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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소명 : "야훼“는 누구이신가? (출 [2:23-25] 3:1-4:17,[18-19])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10 14년전 9509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역사서(24)

출애굽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출 1:1-15:21)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모세의 소명 : "야훼“는 누구이신가?

(출 [2:23-25] 3:1-4:17,[18-19])

(도입)

출애굽 해방을 이끌 미래의 민족 지도자인 모세의 (첫)소명(召命) 사건은 모세의 생명을 노리던 이집트 왕의 죽음에 관한 보도(출 2:23-25, P)와 이집트 왕의 위협이 사라진 것을 계기로 모세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시는 야훼의 명령에 대한 보도(출 4:18-9, J)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즉 우리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은 모두가 “광야의 타지 않는 불꽃 떨기나무 앞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보도”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즉 ①출애굽 해방 사건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사건일 뿐, 결코 역사의 우연한 해프닝이나 역사적 인과(因果)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과 ②출애굽 해방을 주도하신(initiate) 구원의 신 “야훼”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곳은 미디안 광야의 호렙(시내) 산(山)이었다는 것, 그러므로, 그는 결코 이집트 제국의 신이거나 가나안 풍요제의(豊饒祭儀: 바알祭儀)의 물질의 신(sex의 신)이 아니시라는 것, 그리고 ③이 야훼 신은 고난 속에서 탄식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구원의 응답을 하시는 구원(해방)의 신이시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일종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신 “야훼”와 “야훼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즉 “야훼”가 누구이신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소명”(召命, calling, 3:1-4:17)사건을 매개로하여 일어난다.

(본문주해)

고난(苦難) 속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ze'aqah)에 대하여 하나님의 “들으심-기억하심-보심-아심”의 반응(反應)이 있었다는 신앙고백적인(신학적인) 진술(출 2:23-25, P기자의 자료)이 하나의 “막간극”(intermezzo)처럼 짧게 소개된 후, 우리 본문의 설화 편집자는 미디안에서 보낸 모세의 생애 동안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출 2:21-22;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하고 게르솜이라는 아들을 낳기까지의 오랜 삶의 과정에 대하여 랍비전승과 무슬림 전승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게르솜을 낳기까지의 세월이 최소한 10년 세월은 걸렸다고 말하고 있다. Cf. Ginsberg, Weil, et al.)을 출 3:1-4:19 속에 짧게 요약하여 소개 한다. 그러나 이 요약은 철저히 “소명”(召命,calling)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된다. 3:1, 그의 소명(召命)은 다윗(삼하 16:11,19; 17:15,34)이나 아모스(암 1:1; 7:14의 소명사건)처럼 양치기 목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고 없이(!) 야훼의 “부름”을 받아 이루어졌다(야훼의 이니셔티브 강조). 그 삶의 현장은 사제(司祭) “이드로”(출 2:18에서는 “르우엘”로 되어 있음)의 딸들로부터 물려받은(인수받은) 목양(牧羊)의 삶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양치기에게 붙여진 “목자” (ro‘eh)라는 칭호가 고대 중동의 세계에서는 “왕” 즉 백성의 지도자에게 붙이는 칭호로 사용된 것(cf. Josephus, Ginzberg, 이스라엘의 경우는 특히 다윗 왕에게 자주 결부된 칭호)이기는 하지만, 모세의 경우에서도, 시 77:20[21]에서와 출애굽기 미드라쉬(S. Buber, Midrash Tanhuma, 1885, trans. in 1980)에서처럼, 그렇게, “민족의 목자”라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아모스” 예언자의 소명과 더 잘 평행된다고 하겠다, 암 7:14). 모세가 그의 양떼를 이끌고 우연히 가게 된(히브리어 hayah의 의미[happened to be, 또는 had become의 의미] 참조) 곳은 미디안 땅 “호렙”(E, 그러나 J에서는 “시내”)이었다.

3:2, 모세는 늘 하듯이 그의 일상적인 삶의 한 과정에서(아모스처럼),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 한 기이한 현상, 즉 “불은 붙었으나 타서 소멸되지는 않는 떨기나무(sene, bush)”를 목격한다. 설화자는 이 떨기나무 한 가운데 야훼의 사자(使者: messenger, male’ak; 4절에서는 이 使者가 야훼 자신이라고 記述)가 현존하고 계셨다고 기술(記述)한다. “”은 구약에서는 “신(神) 계시(啓示)의 표지”로 알려져 있다.(창 15:17; 출 19:18; 신 4:11f. 등) 그리고 “떨기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 “스네”(sene; 시내 산의 “시내”와는 자음철자가 다름)라는 말은 여기 출 3:2(2회),3,4에서 총 4회 사용되었고 이 이외에서는 신 33:16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던 단어로서, 시내 반도에서 자라는 “관목”(灌木; shrub)/“떨기나무”(bush), 즉 희랍어 구약성서(LXX, βάτος)와 라틴어 구약성서(Vulgata, Rubus discolor)는 “심홍색(深紅色) 딸기나무”라고도 번역한 “키가 작고 더부룩한 떨기나무”를 지칭하는데, 이 “떨기나무”는 여름의 태양 열기에는 쉽게 말라 쉽사리 불을 일으킬 만큼 불에 약한 나무(U. Cassuto)로서 아랍인들이 “스네”라고 불렀던 키 작은 나무다. 그러므로 감히 신 현현(神 顯現; theophany)이라는 신성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만한 나무가 전혀 못되는 나무다. 그런데, 이런 떨기나무 한 가운데에(“밋톡”) 야훼께서 현현(顯現, appearance)하시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즉 이 가시덤불이 신 계시(神 啓示)의 장소가 된 것이다.

