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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모세의 민족해방 시도(試圖)와 야훼의 구원개입 (출 2:11-25)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10 14년전 7463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역사서(23)

출애굽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출 1:1-15:21)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실패한 모세의 민족해방 시도(試圖)와 야훼의 구원개입

(출 2:11-25)

(도입)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사리로부터 해방시켜내기까지에는 분명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施行錯誤)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 중의 대표적 범례(範例)가 우리 본문에 나타난 사건(특히 출 2:11-15a)으로 보인다. 놀랍게도, 우리의 전(全) 본문(출 2:11-25)은 이러한 시행착오가 가져다준 그 좌절(挫折)이 과연 어떻게 극복되고 또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과연 어떻게 야훼의 구원(해방)역사가 새롭게 시작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른 바, “구원사의 신비한 성격”을 증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일까?

(본문주해)

11절. “세월이 지나, 모세가 장성한 후 어느 날,” 이것은 “때”에 대한 정확한 언급을 한 것이기 보다는, 그가 성년이 된(gadhal) 후의 “어느 불특정의 시기”(yehi bayyamim hahem; on a certain day)에 일어난 일임을 표현한다. 요세푸스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고 신약성서(행 7:22-23)가 추측한 것처럼, 그 “때”를 “나이 40이 되었을 때”라고 정확하게 못 박는 것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이 11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된 표현, “에하이오, ’ehayo”(“그의 형제”[개역 개정] 또는 “동족”[새 번역])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모세가 여기서 그들 억압 받는 히브리인들이 바로 다름 아닌 자기의 동족(형제)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 자체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매우 후대의 전승인 사도행전 7:20-22는 <모세가 이집트 공주의 양자(養子)로 있는 동안에 많은 것을 배웠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는데, 아마도 이집트 왕실의 교육을 통하여 모세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인식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어머니 요게벳의 합법적 유모(출 1:7f.) 활동을 통해서도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을 인식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모세가 여기서 “할례”와 관련하여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출 4:26으로 미루어 볼 때, “할례”를 받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혹 할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할례관습이란 꼭 이스라엘만의 관습이 아니라 이집트의 관습(cf. Ishodad)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총괄적으로 판단해보면, 후대의 해석인 히브리서 11: 24-26의 주해, 즉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이집트 공주의 아들(=왕실 자손)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 동족의 수난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을 것>이라고 하는, 이른 바, 확대 주해(註解)라 할지라도 그러한 주해를 꼭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즉 모세의 “자아의식”이 성숙(成熟)해짐에 따라 이루어진 일로 예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1절에서 두 번 반복 사용된 동사, 이 “보았다”(“라아” ר-א-ה, r’h라는 동사는 mental activity를 표현할 때에도 사용됨, cf. Houtman, vol. 1, P55)는 말은 그의 정신적 의식작용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12절,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모세는 여기서 자기 동족 히브리인을 부당하게 “치는”(nakah; 살해에 이르도록 까지 구타하는 행위) 그 “이집트인을 쳐 죽여서(nakah)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모세가 여기서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먼저 확인하고 실행하였던 그 일련의 행위는 단순하게 순간적인 충동적 행위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행위를 “목격증언”할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는 행위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자기 행위를 편들어 줄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본 행위였는지는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절(節; 13-14절, 특히 14절)에 나타난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이 행위가 일어나든 당시 거기에는 히브리인을 폭행하였든 그 이집트인 감독관 이외에는 이집트인은 없었고 모두 히브리인들만이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모세의 이 행위는 단순한 충동적 행위이기 보다는 약자를 도우려는 의분의 행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튿날 다시 그 노역의 현장에 머뭇거림이 없이 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14절, 그 “이튿날”(“두 번째 날in Heb.)의 그 현장에서는, 그러나,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폭행하는 일이 아니라, 예기치 못하게도(hinneh!),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모세는 그들 싸우는 자 중 “잘못한 사람”(rasha‘a)에게어찌하여 네 동료(‘네 형제’가 아님)를 치느냐?라고 말하였다. 분명, 모세는 여기서 자신이 지도자 또는 재판관의 자격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였다. 왜냐하면 그 싸우는 자 둘 중의 한 사람을 지목하여 “라샤아” 즉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 guilty, transgressor>로 판단을 하고 그를 향해 범죄 동기를 추궁하듯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절에 의하면, 그 두 히브리인은 단지 싸우고 있었을 뿐(히브리어 natsah는 아직은 nakah의 상태는 아님), 모세가 말한 것처럼, 상대를 폭행하여 (hit) 상태는 아니었다(cf. Rashi). 아마도 모세는 “어제”(“두 번째 날”이라는 언급으로 미루어, 행 7:28; Jub 47:12) 자신이 취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의로운 일을 하였다는 일종의 “지도자적 자부심”같은 것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추궁당한 히브리인은 오히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sar)와 재판관(shophet)으로 세웠소? 당신이 어제는(행 7:28)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도 죽일 작정이오?”라고 하면서 대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신적?] 반응은 “민중 심리”의 보편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랍비 전통은(cf. Rashi, Ginsberg) 이 싸우는 두 히브리인을 민 26:9에 나타나는 두 반역자 “다단과 아비람”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모세는 [어제의]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아(’akhen), 그 일이 탄로가 났구나!’라고 말하였다. “아!”(‘akhen in Heb)라는 말은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였을 때의 느낌을 강조한 감탄사이다. 모세는 여기서 좌절한 것이다. 그의 두려움은, 그러나, 그가 어제 행한 일이 공개된 것(nodha‘a hadhdavar)에 대한 두려움만이기 보다는 오히려 민중의 배신적 성향에 대한 좌절감이 그로 하여금 더 깊은 고뇌에 빠지게 하였을 것으로도 볼 수 있다(All hope gone! cf. H. L. Ellison, Exodus, DSB Seri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82, P. 11)

