이 성경의 본문에 집착하여 성경해석에 힘썼다면 예수는 오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성경책보다는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했다. 바리새파가 항상 모세가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물었다면 예수는 “모세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선포했다. 성경은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밝히는데 사용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하나님 나라란 말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고 키우고 힘 있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살리는 나라이다.
예수가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다.”고 하고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한 것도 오늘의 삶을 강조한 것이다. 또 예수가 세상을 떠나면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나보다 큰일을 할 것”이라고 한 것도 오늘의 삶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는 종교나 교리, 도덕의 관념에서 벗어나 삶의 현실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 여기의 현실에서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물었다. 예수는 병든 사람을 앞에 놓고 바리새파 사람에게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었다. 함석헌 선생이 이 대목을 가르치면서 “예수가 공자보다 확실히 깊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셨다. 예수는 오늘의 상황 속으로 들어갔으나 상황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과거의 상황도 오늘의 상황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참 생명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이 말은 우리의 삶의 근본문제 앞에 서게 하고, 우주생명의 중심에로 하나님 앞으로 이끈다. 이것만이 선이고 의이고 사랑이고 고귀하고 존귀한 것이다. 지금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의도, 지향이, 하려는 일이 또 하고 있는 일이 생명을 사람을 영혼을 살리는 일이냐, 죽이는 일이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살리려느냐 죽이려느냐? 이 물음이 참 물음이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물음도 참 물음이 아니고,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물음도 참 물음이 아니다. 생과 사, 존재과 비존재를 선택할 수 없다. 살까 말까 망설이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숨을 쉬는 한 이유 없이 무조건 살아야 한다. 생명(生命)은 말 그대로 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삶이나 존재에 집착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 존재는 없다가 있는 것이고 있다가 없어질 것이다. 또 살다가 죽을 것이다. 존재가 있다가 없어지는 허망한 것이고, 비존재, 허무와 공에서 변함없는 참 존재를 본다면 존재와 비존재의 기준도 잘못된 것이다. 살려는 자는 죽고 죽으려 하면 산다고 하면, 사느냐 죽느냐도 잘못된 물음이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에 빠지면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 내편을 살리기 위해 남의 편을 죽여야 한다.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도 없지만 선택하려고 하면 나와 내편이 살기 위해 남과 다른 편을 희생하고 죽여야 한다. 나와 우리의 생존이 목표가 되면 다른 모든 것은 희생시키고 죽이게 된다. 이것은 결국 서로 죽임의 길에 빠져드는 것이다.

살리려 하느냐 죽이려 하느냐 하는 물음은 생사의 문제를 넘어선 절대적인 물음 궁극적인 물음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생명의지를 따라서 나를 살리려는 이는 반드시 남도 살리고 원수도 살린다. 제도도 관계도 살린다. 죽음에로 이르는 미움과 노여움에 사로잡히면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려는 충동에 휘둘리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의지를 거스르게 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

생명은 겉으로 보면 나와 너, 그로 갈라져 있으나 속에서는 하나인 전체로 이어져 있다. 겉으로 보면 개체이지만 속에서 보면 생명은 우주 전체의 생명, 하나이고 전체인 생명과 이어져 있다. 버러지 한 마리가 꿈틀거려도 우주 전체의 생명이 감응하고 움직인다. 이것을 살리기 위해 저것을 죽인다는 것은 거짓된 생명관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욕심과 향락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죽이는 일이 있을 뿐이다. 내 몸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남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내 영혼과 전체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전쟁과 결투는 서로 죽이는 것이지 하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자리에서 보면 분명하다. 생명을 살리거나 죽이거나 어느 한쪽이다. 전체 생명, 우주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사랑하여 살리고 있는가 죽이고 있는가 어느 한쪽이다. 예수는 언제나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2 선과 악을 분별하는 바리새파적 지식의 폭력

예수와 달리 바리새파는 늘 성경구절, 교의, 종교 관념에 맞추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따졌다. 바리새파라는 말은 ‘분리’를 뜻하는데, 그 이름대로 이 사람은 의인, 저 사람은 죄인, 이 사람은 선인, 저 사람은 악인으로 갈라놓으려 했다. 그래서 당파심과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나머지, 잘나고 똑똑하고 경건한 사람, 건강하고 부유한 사람, 명망 있고 지체 높은 유력한 인사들을 높이고, 사회적으로 뒤쳐진 사람들을 멸시했다. 나의 생각과 지식과 관념으로 남을 평가하고 남에게 행동하는 것은 남의 영혼과 인격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고 왜곡이다. 바리새파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런 폭력을 저지른다.

