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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핍박 속에서 이루어진 모세출생 (출 1:1-2:10)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09 14년전 9675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22-역사서(22)

출애굽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출 1:1-15:21)

김이곤(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이스라엘 핍박 속에서 이루어진 모세출생

(출 1:1-2:10)

(도입)

가나안 땅에서 “임시 거류민”으로서 살고 있었던 야곱 가문과 그리고 이집트에 와서 한 “민족”(‘am)을 이룬 이스라엘, 이 둘 사이의 연결매체가 “요셉”이었다는 것은 출1:9b(문법적으로 애매모호한 추가 어구)에 나타나는 “암 베네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강하게 적시(摘示)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어구(출 1:9b)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듯, “이스라엘 자손 백성”이라는, 이른 바, “구문[소속]관계”(construct relation)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우리 말 번역(새 번역과 개역개정)에서처럼 “동격관계”(appositional relation)로, 즉 “이스라엘 자손 한 백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옳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출 1:9b는 “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한 한 백성이 되었도다.”(hinneh ’am bene yisrael …)라고 읽는 것이 문맥에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출 1:1-5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해 주는 기능을 하게 되고 동시에 출 1:9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강제노역에 붙인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기능을 하게 된다. 즉 요셉을 통하여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 가문이 마침내는 이집트 땅에 생겨난 “위험스러운 이 민족(異 民族)”이라고 할 만큼 번성하여 이집트인들보다 더 강하게 보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출 1:9)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이삭-야곱 가문에게 야훼께서 주신 바, “민족”(‘am)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로 가시화(可視化)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성취에로 다가갈 때에는, 흔히, 그것(여기서는 야훼의 구원사의 성취)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야훼 하나님(창 50:20)은 이러한 장애물들을 오히려 자신의 구원사의 성취에 필요하고도 요긴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 점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즉 이스라엘 해방을 위한 최대의 민족 지도자 <모세의 출생>은 오히려 바로 이런 위기의 장애물들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 본문(출 1:1-2:10)은 야훼의 이스라엘 구원사가 갖고 있는 바, 이러한 “역설적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본문 주해)

고대 중동사회의 “지혜”의 본산지는 이집트였다. 그래서 그 지혜와 지식의 높음과 함께 고대 중동사회에서 최강의 선진국으로 군림해 왔었다. 이러한 이 이집트 대제국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종동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던 “아피루” 또는 “하비루”라고 불리는 힘없는 사회적 국외자들인, 이른 바, “히브리인”으로 분류되었던(출 1:16,19; 2:6,7; cf. 출 1:15) 이 하찮은 이스라엘인들이 “민족”(‘am)으로 성장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그 이집트 제국의 강력한 핍박의지와 지모(智謀)를 능히 극복하고 그 피압박의 와중(渦中)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불후의 민족 지도자를 탄생시킬 수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다. 가히 놀랍다 못하여 신비하기까지 하다.

1:1-5절; 우선, “민족” 단위로 번성해 나아갈 “씨앗”인 야곱 가문의 남은 자 70인(출 1:5)을 우리의 본문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자들”(yots’ey yerek-ya‘aqob)이라고 한 그 말의 문맥상의 의미와 역설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 나오는 “허리에서 나온 자”라는 말은 “육체적 혈통에 따라 태어난 것을 통칭하는 일반적 관용어투”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러나 이 “허리”는 창 32:25[26],31[32],32[33]에서 언급된 “야곱의 허리”(yerek ya’aqob), 즉 하나님의 일격을 받고 “위골된”(“깨어진”) 그 허리(엉덩이 뼈 또는 허벅지 관절; 야렉→예렉, yarek→yerek) 및 창 35:11에서 언급된 바,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따이”)이 야곱을 축복하시면서 언급하신 그 “허리”(“할라침”; hallatsyim)와 동일 문맥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경우 이 “허리”는 하나님의 징계의 일격으로 깨어져 위골된(naga‘/taqa‘ ), 그러므로 졸지에 다리를 절뚝거리게 만든 그 “상(傷)한 허리!”와 연결된다. 우리의 놀라움은 출애굽 공동체를 주도한 주축세력(=출애굽 혁명의 주체세력)인 “70인”(LXX에서는 75인)이 야곱의 정상적이고 튼튼한 허리가 아닌, 그 “상(傷)한 허리”에서 나온 자들(창 46:26)이라는 점에 있다. 이 점은 “사라, 리브가, 라헬”이 모두 “불임여성”(不妊女性)이라는 것을 족장들에게 주신 “후손번성에 관한 약속”과 결부시켜서 자주 강조하는 족장사의 성격과 매우 평행된다고 하겠다. 실로, 이것은 상한 심령에서부터 올바른 제사가 나온다.”(상한 심령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이다.)라는 진리(시 51:17[19])를 대변하는 케리그마적 증언으로 보인다. 이 “70인”이라는 수(數)는 아마도 창 46:8-27의 좀 더 오랜 전승 자료에서부터 수정 채용된 것으로 보인다.

