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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창 38장)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07 14년전 16313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역사서(20)

족장사(族長史)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창 12:1-50:26)

김이곤(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창 38장)

(도입[導入])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관한 기사(記事)는 창 37:2-50:13에 이르는 “야곱 설화” 속에 추가로 끼어든 하나의 삽화로서,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의 가나안 땅 유랑대열(流浪隊列)에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유다” 가문의 한 특별난 이야기가, 후대에,「야곱 설화」속에 첨가되어 들어온 하나의 삽화(揷話)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기사(記事)는 또한 단편소설 유형(novella)의 <요셉 설화(창 37:2b- 50:26)>의 흐름을 끊으며 요셉 이야기 속에 삽입되어 들어 온 한 짧은 “에피소드”(episode)이기도 하다. 특히 창 37:28,36과 창 39:1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창 38장의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본래, 요셉 이야기와는 별개의 것이었으나 후대에 야곱 설화 속에 첨가된 독립적인 여러 전승들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이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유다 지파의 영토 내에 회자(膾炙)되고 있었던 “아둘람”과 “딤나” 지역 사람들의 “구전(口傳) 이야기”로부터 전해진 것으로서, 단지 그 속에 야곱의 후손들이 거명되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야곱 설화 속에 첨부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다말”이야기는 “요셉” 이야기 속에 들어와서 이야기의 연속성을 끊어놓고 있고 또 전체의 통일성을 다소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렇게 두 이야기가 서로 뒤엉킨 상태 그대로 편집되어 있게 된 것은, 아마도, “유다”가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을 이집트 노예로 팔아넘기는 그 일을 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창 37:26-28)과 또 그로 인하여 야곱 가문 전체가 몰락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유다” 스스로가 통감하고 그 책임을 자임(自任)하였다는 그 일(창 44:16, 18-34) 때문에 다소 어색하지만, 현재의 편집형태대로 잔류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도, 마태복음 1장의 메시아 족보 속에 매우 강력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등장한다는 점에서, 즉, “유다”와 그의 며느리 가나안 여인 “다말” 사이의 이 이야기가 메시아 족보 속의 “스캔들을 가진 이방인(異邦人) 네(4) 여인” 중 그 첫 번째 여인(“다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즉 메시아 족보의 특수한 성격(탈 민족주의적이고도 세계주의적인 구원의 성격)을 증언한다는 점 때문에, 구속사 신학적으로 볼 때, 특히 주목할 만한 기사(記事)라고 하겠다. 즉 사라, 리브가 등등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이스라엘 축복의 주류가 되는 선조(先祖) 할머니들의 이름들과 그리고 끊어질 것 같은 선민(選民) 이스라엘 역사를 일으킨(=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라헬과 레아(룻 4:11b)와 같은 인물들은 다 빠지고 그 대신 매우 비정상적인 아류(亞流)에 속하는 이방인 여인 넷, 즉 다말(가나안), 라합(가나안), 룻(모압),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가, 이른 바, 남성 중심의 메시아 족보 속에서 유일하게 여성인물로서 등장하여 메시아의 어머니 “마리아”의 선 주자(先 走者, forerunners)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메시아는 그가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救世主)이신 이상, 일그러진 이 죄스러운 세상을 구세(救世)하기 위하여서는 그 무엇보다 그 자신이 먼저 이 일그러진 죄인들의 삶 속에 직접 친히 성육(成肉, incarnated)하셔야만 하셨던 것이라는 그런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구세(救世) 방법은 매우 신비롭고 불가해(不可解)하기까지 한 매우 역설적(逆說的)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메시아 출생의 이러한 구속사적(救贖史的) 성격을 가장 극적(劇的)으로 극명(克明)하게 설명해 준 대표적인 예(例)가 바로 오늘 우리의 본문이 말해주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주해)