바리새파는 선과 악에 대한 종교적 도덕적 율법적 지식과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사람을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으로 낙인찍었다. 누구를 선한 사람으로 아는 것도 폭력과 왜곡이고 악한 사람으로 아는 것도 그 사람의 존재, 영혼에 대한 폭력과 왜곡이다. 어떤 사람의 나의 잣대나 관념에 맞추어 선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첨이고 거짓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한 폭력이다. 사람에 대한 나의 편견, 고정관념 자체가 폭력이고 왜곡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이 왜 복잡하고 어려운가? 내 욕심이 개입되고 사회적 관계와 편견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식 자체, 생각 자체, 바라보는 눈길 자체가 폭력이다. 따라서 “바라봄의 폭력”이라고 한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자녀와 부모 사이에 앎과 관념의 폭력이 있다. 나의 앎과 관념의 틀에 남을 집어넣는 것은 엄청난 폭력이다. 지식과 고정관념은 사랑의 사귐,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자기와 남에게 폭력이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게 힘이다.”, “지식이 힘이다.”라고 했는데 앎이나 지식이 힘도 되지만 폭력이 되기도 한다. 아내나 남편 자녀와 부모, 친구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 폭력과 왜곡이 될 수 있다.

이런 편견과 왜곡이 당파심과 흑백논리가 서로 다른 종교문화의 만남에서 가장 예리하게 나타난다. 얼마 전에 한국기독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 가서 납치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 세계화 시대에 국경, 종교의 벽을 넘어 봉사하고 선교하는 일 좋다. 다른 종교문화권 여행을 통해 배우고 익히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남의 나라 남의 종교문화권에 갈 때는 섣부른 지식이나 경솔한 생각을 버리고 겸허하게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심, 조심 다가가야 한다. 특히 가난하고 약한 나라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가져야 한다. 서로 가까워져 친구가 된 다음에나 도울 수 있다.

오늘 날 문화와 종교의 벽을 넘는 해외 선교는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말로나 힘으로 선교하는 시대가 지났다. 정보와 지식이 없어서 예수의 이름을 몰라서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다른 나라에 선교하려면 국가권력의 장벽과 종교문화의 장벽을 함께 뚫어야 한다. 유럽의 경우에는 고등종교문화가 없고 국가권력의 장벽만 있었다. 처음에 국가의 박해가 심했으나 어느 시점에서 기독교가 제국의 안정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일본의 경우에는 국가권력의 벽에 부딪혀 기독교 선교가 좌절한 경우다. 인도의 경우에는 힘으로 국가권력의 벽은 뚫었으나 종교문화의 벽을 뚫지 못했다. 한국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국가권력과 종교문화의 벽이 허물어지거나 가장 약해졌을 때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졌다.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개종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문화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선교하는 것은 오히려 선교에 방해가 된다. 다른 종교인을 말로 선교할 수도 없다. 삶으로 사랑으로 실천과 행함으로 선교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백년, 2백년 천년을 두고 삶과 진리로 서로 다른 종교들이 경쟁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증명된 종교로 흡수 통합되거나 긴밀한 연대 속에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가지고 공존하게 될지 모른다. 선교의 방식은 겸허하게 낮아져서 자기를 비우고 버리고 사랑과 의로 섬기는 길밖에 없다. 진리의 힘은 사랑으로 검증된다.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며 사랑을 드러내는 십자가의 길밖에는 선교의 길이 없다. 종교들 사이에 경쟁한다면 사랑의 경쟁밖에 없다.
둘째 남을 도울 때는 남의 입장에서 남을 위해서 도와야 한다. 내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초월이고 성령의 역사이다. 단기선교는 관광과 가벼운 호기심이 섞여 있다. 단기선교는 적대지역에서는 위험할 뿐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돈이나 물품을 주는 일 이상을 하기 어렵다. 남을 도울 때는 남의 자리에서 남을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도와야 한다. 장애인을 도울 때 장애인의 자리에서 장애인에게 도움이 되게 도와야 한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다. 돕는다는 생각 없이 도와야 참 도움이 된다. 그럴 때만 돕는 사람도 도움 받는 사람도 왜곡되거나 상처받지 않고 온전한 삶에 이르고 구원받을 수 있다. 돕는 자도 도움 받는 자도 없이 오직 생명과 영혼을 살리는 일만 있어야 한다. 오직 성령만 하나님만 살아 일하시게 해야 한다.