3:3, 이런 예기치 못한 현상의 발생 때문에 모세의 삶의 일상성(日常性)은 깨어지고, 그리하여 모세는 그 가던 발길을 돌이켜(sur) 그 타지 않는 불꽃 “스네”에 접근하려고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저런 한낱 불쏘시개 같은 가시덤불이 저토록 강하게 작렬하는 불길에 휩싸였는데도 타서 소멸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일상(日常)의 상식(常識)을 무너뜨리는 건이었기 때문이다.

3:4, 야훼께서(사마리아 역본은 “하나님께서”로 고침) 모세의 “돌이킴”(sar, sur의 qal 분사형)을 보시고

모세야, 모세야!”라고 반복해서(cf. 창 22:11; 46:2; 삼상 3:10) 그를 부르셨다. 소명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 야훼의 “사자”(使者)는 여기서는 야훼 자신과 일치된다.

3:5, 그 다음 야훼께서는 모세를 향하여 “네가 서 있는 그 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에”(ki hammaqom ’asher ’attah ‘omedh ’alayo ’adhamath-qodhesh hu’)가까이 오지 말고 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shal- ne‘alekha me'alraghlkha)고 명령하셨다. 이 말은, 문맥상으로는(ki), 그 장소가 신 현현의 거룩한 장소(세속의 접근 금지 장소)이기 때문에 속된 것과 분리하는 의미에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cf. 사 6:3-7). 그러나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그 땅은 그 땅의 원(原) 소유자이신 야훼(레 25:23)께서 성민(聖民)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선물”(gift)로 성별(聖別)하여 주실 땅이기 때문에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땅”(’erets)이 아니고 “농경지” (’adhamah; 위에서 언급한 ’adhamath-qodhesh를 참조하라. 특히 그 ’adhamah가 신의 현존장소로서 성화되기 전에는 창 4:11과의 관계에서 볼 수도 있기 때문.)를 지칭하여 말하고 있어서, 레위기의 문맥(레 25:23, ki-li-ha’arets)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바, 벗어야 할 그 “”(sandals, na‘alayim)은 세속의 먼지로 더렵혀진 것이고 또 그 “”(raglayim)은 성기(性器)의 완곡어법(婉曲語法)으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신성한 곳과의 접근을 금기시(禁忌視)하였을 수도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확대해서 의미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바, 신을 벗는 것의 의미도 맹세의 보증으로서 행하는 관습(신 25:9; 수 5:15; 룻 4:7: 이 본문들에서는 벗는 신발은 항상 단수로 말하고 있으나 출 3:5에서는 신발과 발을 모두 복수로 말하고 있다!)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3:6, 타지 않는 불꽃떨기 속의 야훼 하나님은 자신을 “네 조상[들]의 하나님”(엘로헤 아비카/아보테카)이라고 밝히신다. 3:6의 “네 조상의 하나님”(엘로헤 아비카)은 그 조상이 히브리어로는 단수로 되어 있어서, 3:15의 “네 조상들의 하나님”(엘로헤 아보데켐)과 구별됨으로 3:6의 “조상의 하나님”을 “아므람(출 6:20)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네 조상의 하나님”(엘로헤 아비카)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세 선조를 하나로 엮은 표현”(Keil)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조상의 하나님”(엘로헤 아비카)은, 문맥상 출 2:24f.에 나오는 바, “세 조상들에게 후손과 땅에 관한 약속을 주신 그 <약속의 신>”과 연속성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창세기의 하나님)이시지 결코 모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신”은 아니시기 때문이다(C. Houtman)

3:7-8(J),9-10(E), 두 개의 “신(神)의 자기의지(自己意志) 계시(啓示)”가 나란히 병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7-8절)는 야비스트(J)의 것이고 후자(9-10)는 엘로히스트(E)의 것으로 분류된다. 전자(J)에서는 신탁(神託)의 형식으로 야훼의 자기의지(自己意志)가 계시(啓示)되고 있고, 후자(E)에서는 명령(命令)의 형식으로 야훼의 자기의지가 계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모두가 동일성격(!)의 계시내용을 갖고 있다.: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보고, 듣고, 알고, 내려가서) “인도(구원)하여 내시려하신다.”는 것이다(natsal/yatsah). 즉 야훼는 “부르짖음에 대하여 구원의 충동을 느끼시는 분”이시다.