(1-11절)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가나안 정착을 탐색하는 유랑여정(流浪旅程)의 본 대열(本 隊列)에서부터 이탈하여 “아둘람”이라는 어느 가나안 지역에 머물다가 그 곳 가나안 여인인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셋(엘, 오난, 셀라)을 낳았다. 큰 아들 “엘”은 그 곳 여인(가나안 여인) “다말”과 결혼시켰으나 가문의 대(代)를 이을 후사(後嗣)를 낳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눈 밖에 나서 일찍 죽자, 유다는 “레비리트 법”(levirate marriage law)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을 며느리 “다말”과 결혼시켜 형의 이름을 이어줄 아들을 낳도록 명하였다(8절; 너는 네 형수와 결혼해서, 시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해라. 너는 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 이와 같이, “레비리트 법”은 후사(後嗣)를 낳지 못하고 죽은 형의 대(代)를 이을 아들을 낳아주기 위하여 동생이 형수(兄嫂)와 결혼하여 형의 이름을 이을 “형의 아들”을, 형을 위하여(!), 낳아주는 고대 중동의 “후손 잇기 관습법”이다. 이 관습법에 관한 보도는 신명기 25:5-10에 나오고 있고 그 시행의 예(例)는 룻기에 나온다. 이 관습법은 남자에게 후손생산 능력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 관습법이지만, 그러나 여자에게 아이생산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씨받이 여종”(히브리말로 “쉬프카” 또는 “아마”라고 함)을 대리모(代理母)로서 남편에게 첩으로 내어주어 남편의 후사를 얻게 하는 관습법도 또한 있다(사라-하갈 이야기 참조). 특히 족장역사와 더불어 시작하는 육경역사는 이와 같은 “후사를 잇는 그 일”이 “구원사”(救援史)의 핵심 구성요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대를 잇는 것”은 족장[家父長]의 가장 중요한 책임에 속한다. 그러나 족장(族長) “유다”는 첫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 “오난”마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그 죽음이 전적으로 아들 오난의 악행 때문인 줄은 모르고, 즉, 아들을 낳더라도 자기 아들이 안될 것을 알자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은 낳아주지 않으려고(!)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던 그 형제애(兄弟愛) 외면(外面)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줄은 모르고, 셋째 아들 셀라를 살리겠다는 일념에만 집착하여, 애매하게 며느리 “다말”을 오히려 친정으로 쫓아내어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고(과부신분으로) 있으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이 부분(1-11절)에서는 ①“오난”의 행위(성교중절행위 coitus interruptus를 영어로는 onanism이라고 부름)란 “형제 애(兄弟 愛)의 결핍(缺乏)”이라는 죄(罪)라고 하는 지적(9-10절)과 ②“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것은 셋째 아들 “셀라”도 죽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행한 일이지 며느리에게 레비리트 법에 대한 약속을 주기 위함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주해 구절(11절)이 그 주요 구성요소를 이룬다. 이 두 요소는 우리의 본문을 이해하려 할 때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2-26절)이 부분은 ①이방 여인 며느리, “다말”이 자기 남편의 가문에 후사(後嗣)를 이어줄 “권리”(“의무”라기 보다는!)를 획득하려고 손수 선수행위를 취하여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12-23절)과 그리고 ②이러한 며느리의 억척스럽고도 무모하기까지 한 하나의 보기 드문 기행(奇行)을 유다 지파의 대표 족장인 유다가 자신의 입으로 “의로운 행위”(“체다카”)라고 인정(認定)/찬양(讚揚)한 일(24-26절)을 주로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다루고 있다.

“유다”가 양털을 깎기 위하여 “아둘람”에서 “딤나”로 가는 약 20리 길(7km)을 올라간 때는 그의 아내도 죽은 후(後)이고 또 죽은 아내를 위하여 곡(哭)하는 법적 기간도 다 끝난 때였다. 아마도 이러한 “시기”에 관한 특별한 언급은 유다가 “새장가”를 갈 수 있는지에 관한 의혹의 문제를 풀어줄려는 설화자의 의도가 반영된 언급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는 며느리 “다말”에게 있어서도 상실(喪失)될지 모를 자신의 중요한 권익(權益), 즉 남편의 후사를 얻을(잉태/출산할) 권리(權利)를 잃지 않고 확보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막내 시동생 “셀라”가 다 장성한 후인데도 시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에게 “셀라”를 짝지어 주려하지 않았기 때문(14b절)이었다. 그리하여 “다말”은 분연히 일어나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는”(!) 시아버지(유다)가 올라올 그 길 어귀에 앉아 시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여자가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남자들을 기다리는 행위”(렘 3:2; 겔 16:25)는 “창녀”(“쪼나”)의 음란한 상행위(商行爲)를 가리킨다. 그러나 “다말”은 창녀의 행태와는 달리(!)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12-14절).