남을 도우려면 서로 살리는 공동체를 이루려면 편견과 관념의 폭력에서 벗어나 맑은 눈으로 서로를 보아야 한다. 우리의 눈이 본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의 눈은 다른 동물의 눈과 달리 맑고 투명한 흰 자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눈에서 흰자위는 다른 짐승과 달리 자기의 의도나 생각을 드러내고 표현한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의도와 생각을 남에게 감추기 위해서 짙은 갈색이나 붉은 색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속생각과 의도를 투명하고 섬세하게 드러낸다. 자기, 의도, 동기를 드러냄으로, 표정이 풍부해져서 사귐과 연대가 가능해지고 연대의 힘으로 초원으로 나와 살아났다. 그러니까 우리의 눈은 있는 그대로 맑게 볼 수 있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눈이 탐욕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어둡게 되었다. 그래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되었다. 바라봄의 폭력은 나와 우리의 생각과 관념, 지식과 관점의 폭력이다. 이미 우리는 남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존재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기 어렵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기도 어렵다. 감각의 지각 자체가 사물을 변형시켜 받아들이고 우리의 굽은 마음과 생각이 그것을 다시 일그러뜨린다.

그래서 선승들은 깨달음의 경지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로 나타냈다. 산을 산이라 말하기 어렵고, 물을 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이만이 이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예수는 믿는 사람의 삶의 원칙을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밝혔다. 사실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빼려하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일이 어렵고 가려진 사실을 밝혀내는 일이 얼마나 힘 드는 일인가! 이기심의 죄로 물든 우리의 눈은 자기를 은폐하고 남을 폭로한다. 그러나 욕심과 편견을 걷어내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으로 편견과 관념, 지식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 성령, 믿음만이 편견과 지식의 폭력에서 다시 말해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

3 선악과와 뱀의 유혹: 뱀의 길과 인간의 길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는 지식의 폭력에 빠지게 되었는지 창세 3,1-8에 나오는 선악과와 뱀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가 말해준다. 선악에 대한 지식을 가진 다음에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과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 여기서 선과 악의 원어는 토브와 라인데 도덕적인 선과 악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좋고 나쁜 것을 뜻한다. 상식으로 말하면 선과 악, 좋고 나쁨을 알아야 제대로 바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선언하신다.

성경에서 악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생명의 근거와 바탕이고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 죄악과 죽음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명령이다. 선과 악을 분별하지 말고 그저 살라는 것이다. 선하고 악하고는 하나님에게서만 드러난다. 하나님만이 선하다. 사람이 제 욕심과 감정과 생각에 따라서 선과 악,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정말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사람이 저마다 선과 악을 가르기 시작하면 세상은 온통 혼란에 빠지고 죽음과 파멸이 지배한다.

사람은 어떻게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를 먹게 되었을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도록 유혹하는 것은 뱀이다. 왜 뱀이 유혹자로 나올까? 실제로 뱀이 나와서 말하고 유혹했다고 생각하면 성경을 유치하게 신화적으로 보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에는 생존본능과 지식과 관념의 이성과 영성의 세 차원이 문제 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이 서울대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큰 공부를 하시오. 사람에게 본능과 이성과 영성이 있는데 이성에만 머무르는 공부가 아니라 영성으로 본능과 이성의 차원을 아우르는 공부를 하시오.”

인간의 육체는 생존의 본능에 매어 있고 영혼은 본능을 넘어서 하늘과 하나님을 추구하는 영성을 지닌다. 인간의 이성은 본능과 영성 사이에 끼여 있다. 이성은 영성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고 본능의 종이 되기도 한다.