15절, (a)바로는 이 일을 전해 듣고 곧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으며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게 되었다. (b)[어느 날엔가 모세는 미디안 땅,] 어느 한 우물가에 앉아 있게 되었다. 15절b로부터는 새로운 장면이 시작된다. [ ]안은 히브리 본문에는 없으나, 그러나, 히브리 본문 15절 후반부에서 반복된 말 “봐이예쉡”(wayyeshev, 그리고 그는 머물렀[앉았]다.)의 이중사용의 의의를 고려한다면, 15절을 반분(半分)하여 15a절은 이전(以前) 장면의 결구(結句)로 정리하고 나머지 15b절은 새 장면의 서두(序頭) 형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5b절의 서두에는 본래 [ ]안의 말이 있었으나 전승과정에서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봐이여히 모쉐 알-합뻐에르 뻬에렛츠 미드얀”(어느 날 모세가 미디안 땅 한 우물가에 있었다.)이라는 문장이 15b절의 본래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15b-17a절, 둘째 장면(15b-22)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 둘째 장면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정교하게, 첫째 장면(11-15a절)과는 매우 대칭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 미디안 땅의 어느 우물가에서 모세가 직면하였던 상황도 또한 약자가 강자의 불의한 폭력에 희생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그 곳으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며 그녀들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 하였을 때,(16절) 남자 목자들이 그녀들을 쫓아내어버렸던(17a절) 것이다. 일곱 딸들의 행동을 표시하는 네 개의 동사(오다, 깃다, 채우다, 먹이다)와 남자 목동들의 행동을 표시하는 한 개의 동사(“까라쉬쫓아내어버리다.) 사이의 대비는 강자와 약자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미디안에서 얻은 모세의 아들, “게르솜”이라는 이름의 어원 원인론(etymological etiology)의 문제를 설명하는데도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22절의 원인론적(etiological) 설명은 “까라쉬”(쫓아내다)보다는 “께르”(“나그네” 또는 “이방인”)를 선택한 경우이다. 약자가 강자로부터 불의하게 억압을 당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가 취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그 때 모세가 일어나서(qum) 그녀들을 구(救)하여주었고(yasha‘ah) 그녀들의 양떼에게 물을 먹여주었다(shaqah).(17b) 모세가 취한 행동은 이상의 세 개의 동사를 통하여 설명되었다. 이것은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취하였던 그 행동(치다 nakah, 죽이다 harag, 도망하다 barah)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즉 이집트에서의 행동은 파괴적이지만 그러나 미디안에서의 행동은 건설적(qum, yasha’ah, shaqah)이었다.