1:6: “그리고 [세월이 지나] 요셉도 죽고 그의 모든 형제들과 그 세대의 모든 사람들도 모두 다 죽었다.” ([ ]안의 작은 글자들은 「새 번역」 성서가 의역해 넣은 것이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된 것은 “그들의 죽음과 함께 그들이 이집트에 끼친 영향이 모두 분명하게 끝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세대”라고 한 말도 또한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왔던 무리들 전부와 요셉의 영향력을 알던 모든 이집트인들이 모두” 다 없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하겠다. 이 점은 “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이집트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다.”라는 1:8의 언급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요셉의 영향력이 이집트에 강하게 작용했던 그 시기를 셈系의 힉소스[Hyksos]가 이집트에 침입한 시기(기원전 18016세기)와 관련시킬 수 있는지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1:7; 이집트 땅에 있는, 이른 바,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것을, 구약에서는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번성하다”를 의미하는 동의어 동사 다섯 개(parah, sharats, rabah, ‘atsam, male’)를 반복 나열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이는 기름진 땅 “고센” 땅에서 한 때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였던 것에 대한 확대 표현으로 보인다. 신(神)의 약속이 성취되어가는 구원사의 활발한 진행을 독자들로 하여금 체감하게 한다.

1:8-11절; 이러한 이스라엘 구원사를 방해하는 적대 세력이 “이집트 제국”이었다. 당대의 초강대국 이집트는 그들이 가진 지모(智謀)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증대가 장차 발생시킬 위험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인들(히브리인들)을 강제노동으로 억압하기 시작하였는데, “비돔 성과 라암셋 성 건축”에 강제 징용하여 건축노역에 부렸었다. “비돔”이라는 말은 태양신 <“아툼”(Atum)위 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라암셋”이라는 인명(人名)은 <“라암셋”의 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들 성(城; ‘ir)들은, 비록 그런 이름이 언급은 되지 않았으나, <바로(Pharaoh)의 거주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 모든 강제노역 정책이란 자손번성을 통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사 계획을 막아 분쇄하겠다는데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12-14절; 12절 서두의 히브리어 접속사 “봐브”/“와우”(ו, waw)는 “그리고”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러나”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C. Westermann, "waw-adversative" in his Praise and Lament in the Psalms) 즉 이집트 지혜의 “반(反) 구원사 전략”에 대한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보이신 지혜의 반응(反應)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분위기(雰圍氣)의 반전(反轉)>을 도입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반전의 반응(수사 어구, ka'asher … ken)은 단지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더욱 번성하여 이집트인들을 위협할 정도였다.”라는 짧은 언급으로만 표현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집트인들을 위협할 정도”라는 말은 이스라엘인들의 자손번성이 동물들의 새끼 출산 때 보이는 “새끼들이 뒤엉겨 우걸거리는”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모습에 몸이 오싹 움츠러드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민 22:3; 사 7:16). 그리하여 이 “혐오의 섬뜩함”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인들의 더 가혹한 억압의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네 절(四節)로 된 이스라엘 핍박 전략의 제 1라운드(1:11-14)는 “익살스러울 정도로” 이집트 지혜의 패배로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1:15-22; 여덟 절(八節)로 된 이스라엘 핍박 전략의 제 2라운드(1:15-22)는 이집트 왕이 “두 산파”(産婆; 십브라,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을 도울 때 그 아이가 남자 아이면 죽이고 여자 아이면 살려두라는 “영아학살의 왕명”을 내리는 행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전략상, 제1라운드보다는 그 억압의 강도가 높아지고 더욱 잔인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산파”가 이집트인 산파냐 히브리인 산파냐(히브리 본문과 탈굼 역본은 히브리인으로 말하고, LXX와 Vulgata역본은 이집트인으로 말함)하는 문제와 왜 명령을 받는 산파가 “단지 두 명뿐”이냐 하는 문제는 그 내용이 “민담”(folk tale) 문학에서 온 것인 이래 그 객관적 정확성이 여기서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따라 읽어 내려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의 중요한 문제는 지혜의 대 제국 이집트의 왕 바로(Pharaoh)가 직접 나서서(1:9은 “바로” 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냥 “그가[And he, wayyo-]”라고 기록하고 있고 1:11에서는 그냥 “그들이”[And they, wayya…u]라고 기록하고 있음과 비교하라.) 특정 인물(“십보라”와 “부아”라는 산파)을 선정 지목하여 “엄청난 살인 음모”를 지시하여 이스라엘 구원사를 파쇄(破碎, wahamithten ’otho)하려 하였는데도 그의 음모가 “익살스러울 정도로 싱겁게 웃음거리로 끝나고 만다.”는 점이다. 즉 대 제국 이집트 왕의 지혜가 낮고 천한 신분의 두 산파의 지혜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야훼의 지혜가 가진 “역설적 성격”이 힘차게 부각되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바울이 확신한 바와 같이, “[야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 1:25)라고 한 그 현실을 우리는 여기서 확실하게(드라마적으로) 본다. 즉 지엄한 왕명(1:16)이 있었음에도 저 신분이 비천한 산파들이 왕명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여”(watiren…’eth-ha’elohim, 잠 1:7) 감히 왕명을 어겼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왕이 이 일 때문에 산파들을 문책하자 산파들은 “바로”를 향하여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는 달라, [해산능력이 좋은 짐승들처럼]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녀들에게 당도하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버립니다.”(1:19)라고 하는 탁월한 임기응변으로 “바로”왕의 문책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사 섭리에 대한 송영(誦詠; 1:20-21; 산파들이 가진 “하나님 경외”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찬양 응답)이 곧바로 뒤따르고 “바로”(Pharaoh)는 이 전투의 제3라운드 즉 마지막 라운드를 획책한다. 즉 “바로”는 “그의 백성 모두 에게”(lekol- ‘ammo, 아마 이집트인들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에게도) 히브리인 출산아 중 남자 아이는 모두 [나일] 강물에 던져 죽이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두라!(1:22)고 공개 칙령을 왕명으로 공포하고 만다. 이러한 살육적인 상황 속에서도 히브리인 남자 아이가 과연 무사하게 태어날 수 있을까? 야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제 곧 일어날 이러한 명약관화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독자들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해방의 대 지도자인 “모세”는 바로 이러한 긴박한 와중 속에서 출생한다.