뱀이 나오는 데는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뱀은 간교한 이성과 생존본능을 상징한다. 이성이 생존본능에 충실하면 간교하게 된다. 뱀은 파충류의 일종인데 공룡과 같은 거대한 파충류들이 급격한 기후변동으로 멸종될 때 살아남았다. 뱀은 자신의 생존에 이롭다고 여겨지는 것은 선하고 좋은 것이고 자신의 생존에 해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악하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생존하기 위해서 굴속에 숨어 살며 날개도 없애고 네 다리도 없애고 뿔도 없애고 귀도 코도 없애고 가늘고 미끄러운 몸통만으로 바닥을 구불구불 기어 다닌다. 홀로 다니며 은밀한 곳에 숨어서 먹이를 공격할 기회를 엿본다. 살아남자는 욕망의 노예 같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닥을 기며 음침한 곳에 숨어서 먹이를 찾는 뱀은 비굴하고 간교하다. 뱀은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적에게서 도망하고 숨기 위해서 눈코입귀를 버리고 뿔도 버리고 팔 다리를 버리고 몸통도 가늘고 길게 미끈하고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다. 먹이를 잡아먹으려고 입만 크게 하고 날카로운 이빨과 독을 품었다. 뱀은 혀가 갈라져서 거짓말쟁이고, 독을 품어서 잘 죽인다고 생각했다. 성경에는 악마를 거짓말쟁이요 살인자라고 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삶의 진실을 가리는 거짓말과 생명을 죽이는 살인이 모든 악의 근본형태이다. 살인과 거짓 다시 말해 악마를 뜻한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에 거의 본능적으로 뱀을 싫어한다.

사람은 뱀과는 정반대로 두 발로 걸으며 하늘을 향해 우뚝 서서 산다. 손과 발, 귀와 눈썹 코와 입술이 섬세하게 발달되어 있다. 바닥을 기며 먹이만 찾는 뱀과 달리 사람은 하늘을 그리워하며 영생을 꿈꾸고 진리와 사랑을 추구한다. 실처럼 가는 뱀눈은 자신을 감추고 남의 약점만을 보지만 사람 눈은 맑고 투명하여 자신의 영혼을 드러냄으로 사랑할 수 있고 벗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두 발로 곧게 서서 살고 눈에 흰자위를 가진 것은 생존을 위해서만 살아오지 않았고 생존을 위해서만 살도록 창조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뱀은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이기적 생존본능을 상징하고 표현하며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자유와 주권을 상징하고 표현한다. 사람과 뱀은 정반대의 길로 간다. 뱀은 뱀대로 저 살 길로 간 것이지만 사람이 뱀의 길로 가면 당장에는 살 것 같지만 결국 죽음에 이른다.

오늘 우리 사회는 뱀의 생존전략을 따르는 것 같다. 뱀의 길로 가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살아남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라면 사람다운 삶은 포기되는 것이고 결국 인류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나와 우리만 살려고 하면 인간은 뱀처럼 바닥을 길수밖에 없고 서로 죽이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분별한 사람은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 인간의 생각이나 세상의 일에는 절대가 없다. 다 상대적인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선은 절대선, 지극한 선이 아니다. 사람의 선을 고집하면 독재가 된다. 생명은 시들고 영혼은 죽는다. 하나님만이 늘 선한 분임을 알고 우리의 선과 악이 상대적이고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세상이 바르게 된다. 사회주의사회가 하나님 없이 자신의 선만을 추구하다가 망했다. 자본주의사회는 돈에 중독되고 사회주의사회는 선에 중독되었다. 사람의 선을 고집하고 강요하면 반드시 죽는다. 우리 속담에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이 성경의 진리의 핵심을 드러낸다. 선악을 알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모르면 그 병이 치유되고 생명에 이른다.

어거스틴, 어떤 선행에도 이기심이 물들어 있다. 따라서 선행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바리새파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과 생각이 선악을 구분하는데 머물러 집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뱀의 길과 바리새파의 정신을 따르는 것 같다. 멋진 몸매를 이기적인 몸매, 착한 몸매라고 한다. 이기적인 것이 좋은 것이고 착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기적인 것, 내게 좋으면 좋다는 것은 뱀의 생각이고 주관적으로 자기 관점과 주장을 선으로 규정하는 것은 바리새파의 생각이다.

4 예수의 가운데 길: 새로운 길, 큰 한 길

예수는 아주 단순한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삶의 길,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은 삶과 사랑을 긍정하는 살림의 길뿐이다. “살리려 하느냐, 죽이려느냐?” 이것은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앞에 놓고 바리새파를 향해 물었던 물음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언제 어디서나 물어야 할 궁극적 물음이다. 이 물음으로 삶과 영혼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우주 생명의 근본에 이르며 하나님의 우주적 생명의지와 만나게 된다.

내 몸과 마음, 생각과 정신과 뜻, 양심과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죽이려 하느냐를 묻고 죽임의 길에서 벗어나 살림의 길로 들어설 때 참 삶, 늘 삶에 이를 수 있다. 나를 내가 죽이고 힘없게 하면서 길이 늘 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언제 어디서나 나를 힘 있게 살리는 길을 가야 한다.