“다말”이 끈기 있게 기다린 대로, 시아버지 “유다”는 마침내 이 길로 올라왔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길거리에 앉은 이 젊은 여인을 보고는 몸을 파는 “창녀”로 판단(=착각)하였다(wayahshevah←hshb, 15절 “…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에는 이중의 과오가 있었다. 그 첫째는 유다가 길가에 앉은 젊은 여인의 신분을 그가 얼굴을 가렸다하여 잘 확인해보지도 않고(그녀가 자신의 며느리인줄도 모르고) 단지 창녀로만 판단하였다는 것, 즉 몸값을 흥정하고 또 당시 화대(花代)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 “유다”가 그 화대를 나중에 가지고 오는 조건으로 담보물을 맡기는 일까지를 정확하게 협의하여 결정하고 또 육체관계를 다 마치고 나온 후까지도 그 여인이 자신의 며느리인줄을 몰랐다고 하는 그의 불투명한 판단의식과 도덕의식이 그의 첫 번째의 허물이며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 둘째는 창녀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법 윤리(호 4:14)를 유다 지파 족장 “유다”가 범하였고 또 며느리와의 육체관계를 금하는 이스라엘의 법(레 18:15)도 또한 범하였다는 점에서 유다의 두 번째 결정적 과오점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며느리 “다말”은 몸값으로는 단순한 화대(花代)가 아닌(!) 염소 한 마리를 몸값으로 정하는데 합의를 하였는데, 이 “염소 한 마리”는 그리스와 중동 지역에서는 신전 여인(神殿 女人, 가나안 제의의 “커데샤”의 일종)에게 주는 종교적 성격의 희생제물(犧牲祭物)을 가리킨다. 그리고 또 “다말”이 노린 담보물은 사실 돈이 될 물건이 아니라(!) 단지 “도장과 허리끈, 그리고 지팡이”뿐이었다! 더욱이 이 담보물은 바빌론뿐만 아니라 가나안과 이스라엘에서도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배지”(badges)와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는 그 무엇보다도 시아버지의 신분을 확실하게 증언해주는 증거물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며느리 “다말”에게 있어서 이 행위의 목적은 오직 단지 “남편의 후사를 잇는 것”과 “시아버지의 가문을 살리는 것”일 뿐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점이 중요한다(젊은 과부의 욕정을 채우려는 것이거나 몸을 판 수익으로서 돈을 얻으려는 것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후사가 될 아이를 임신하는 것, 그것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설화자는 여기서 이 딱 한 번 일어난 일로 인하여 즉각(!) “다말”이 시아버지의 아이를 능히(!) 임신하였다고 보도해버린다. 아, 하나님께서는 “다말”과 “유다” 사이에게만은 -“엘”과 “오난”에게는 그리도 어려웠던(!)- 그 임신의 축복을 어찌 그리도 신속하게 내려주셨는지!!(15-19절)