2:1-10; 모세 출생 … “모세”출생 이야기는 모세가 정통 이스라엘의 가문인 “레위”지파의 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먼저 밝히면서 시작한다. 그렇게 하여 이 민담은, 그 기원이 어디서 유래되었든지 간에(고대 중동의 위대한 인물들의 출생에 관한 민담들, 예컨대, 아카드의 사르곤 왕 출생 민담 같은 것과 유사한 그 문학형태 비교), 여기서는 이 성서 설화자의 손에 의하여 이스라엘 화(化)되어 “모세 출생설화”에 참조 응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모세”는, 그 이름이 이집트적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 레위 지파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 구성 문학의 민담적 성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화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부모와 누나의 실명(實名)언급이 자제(自制)된 것으로 보인다.(출 6:18,20에 의하면, 모세는 아므람[아버지]과 요게벳[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누나의 실명[미리암]은, 출 15:20-21, 출애굽과 홍해 건넘 직후에 나타나며 형 “아론”의 실명은 소명[召命]사건 끝부분인 출 4:14에서 갑자기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세출생 설화에서는 형이나 누이의 출생에 대한 전제가 없고 “모세”가 장자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스라엘 설화기자들은 자세한 계보에 대해서는 덜 관심하는 반면에 가장 의의가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여자가”(“요게벳이”라고 하지 않음) 영아학살 왕명의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그 낳은 아이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일 강에 던지지 않고 “석 달 동안이나 숨겨 길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이 “3개월”은 이집트 관리들이 3개월마다 히브리인들의 가정을 순찰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히브리 본문이 말하듯이 그 이유는 그 아이에게 더 있었다. 즉 지엄한 왕명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아들 출산을 숨긴 그 이유를 이 설화기자는 단지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라고만 설명하였다. “잘 생겨서”(새 번역과 개역 개정; 그러나 개역은 “준수하여”라고 번역함)라는 말은 히브리어 “키-토우브”(ki-tov, “that he was a beautiful/a good …")의 번역인데, 이 말의 문맥상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요세푸스(Josephus)는 “아무리 못생겨도 엄마의 눈에는 잘 생긴 것으로 보인다.”라는 말로 주석하였는데(Antiquitates Judaicae, II, 228ff. cf. C. Houtman, Exodus, I, P. 273), 아마, 왕명도 막을 수 없는 히브리여인의 강한 모성애를 강조한 말로 보인다. 그렇지만, 석 달이 되었을 때는 아마도 아기의 울음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즉 아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어머니는 “갈대 상자”(tevath gome’)를 만들어 거기에 “역청과 송진”을 발라 방수를 하고 그 안에 아기를 담아 나일 강의 “갈대 사이에” 띄워 두었다.