18-21절, 모세의 이 행동에 대한 반응은 두 개(①18-19절과 ②20-21절)의 “어찌하여”라는 “놀라움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첫째의 경우(18-19절), 그 딸들에 대한 아버지 제사장의 반응인데 그것은 “어찌하여 이렇게(‘맛뚜아’ maddua‘ ) 오늘은 일찍 돌아왔느냐?”라는 것이었다. 일상성을 깬 사건에 대한 “반가움이 동반된 놀라움”이었다. 즉 일상적으로는 힘센 남자 목자들의 횡포 때문에 늘 늦게 귀가하는 것이 딸들의 일상적 목양활동이었기 때문이다(18절). 여기(출 2:18) 나타난 제사장의 이름은 3:1(“이드로”, E 자료)과는 달리 “르우엘”(아래 출 3:1[출 18:1,2,5,9,12]의 “이드로”와 비교하라. 민 10:29와 삿 1:16; 4:11에서는 “호밥”이며, 우리의 본문[출 2:18]은 “르우엘”로 되어 있다. 이 현상은 자료의 차이 때문에 온 것이다. J는 “르우엘,” E는 “이드로” 그리고 N은 “호밥”이라고 부른다)인데 이는 야훼 자료(J)에 속한 때문이다. 이어지는 20절에서 아버지 제사장(히브리 본문에는 이름이 적시되지 않았으나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르우엘”이다.)은 모세에 대한 딸들의 이러한 소극적 반응에 놀라움을 나타내며 “어찌하여 이렇게(‘아이오 … 람마쩨’ ayyo … lammah zeh) 할 수 있느냐? 그 사람(‘하이쉬’)을 내버려두고 그냥 오다니!”라는 책망조의 반응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자기 딸들에게 모세를 불러와 음식을 대접하도록 명하였다. 딸들의 보고(출 2:19)에 대한 아버지 제사장의 이러한 반응(출 2:20-21)은 첫 장면(출 2:11-15a)에 나타난 바, 모세의 소문에 대한 바로 왕의 반응(출 2:15a)과는 전혀 상반(相反)된다. 우리는 여기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불의한 억압현실에 대한 모세의 의분(義憤)의 두 태도(11-15a절의 폭력적[nakah] 태도와 15b-17절의 도움[yasha‘ah]의 태도)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반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로운 분노행위”라고 하여도 “폭력적 대응”은 단지 보복폭력을 낳을 뿐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우리는 여기서 받는다.

22절,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역사는 이제 곧 얼마동안 “소강상태(小康狀態)의 기다림”이라는 시간(23-25절)을 갖게 된다. 모세의 십보라(미디안 제사장의 딸)와의 결혼과 아들 “게르솜”의 출생이 바로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을 예비한다.