그러나 “유다”는 이 일이 있은 후에도 여전히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모른 채, 자기의 가나안 친구인 “아둘람 사람”(“히라”)을 시켜서, 화대로 약속한 돈(화대)을 그 여인에게 보내고 그 여인으로부터 맡겨 둔 그 담보물을 -그 귀중한 담보물을- 찾아오려고 하였지만, 그 친구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하자, 그 귀중한 담보물을 즉 그의 명예 전부가 걸려 있는 그 담보물을 이 이야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그 순간까지 그 여인(며느리)의 손에 남겨두어야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이것은 그 여인이 처음부터 계획한대로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목할 만하게도, 이 대목에서는(20-23절) 두어 가지로 “유다”가 존경할만한 인물로서 추가적인 재손질을 받는다. 우선 창녀를 찾아가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유다 자신이 하는 것은 피하는 대신에 가나안인 친구를 대신 보내서라도 지불할 돈만은 약속대로 유다가 지불하려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비록 그 일이 꺼림칙한 일이기는 하였지만 지불할 돈은 약속한 대로 보내어 유다가 <약속을 어기는 자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가나안인 친구의 입을 빌려 그 여인을 가리켜서 “창녀”(“쪼나”)가 아니고 가나안 종교풍습에 따른 “커데샤”(神殿 女人, 문자적으로는 “거룩한 여인” 즉 “聖娼”을 가리키는 말)라고 말하게 한 점이다(21-22절, 한국말 번역은 15절의 “쪼나”와 21-22절의 “커데샤”를 모두 똑같이, 즉 구별 없이 “창녀”라고만 번역함). 이것은 또한 동시에, 며느리 “다말”의 이 행위란 결코 “창녀”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전적으로 자기 나라의 종교관습인 “신전 여인”(“커데샤”)의 의전(儀典) 행위로 위장하였다는 것을 밝히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유다”의 편에서는 그 여인이 창녀이든 가나안 신전여인이든 간에 유다의 대표 족장으로서는 큰 허물을 남긴 반면에, 며느리 “다말”은 전혀 불륜의 창녀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자기 나라의 종교관습의 형식을 “빌려서”(!) 오직 남편의 후사(後嗣)를 잇게 하고 동시에 시아버지의 가문을 “살리려는”(!!) 위대한 구원행위를 단행한 것뿐임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20-23절).

마침내 이 이야기는 대단원의 종장(終章)에 이른다(24-26절). 이 종극(終劇)의 시작은 “석 달쯤 지난 다음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석 달”은 “다말”이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말이다. 이 임신 사실은 그 자체 만으로서는 “과부로 있어라!”(막내 시동생이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라!” 11절)라는 가부장의 명을 어기고 다른 남자와 행음(行淫)한, 이른 바, <돌로 처벌받아야 할 범죄행위>(레 20:10; 신 22:23f.)를 행한 것이었고 이에 대한 처벌집행은 가장(가부장)에 의하여 집행되도록 되어 있는 일이었다. 드디어 며느리의 이 추문(醜聞)이 전해지자, 신속하게(!) 그리고 사실의 진위를 알아보는 일도 전혀 없이 즉각 처형하는, 그리고 그 처형도 돌로 치는 처형 대신에 제사장의 딸이 음행을 하였을 때에나 처벌하는 “화형(火刑)”(레 21:9)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순간은 “다말”에게 있어서는 결정적인 위기(危機)임과 동시에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무죄를 밝힘과 동시에 후사(後嗣)를 이어줄 권리를 획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機會)이기도 하였다. “다말”은 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아니,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신속히!)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내어(shlk) 말한다. “저는 이 물건 임자의 아이를 임신하였습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이 도장과 이 허리끈과 이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25절) 즉 “다말”은 여기서 결코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려고 하거나 자비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오직 “다말”만이 잘못이 없었음을 설화자에 의하여 인정받고 찬양받았던 것이다.!!(J. A. Emerton, G. von Rad) 드디어, 족장 유다의 최종 판결 선언이 내려졌던 것이다. “차드카 밈멘니!”(“그녀의 그 의[義]가 나보다 옳았도다.”) 즉 “의”(義; “체다카”)에 대한 새 개념이 선포된 것이다. 아니, 구약성서가 말하는 “의”(義)의 본질적 의미가 극적으로 그리고 바르게 규명되고 설명된 것이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의”(義)는 결코 흑백을 밝히는 이분법적 논리 위에 서 있지는 않았다. 그 의(義)는 전적으로 <<u style="text-underline: #000000 single">구원 지향적>인 (義)였다. 구원을 도출해내지 못하는 “정의”는 사실은 정의(正義)가 아니었던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심판하는 것이 의(義)가 아니라 간음한 여인을 회개하게 하고 구원하는 것이 의(義)였다(요 8:11). 다말의 의(義)는 한 가정 공동체를 살려 구원(救援)하는 것이었고 유다의 의(義)는 여인의 행위의 그 위법 자체를 법률적으로 판결(判決)하는 것이었다. 어느 “의”(義)가 옳은 의(義)냐? 라는 것이다. 성서는 주저 없이 다말의 의(義)를 유다의 의(義)보다 더 옳다고 판단하였다.