살림의 길로 가는 사람은 먼저 자기와 싸우고 세상의 모든 죽이려는 경향, 죽임의 세력과 맞서 싸움으로써 위로 솟아올라야 한다. 뱀처럼 옆으로 기지 말고 위로 솟아올라야 한다. 모든 부패와 불의와 폭력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하고 죽이는 것이다. 모든 부패, 불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은 살리기 위한 것이다. 원수와 싸워도 원수를 살리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사랑으로 살리기 위해서 싸움을 없애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살리기 위해 싸우는 이는 예수처럼 굽으러짐 없이 그러나 사랑으로 싸운다. 살리려면 사랑으로 싸우려면 위로 솟아올라야 한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두고 곧게 선 사람만이 하늘로 솟아오른 사람만이 전체의 자리에 서서 자기와 남을 함께 살릴 수 있다.

선과 악을 넘어서 생명을 살리는 큰 길로 가야 한다. 선과 악을 넘어서는 큰 길이 하나님 나라의 길이다. 예수가 걸어가셨던 하나님 나라의 길은 이전의 길과는 전혀 다른 새 길이며, 이 길은 선하하고 악하고, 높고 낮고, 강하고 약하고, 잘나고 못나고, 의롭고 불의하고 가리지 않고 다 함께 갈 수 있는 길이다.

유영모는 “예수는 믿은 이”라는 신앙시에서 “높·낮, 잘·못, 살·죽 한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라고 했다. 물질의 기준이나 이성의 논리로 보면 높고 낮고 잘하고 못하고 살고 죽고 하는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보면 그 사이로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길이 있다.

하나님의 영과 뜻에 비추어 보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사이에 가운데 길이 보인다. 생명사랑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판단기준이다. 예수는 사회의 모든 가치와 판단기준, 질서와 체계를 뒤집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창녀와 세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 지옥의 바닥에 하늘나라로 통한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 종교 인종의 장벽도 무너뜨린다. 유대인의 원수, 신앙과 혈통을 더럽힌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된다.

예수는 먼저 선과 악, 의와 죄, 옳음과 그름의 인간적 구별을 없애버렸다. 모든 차별과 분별을 뒤집고 깨버렸다. 바리새파의 모든 분별과 차별을 거부했다. 오직 생명과 영혼을 살리셨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에게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을 때 예수는 “선한 이는 오직 한 분밖에 없다.”고 하셨다. 세상에서 선악의 구별을 거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보고 그에게서 늘 선을 기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누구를 선하다, 악하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욕심과 감정과 편견이 들어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늘 선한 사람, 늘 악한 사람은 없다.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 선하고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 악한 것뿐이다. 나는 선하고 남은 악하고 우리 편은 좋고 상대편은 나쁘다는 것은 편견일 뿐이다.
바리새파는 좋은 사람, 나쁜 놈을 가리며 살았다. 사람에게 죄인과 의인의 딱지를 붙여놓았다. 겉보기에 도덕적이고 경건하고 의로운 것처럼 보이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은 더 나빠지기만 한다. 생명은 고갈되고 영혼은 죽어간다. 남에게서 선하다고 칭찬받는 사람은 자기가 선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더욱 겸허해져야 하고 남에게서 나쁜 놈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도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른바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일깨웠다. 바리새파가 예수님을 선과 악, 죄인과 의인에 대한 시비판단과 토론에 끌어들일 때 예수님은 그런 토론에 말려들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바리새파를 끌어들이셨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떤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고 의이며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이고 죄이다.
예수는 언제나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문제 삼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거스르느냐가 문제였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고 선한 것이며 죽이는 것이 그르고 악한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 나라이다. 생명은 개인 영혼의 깊은 속에서부터 인류 전체, 우주 생명 전체를 아우른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에는 생명의 우주적 인류적 차원과 개인 영혼의 깊은 차원이 맞물려 있다. 인간 영혼의 속의 속, 가운데의 가운데, 중심의 중심이 인류 전체, 우주 생명 전체의 중심 한 가운데와 뚫려 있다. 인류 전체,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회개를 통해서 열리고 뚫리고 새롭게 되는 인간 영혼의 속의 속, 가운데와 하나로 통해 있다. 인간 영혼의 속의 속이 뚫리고 살아나야, 우주의 중심에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맞을 수 있다. 예수는 우리의 영혼 속의 속에서 길이 뚫리게 하셨다. 영혼의 한 가운데서 열리는 가운데 큰 길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큰 길이다. 이 길은 남이 대신 갈 수 없고 나 스스로 홀라 가는 길이면서 누구나 다 함께 갈 큰 길이다. 내가 구원받는 길이면서 우주 전체가 구원 받는 길이다. 모두가 하나로 만나는 가운데 큰 길이다. 예수는 가운데 큰 길을 내셨고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이 되셨다. 이것은 서로 살리는 길, 하나 됨에 이르는 큰 평화의 길이다. 믿음과 사랑으로만 갈 수 있는 길이다.