여기 “갈대 상자”의 “상자”는 히브리말로 “테바”(tevah)라고 하는데 이 말은 노아가 만든 “방주”를 창세기에서는 "테바“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모세의 어머니가 아들 아기 모세를 담아 물에 띄운 그 “상자”를 우리 본문의 기자는 노아의 “구원의 방주”(창 6:14f)에 비유하였다는 말이다(이 “갈대상자”라는 말의 어원상[이집트의 언어를 히브리어에서 채용한 것]의 문제에 대해서는 L. Koehler의 입장보다는 U. Cassuto의 입장을 따른다.). 노아의 경우는 대(大)우주적(macrocosm) 구원을 위한 방주를 계획하였다면 모세의 어머니의 경우는 소(小)우주적(microcosm) 구원을 계획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See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Exodus, Pp. 18-19). 더욱이 노아의 경우는 배의 방수(防水)를 위하여 “역청”(kpr)만을 발랐으나 모세의 어머니의 경우는 “역청(hmr)과 송진(zpt)”을 발랐다고 하여 “송진”(zpt)을 더 첨가함으로(kprhmr, 두 유사품질 사이의 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살림에 대한 배려의 자상함”에 있어서는 모세의 어머니의 모성애가 노아를 능가하였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기 모세가 보호받은 나일 강변의 “갈대”(sup)가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도움을 받은 “갈대바다”(yam sup)의 “갈대”(sup)와 갖는 외연관계(外延關係)도 우연이라기에는 기이하다고 할 정도의 “구원사적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갈대 상자를 모세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 지켜보고 있었다.”는 표현에서도, 차일즈(B. S. Childs)가 생각하였듯이(The Book of Exodus, P. 18), 갈대 상자로 인하여 장차 생겨날 일에 대한 누이의 태도는 “단순한 중립적 관찰”(simply a neutral observation) 이상의 것이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 “지켜보고 있었다.”(wattethatsev)라는 말은 “서있다”(‘mad→watt’amdi)라는 통상적 동사와는 다른 뉘앙스(She stood firmly; 삼상 3:19; 10:19는 희망적 기대를 가지고 서 있는 동작을 표현하고 있다!!)를 가진다. 누이는 여기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현현하셔서 서 계시는 야훼처럼(삼상 3:10), 희망의 사건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영아학살 칙령을 내린 바로 왕의 딸이, 거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듯, 목욕하기 위하여 시녀들을 거느리고 나일 강가로 와서 그 “갈대상자”를 보고 시녀들을 시켜서 그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출 2:5) 그러나 위기는 기회였던가? 공주가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아 보라! 한 사내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2:6; “붸힌네- 나알 뽀케”) 구약에서는 어린 아기의 울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뽀케”(bokheh)라는 단어를 사용한 예는 아기 모세의 경우에서만이라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라고 하겠다.(구약 전체 약 115회 중, 어린 아기의 “뽀케”를 위해서는 출 2:6!!에서만 사용됨) 야훼 하나님은 그의 종이 “울음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는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이른 비(가을 비)로 복(福; ”뻬라카“)을 채워 주시는 것”(시 84:6[7])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 역설(逆說)의 진리가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의 딸은 갈대 상자 속의 아기가 우는 것을 보자, “그녀는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겼고 그 아이를 가리켜 히브리인 아이라고 말하였다.”(2:6) “그러자 그 아이의 누이가 바로의 딸을 향해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라고 말하였다.”(2:7) “바로의 딸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래, 가거라.’ 하니, 그 소녀[ha'almah]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왔다.”(2:8) “바로의 딸이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여다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삯을 주리라.’ 