(27-30절) “유다-다말”설화는 이미 결론난 이야기에 짧은 “족보”를 첨가함으로 약간 확대된다. 이렇게 하여 이 이야기는 “지파(족장) 시대”의 관점을 배경으로 하였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이 족보는 “베레스”(이 이름의 의미는 “터뜨리다”는 뜻을 가진다.)라는 <다윗의 조상>이 감히 쌍둥이 형을 재끼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암울한 시대를 힘차게 “터치고 나온” 한 기이한 사건을 소개함으로(야곱과 에서 이야기 참조!) 독자들로 하여금 유다 왕조의 미래가 갖는 그 구속사적 성격을 의미 있게 내다보게 해준다.

(도출[導出])

* <설교 실연(說敎 實演)>은 설교 대신 우리 본문의 주석과 그것에 의한 신학적 반성을 기초로 하고서 그리고 지금까지 이 지구상의 남성들이 저질러 온 모든 잘못된 악(惡)을 사죄하는 뜻에서 이 이방인 여인 “다말”의 용기와 슬기를 찬양하는 송덕가(頌德歌)를 하나 지어 감히 그녀에게 헌정(獻呈)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다말 송덕가(頌德歌)

쓰러져 가는 한 가문,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한 가문,

오직 그 가문만을 일으키고자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자리로까지 내려갔었던 저 여인, 다말!

그녀를 노래하라.

자신의 육체적 욕망 때문이 아니라,

전혀 한 공동체의 구원(救援) 때문에

젊은 사내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단지,

공동체의 대(代)를 잇는다는 이 위대한 의무를 망각하고 있는

저 늙은 시아버지를 유인하여

부끄러운 범죄에 빠지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 참 의무 깨우쳐 준,

저 당돌하기 짝이 없는 기인(奇人) 여자, 다말!

그녀를 찬양하라.

여자는 죽어지내야 하고 가문의 불운은 모두가 살(煞)이 낀 여자 때문이라 하여,

모든 운명의 책임을 떠맡아 안고 가게 하는 이 세상 인습의 저 편견을 타파하고

여인이 한 가문에서 가질 그 권리를 회복하겠다고

감히 “커데샤”(holy prostitute: 聖娼)로 분장하여,

자신의 우둔함과 음란함은 남성의 호탕한 기풍인양 기만하는

저 남자들의 위선과 오만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타파한

탁월한 지성과 용기의 소유자, 저 이방 여인, 다말!

그녀를 예찬하라.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 하여 이웃과 사회는 흥하든 망하든 아랑곳 않고

오직 자기 이익과 자기 욕망 추구에만 혈안 된 이 인간 세계 속에서도

대아를 위하여 소아를 버리는 것이 궁극의 선(善)이요 의(義)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여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치와 모멸의 자리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여

무너진 가문과 괴멸된 공동체의 “구원”(救援)이라는 지고(至高)의 영광을 이끌어 낸,

저 슬기의 여인, 그 이름 아름다워 “다말”이라 하였으니,

아, 생명수로 사막을 오아시스로 꽃피우든

저 생명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palm tree, 삿 4:5)같은 그 이름, 다말!

그녀를 찬송하라.

지배하고 소유하는 힘, 그것만이 선(善)이라고 믿는 저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들을

향하여는,

“자식이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라고 외쳤던 저 영원한 어머니 리브가(창 27:13)처럼

한 가정과 한 공동체를 건지기 위하여서는 간음한 여인이 받을 정죄도 마다 않고 받아

스스로 속량제물이 됨으로서

“물리적 힘은 결코 정의가 아니고 희생적 사랑으로 이웃을 살리는 그 길만이 정의요 진리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몽해 준 저 인류 최대의 스승, 다말!

그녀를 찬양하라. 찬송하라. 송덕(頌德)하라.(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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