5 우리가 가야 할 가운데 큰 길

가운데 큰 길, 떳떳하게 갈 큰 길이 막혀 있고 보이지 않는다. 각자 자기 욕심과 주장이 가운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속이 막혀 있기 때문에 답답하고 거짓된 중심을 내세우기 때문에 사회와 역사의 중심이 막혀 있다. 가운데 큰 길을 발견하려면 먼저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생각의 등불을 꺼야 한다. 도시의 불빛을 꺼야 하늘의 별빛이 환이 보이고, 태양을 끄고 이성의 불빛을 꺼야 하나님의 빛, 영성의 빛이 드러난다.

1) 몰라야 산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삶의 깊이를 알 수 없고 사람을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사람의 앞날을 헤아릴 수 없다. 자연생명세계와 인생의 창조자이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지은 생명의 깊이와 인생의 변화를 알 수 없다. 남의 생각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모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데서 참된 삶의 길이 시작된다. 남편을 모르고 아내를 모르는 줄 알아야 남편과 아내에게 조심하고 존중하며 알뜰살뜰한 부부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부모를 모르고 자녀를 모르고 형제자매를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는 가족이 된다. 다 안다고 생각하면 관심도 없고 존경심도 없어진다. 몰라주는 마음이 알아주는 마음보다 크고 깊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서운해 할 것 없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남이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남이 나를 몰라줄수록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의지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하나님만을 붙잡게 된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살아날 수 있다.

2) 세상의 변두리가 가운데이다.

세상에서 높고, 낮은 것이 어디 있나? 높은 것은 좋고 낮은 것은 나쁘다는 생각은 세상적인 생각, 뱀의 생각이다. 하나님에게는 높고 낮은 게 없다. 하늘이 땅 속으로 들어오고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낮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잘나고 못나고 잘하고 못하고 선하고 악한 것이 어디 있나? 잘난 것 속에 못남이 있는 줄 알아야 사람노릇하지 저 잘난 줄만 알고 살면 사람이 못 된다. 못남 속에 잘남이 있는 것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 못난 것을 못난 것으로만 아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 줄 모르고 교육이 무엇인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운데와 변두리가 어디 있나? 세상에서는 가운데를 알아주고 변두리를 몰라준다. 우리 사회가 높은 것은 선하고 낮은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고, 잘난 것은 선하고 못난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면, 가운데는 좋고 변두리는 나쁘다고 생각하고 살면 우리 사회는 반드시 쇠퇴하고, 죽게 되고 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운데를 알아주지 않고 변두리를 알아주신다. 세상에서 힘과 부와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변두리이고 세상에서 소외된 변두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가까이 있는 가운데이다. 세상의 변두리가 새 역사가 일어나는 가운데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모르니까 조심하고 서로 존경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쓸데없는 토론을 그만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만 해야 한다. 높고 낮고, 잘나고 못나고 가운데 있거나 변두리 있거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3) 사랑과 살림의 상상력

생명사랑과 살림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 때다. 상생평화의 시대를 꿈꾸는 예언자가 나와야 할 때이다. 낡은 생각을 날려버리고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 새 시대의 꿈을 꾸는 이가 나와야 한다.
남북한 사이에 살림, 평화의 상상력을 가진 정치가 외교관이 나와야 한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씨알들의 꿈틀거림이 일어나야 한다. 평화의 꿈과 노래로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치우자. 군대를 없애자. 창과 칼을 보습으로 만들자. 남북한 군대를 감축하여 20만명의 젊은이로 평화 봉사단을 만들자. 그리하여 세계 곳곳에서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일에 앞장서자.