23-25절, “세월이 많이 흘러서”(봐여히 …)라는 “시간적 연속의 새로운 시작을 표현하는 설화문학 형식의 한 전형적인 표지”에 의하여(cf. 출 2:11), 새 단락(新 段落, a new unit; cf. C. Houtman, Exodus, I, P. 327)을 시작하고 있는 이 부분은 모세의 “전형적인” 시행착오(출 2:11-22)와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구원사의 시작(출 3:1-4:17) 사이에, 즉 야훼의 새 구원사를 열기 직전(直前)에 배열되어(출 2:11-22 → <출 2:23-25> → 출 3:1-4:17), “이스라엘 구원사의 기본성격”이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천명하는 역할을 한다. 노트(M. Noth)는 이 단락이 갖는 그 신학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지만, 캇수토(U. Cassuto)나 차일즈(B. S. Childs), 엘리손(H. L. Ellison), 후트맨(C. Houtman) 등등의 주석가들은 이 단락이 출 2:23과 출 4:18(E)-19(J) 사이에서 신학적 돌쩌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노역으로 고통을 가중시켰던 왕이고 또 동시에 모세의 생명을 노렸던 그 “이집트 왕이 죽었다”(출 2:23a)는 사실을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이 사실은, 시기적으로 “모세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는 것(출 4:19)을 알리는 의미가 있겠지만, 신학적인 반성을 통해서 보면, 민족해방 지도자 모세의 목숨을 노리는 이집트 왕(구원사의 최대 스칸달론)이 죽었는데도(!) 새로운 운명전환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적막 같은 좌절”이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23b절은 이 사실을 매우 리얼하게 묘사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 고역(苦役, ‘abodhah) 때문에 신음하며(’anah) 부르짖었더니(za‘aq) 그들의 탄식(sh-w-’ )이 하나님께 상달(上達, ‘alah)되었다.”(출 2:23b)는 것이다. 백성의 신음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는 것이다.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망이 오히려 희망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부르짖음의 기도”를 드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실로, 하나님의 개입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Our only hope is in God.) 이 사실을 매우 확실하게 증언한 것이 24-25절이다.

24-25절, 이 두 절은 각각 두 번씩, 모두 네 번,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주어를 반복하고 그 주어에 해당 동사를 병렬시켜 다음과 같은 수사형식을 취한다.

샤마아 엘로힘 - 짜칼 엘로힘 - 라아 엘로힘 - 야다아 엘로힘

하나님이 들으셨다 - 하나님이 기억하셨다 - 하나님이 보셨다 - 하나님이 아셨다

이 수사구조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엘로힘” 반복/강조 사용이 말하듯이 이 수사 구(修辭 句)는, “이스라엘의 운명전환은 전적으로 하나님(엘로힘)의 선수(先手) 개입(介入) 때문에 일어난다.”(Houtman, P. 330)는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모세가 기도한 때문은 결코! 아니다. pace Artapanus, Childs, et al.). 억압 속에 있는 민중이 그 아픔 때문에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은 그 부르짖음(za‘aq)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의 반응이 다름 아닌 구원역사의 시작점이요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분명, “부르짖음”이 구원역사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이 “부르짖음” 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전적으로 그것에 대한 하나님(엘로힘)의 긍휼의 반응 때문에만 비로소 일어나는 것임을 밝히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주어(主語) “엘로힘”을 받는 네 개의 동사, “듣다” “기억하다” “보다” “알다”의 긍휼동작(矜恤動作)들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긍휼반응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부르짖음)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과 맺으신 그 계약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즉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기본 틀(frame)은 <고난 속의 부르짖음 + 하나님의 긍휼반응>이라는 이중구조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도출: 설교응용)

우리 본문이 말하려는 바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하나님의 세계(인간) 창조의 궁극목표이지만, 그러나, 그 선하신 목표의 완성을 철저히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폭력적 혁명”은 하나님의 바라시는 뜻은 결단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구원은 오직 고난 속의 인간들이 인간자신 안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방향을 돌려서, 하늘의 하나님(엘로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긍휼”이 작동되며 그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다름 아닌, 인간 구원현실을 창조해내는 유일한 동력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증언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긍휼”(출 34:6)은 반드시 “진통의 과정”을 통한다는 것이 우리 본문의 강조점이다. 이것은 구원섭리와 창조섭리가 갖고 있는 역설적 신비이며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계약관계를 기억하시고 고통을 보시고 그 처지를 아시게[“알다”는 히브리말은 “경험하다”를 의미함]될 때>에만 구원이 창출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간과 이 세계를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는 길,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내는 길, 그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출 3:1에서 시작되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이 사실에 대한 증언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겠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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