하여, 그래서 그 부인[ha’ishshah]은 그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였다.”(2:9) 여기서 말하는 “불쌍히 여기다”의 히브리말(hamal)은 “불쌍히 여겨 목숨을 아끼는 마음이 생겨 살려주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의문의 중심이 되는 것은 이집트 공주가 갈대 상자 속의 아이가 히브리인 아이라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았고 또 어떻게 부왕(父王)이 내린 지엄한 칙령에 역행되게 “히브리인 아이”에게 불쌍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 아이를 살리려는 행동(히브리인 유모를 구한다든지 또 히브리인 여인에게 젖먹이는 동안의 양육비까지 주기로 하는 등등.)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 아기의 할례여부를 확인한 결과(유대인 주석 등)로 알게 된 것이라든가 또는 아기의 외모(피부색 등)확인의 결과라든가 하는 대답에도 각각 일리는 있지만 만족할만한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중동세계의 다(多)문화 다(多)민족의 환경에서는 이스라엘인만이 할례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출 2:6이 이러한 의문에 대한 좀 더 합리적인 해석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즉 바로의 딸은 갈대상자를 열고 아기의 우는 모습을 보자 “그의 생명을 살리려는 불쌍한 연민의 감정”(hamal→wattahmol)을 느꼈다고 하는 것은, 그 공주는 부왕이 내린 영아학살 칙령의 반(反)윤리적 잔학성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히브리인 아이들”의 비극에 대하여 연민(憐憫)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해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기의 우는 모습을 보자 즉각 “이는 히브리인들의 아이들 중 하나이구나!”(miyyaldhe ha‘ivrim zeh)라고 말한 그 말에서도 “갈대상자”속에 버려진 한 아기로부터 왕의 칙령 아래에 있는 많은 히브리인 남자 아이들의 비극적 운명을 연상(聯想)해내었다는 것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태도의 그 결과가 출 2:10의 결구(結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그 아기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기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주니 그 아기는 그 공주의 아들이 되고(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게 되고) 공주는 그 아기에게 ‘물에서 건졌다’하여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모세”라는 이집트 왕족의 이름(cf. Kamose, Amosis, Thutmosis, et. al)을 지어주었다는 데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 설화의 기자(記者)도 또한 이 이야기의 이스라엘화의 에필로그를 만들기 위하여 “물에서 건지는 자”(“mashah”→“[물에서] 끌어내다”의 단순동사 능동 분사)라는 주해를 붙여주었다. “모세”는 이리하여 이스라엘을 나일 강물에서, 홍해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멍에로부터 “이끌어내는 지도자”로 임명/지명된 셈이다. 지엄한 바로왕의 영아학살명령 하에서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해방의 지도자가 탄생되고 왕실의 합법적 보호아래 교육받은 히브리민중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야훼 구원사의 역설적인 성격이 선명하게 부각된 것이다.

결어(설교응용 안내):

이스라엘 구원사의 특성은 그것이 전적으로 “역설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 구원사의 시작을 여는 <모세출생 설화>부터 이미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당시의 중동세계에서는 최강을 뽐내든 초강대국 이집트가 그들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삼 단계(三 段階)로 이스라엘의 민족형성이라는 야훼 구원사의 진로를 차단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이집트의 그 거대 계획의 지혜는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보잘것없고 미약하며 우둔하게 보이는 야훼의 지혜 앞에서 여지없이 웃음거리가 된다. 이에 대한 묘사는 “역설”(逆說)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설교의 효과적 소재가 된다. 놀랍지 않은가?!