4) 큰 평화에 이르는 가운데 큰 길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은 이제까지의 길과는 다른 새로운 길이며 새 길은 가운데 길이라고 했다.

“새 것이 무엇이냐? 중도다. 세계문제는 둘 중 하나를 고름(二者擇一)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이긴 놈도 진 놈도 없어야 정말 이김이다. 두 놈이 다 실패해야 두 놈이 다 구원된다. 구원을 해 주어야 정말 이김이지 대적을 죽이는 놈은 먼저 진 것이다. 소설도 그렇거늘 하나님이 시키시는 우주극에 이긴 놈 진 놈이 있을 리 없다. 다 져야 한다. 그리고 보다 높은 제삼자가 나와야 한다. 그보다 높은 제삼자의 자리가 중도다.” 433

이기고 짐을 넘어선 제3의 자리가 중도이다. 상대를 거꾸러뜨리려고 하지 말고 상대를 살려줌으로써 바로 세워줌으로써 함께 큰 하나에 이르는 길로 가야 한다.

“하나님은 위에도 안 계시고 아래에도 안 계시고 중에 계신다. 중이 하늘이다. 중은 중간이 아니다. 중심이지. 심이다. 속이다. 극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요다. 전에도 후에도 어제도 아니요, 이제다. 유물도 유심도 아니요, 삶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다. 한이다. 그래 중도는 한 길이라 하자. 민국, 만민·만물·만신이 다 가야 하는 한 길이다.” 433~4

마음의 속의 속, 영혼과 하늘, 우주생명 전체가 일치한다. 이제 여기의 삶이 중요하고 모두가 함께 가는 큰 길이다. 그 길은 서로 하나가 되는 사랑의 길이고 평화의 길이다. 가운데 큰 길은 비폭력 평화주의, 세계국가주의, 우주통일주의의 길이다.

“이제라도 우리가 나아갈 길은 중도를 지키는데 있다. 한을 붙잡고 밝히는데 있다. 비폭력주의·평화주의·세계국가주의·우주통일주의에 있다. 6·25를 겪어봤으면 무력으로 아니 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전쟁 즉시로 그만 두어야 할 줄 알아야 할 것이요, 국경을 없애고 세계가 한 나라가 되어야 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우리의 생명이란 곧 우주적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없이는 못할 것이다.” 435

남한과 북한 사이에, 국가주의와 세계주의 사이에 개인과 전체 사이에, 지배 엘리트와 소외된 민중 사이에 가운데 큰 길을 찾아야 한다. 중도는 타협적인 절충의 가운데가 아니다. 종합하여 넘어서는 데서 열리는 가운데, 전체 하나에 이르는 가운데 길이다.
전체 하나에 이르는 가운데 길은 사랑으로만 열린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새 역사의 창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 아가페 사랑이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가운데 큰 길은 아가페 사랑의 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으로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새롭게 할 수 있다. 참된 기적은 사랑의 기적뿐이다. 사회와 역사의 창조적 변화는 아가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사랑에 들어가는 이만 하나님의 우주창조 역사창조에 동참할 수 있다. 세계평화에 이르는 가운데 큰 길, 새 역사를 창조하는 큰 길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때만 열린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은 사랑의 공동체주의에서 나온다. 공산주의의 평등과 자본주의의 자유도 사랑의 공동체에서만 만날 수 있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평생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살고 그 사랑으로 살았다. 그래서 이들에게 새로운 생각이 나오고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남다른 실천력이 나왔다.

아가페 사랑 안에서 개인의 기득권과 국가와 민족의 기득권을 버릴 때 새 길이 열린다. 기존의 이념이나 지식, 논리나 정책으로는 한민족과 인류가 직면한 장벽을 넘을 수 없다. 사랑으로 전체의 자리, 제3의 자리에 설 때 사랑에서 촉발된 상상력과 실천력이 나올 수 있다.
새로운 영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한반도의 평화와 상생을 위해서, 동아시아의 상생과 번영을 위해서 세계평화의 태평양시대를 위해서 상생과 평화의 큰 길이 열려야 한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두터운 갑옷을 벗고 무기를 내려놓고 상생과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군대를 감축하고 남북 평화봉사단을 구성해야 한다. 민족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민족과 국가의 배타적 주장과 장벽을 버리고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가을이 깊어가고 꽃과 잎은 지고 열매는 씨는 영글고 하늘은 높다. 우리 모두 함께 갈 가운데 큰 길이 보일 때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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