(1)이집트 왕, 바로가 선택한 이스라엘 억압정책 제1단계는 “혹독한 강제노동의 고역(苦役)”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자손번성을 저지(沮止)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너무나 “싱겁게” 이집트 왕의 실패[敗着]로 끝난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출 1:12)는 것이다. 참으로 매우 해학적이다. 고역에 시달려 몸을 주체할 줄 몰라 자손 번성은커녕 남아있는 이스라엘 노동인력 마저도 급격히 쇠퇴하리라 기대하였던 이집트 제왕의 기대는 크게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였던 것(고전 1:25)이다. 야곱의 깨진 허리로부터 나온 70인이 대 제국 이집트의 군사력을 이겨낸 것이다.

(2)이집트 왕, 바로가 엄선(嚴選)한 이스라엘 억압정책 제2단계는 선발한 두 산파를 통하여 히브리여인의 출산을 도울 때 사내아이는 죽이라는 내밀하고 준엄한 특별 왕명을 그 신분이 낮고 비천한 두 산파가 감히 목숨도 두려워 않고 거역하고 또 기발한 임기응변의 지혜로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짐승들처럼]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출 1:19)라고 대답하여 이집트 제왕의 지혜와 권위를 큰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cf. 고전 1:27-29) 하나님은 힘의 논리를 폐기 시키시고 힘보다는 오히려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더욱이 설화 기록자는 산파들의 이 용기가 <하나님 경외의 믿음>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보도하면서 이스라엘 지혜신앙(cf. 잠 1:7)의 위대한 승리를 찬양하기까지 한다.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3)이집트 왕, 바로의 마지막 자존심의 대결인 이스라엘 억압정책 제3단계는, 메시아 예수 탄생 직전에 있었던 헤롯의 영아학살만행(마 2:16)에서처럼, 왕의 칙령을 통하여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아들이 태어나가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라고 하였다.”(출 1:22)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왕의 이 마지막 자존심마저 “하나님의 아이러니”(a divine irony) 앞에서 무참히 “웃음거리”가 된다. 지엄한 왕명의 잔인성이 오히려! 그의 딸(공주)의 탈(脫) 민족주의적이고도 세계주의적인(universal) “긍휼”(hamal)을 자극하게 하고 감히 부왕의 왕명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게 하여 “히브리인 아기”인 것을 즉각 알아차리게 하여(출 2:6; “아, 보라! 한 사내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히브리 여인 유모를 맞아들이고 양육비를 주어가며 합법적으로 기르게 하고 젖을 땐 다음에는 왕실의 양자로 맞아 히브리 민중을 해방(구원)시키는 전대미문의 이스라엘 민족 최대 지도자 “모세”(mosheh: 건져내는 자)를 창출해 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적(救援史的) 역설(逆說)이 이토록 기이하고도 아이러니하게 정설(定說)로 확인되다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을까? 실로,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할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을 사람들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고전 1:18)라고 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우리의 본문 속에는 “하나님의 아이러니”로 가득 찬 “복음적 설교”가 가득하다고 하겠다. ①바로 왕이 자기 제국의 이름을 걸고 머리를 짜내어 선택한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획을 깨뜨릴 믿을만한 도구인 저 신성시된 “나일 강 갈대 숲”(suf)이 모세를 구하여내는 주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홍해 “갈대바다”(“얌 숩” yam suf) 건넘의 한 예표(豫表)가 된다. ②이스라엘의 딸(여인)들은 죽임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오히려 바로 왕의 계획을 좌절 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산파들, 익명의 어머니와 누이) ③이스라엘 살육의 주범인 바로 왕의 그 지엄한 학살명령에 맞서서 “민족해방의 지도자 모세”를 살려내고 양육하는 탈(脫) 민족주의의 야훼 구원사의 훌륭한 협력자로서 하나님은 바로 왕의 딸을 선택하여 구원사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마치 이방인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종)로 삼으신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처럼(사 45:1-7) 여기서는 이스라엘 박해의 주범인 바로 왕의 딸을 이스라엘 구원사의 도구로 채택한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롬 11:33) (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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