3:11-4:17, 야훼의 “부르심”(소명)에 대한 모세의 사양(거절)의 반응은 넷으로 나타난다. ①3:11-12, ②3:13-22, ③4:1-9, 그리고 ④4:10-12, 그러나 4:13-17은 다섯 째의 사양(辭讓) 기록이 아니라 ①의 반복 또는 ④에 대한 추가설명에 불과하다. 즉 모세의 사양(辭讓)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신의 부름(소명)은 불가항력이라는 것이다.(cf. 요 15:16) 그렇다면 그분 “야훼”의 정체와 본질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하나님의 네 가지 반응 속에 적시(摘示)되어 있다.

3:12(first objection), “야훼는 <에흐예 임막>(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I will be/I am[에흐예] with you.)이시다.”는 것이다. “함께 있겠다.”(to be with, hayah+‘im)는 어구는 구약에서 약 100회 가량 사용된 어구로서 “약속”에 대한 보장을 해줄 때 흔히 사용하는 말로서, 여기서도 모세에게 맡겨진 “출애굽 구원에 관한 미션”(mission)이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출애굽 구원은 “너”(모세)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야훼 하나님)의 관여(關與, involvement) 여하에 달렸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3:14-15(second objection), “야훼는 <에흐예 아쉘 에흐예(나는 나다./나는 나일 것이다 I am[LXX, Vulgate]/I will be[Aquila, Theodotion] who I am/I will be.)>이시다.”는 것이다(여러 Targum 역본들은 출 3:14의 이 부분을 아예 번역하지 않고 두기도 한다.) 그리고 3:15에서는 이 이름이 “야훼”라는 것이고 그 “야훼”는 “조상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덧붙여 설명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다”(=“나는 나일 것이다”=“에흐예 아쉘 에흐예”)라는 이 난해한 문장의 의미가 우리의 “문맥에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이 문장이 과연 “야훼”라는 이름의 기원(起源)이 되는 것인지?, 된다면, “에흐예”(I am/I will be)라는 단순 동사가 어떻게 “야ㅎ웨”라는 사역동사(使役動詞; hiph‘il 동사, He causes to be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의 <동사문장의 이름>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이 문제는 오랜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말은 이 네 자음문자(tetragrammaton; YHWH)가 본래는 “야ㅎ웨”(YaHWeH)라고 발음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와 이 네 자음은 hwy/hwh(=히브리어 hyh)라는 어근(語根)에서부터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그 “보편적 견해”(the idea which is now accepted almost universally, TDOT, vol. V. Pp. 500, 510)를 전제한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문제에 관한 학자들 간의 일반적 합의점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단지 우리는 ①구약의 대표적 제의적 외침(cultic ejaculation)의 의전문형(liturgical formula)인 “할렐루-야”의 “야” 또는 “야후”가 야훼 신명(神名)의 “이니셜”(initial)이라는 점과 ②“엘리-야” 또는 “예레미야]후]”와 같이 야훼 신명(神名) “이니셜”(“야” 또는 “야후”)을 자기 이름의 에 달고 있는 “이름들”(theophoric names)과 “요엘” “요나단”과 같이 이 “이니셜”을 자기 이름의 에 붙이는 이름들(theophoric names)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신명”(神名)을 일단 “야-훼”라고 부를 가능성이 있음을 본다(“여호와”라는 발음은 YHWH라는 聖 四字音[tetragrammaton]에 “아도나이”[主], “엘로힘”[하나님], 또는 “숴마”[“그 이름”을 의미하는 아람語]의 母音을 붙임으로서 일어난 현상). 따라서 이러한 전제 위에서와 그리고 출 3:14와 출 3:15의 문맥상의 기능을 통해서 보면, “야훼”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하야”(“be”)동사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는 것임을 말한다고 보면, 이 “야훼”라는 이름은 “하야”(“be”)의 사역형(hiph‘il)이라는 결론을 지어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는 경우, “야훼”라는 이름은 “있게 하는 자는 있게 하는 자다.(아흐에 야쉘 아흐예)” 또는 “나는 있게 하는 자다.”(=“나는 창조자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I cause to be who I cause to be. 또는 I am the one who causes to be.)

이러한 문맥에서 본다면,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기, 이 시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계시(啓示)하신 그 문맥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문맥상의 의미는 다음 몇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나 야훼는 결코 그 무슨 별다른 신(神)이 아니라 네 조상의 하나님(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나타나시어 그들의 도움이 되신 신, “엘”/“엘로힘”)과 같은(동일한) 하나님이시다(우리나라의 경우라면, “하느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형식의 말과 같은 유형의 말일 수 있을 것이다.).

(2)“야훼”라는 이름(이름이 그의 실재다. Nomina sunt realia.)은 종교제의가 만들어낸(지어낸) 이름일 수는 없다. “야훼”라는 말은 단지 그분의 본질의 핵심을 설명-서술(predicate)한 형용사“(epithet)일 뿐이다(yahwi-’el, cf. yahweh 'elohim)

(3)“야훼”라는 말의 의미는, “야”로 시작하는 한, “He is.”가 아니라 “He causes to be=He creates”이다.(LXX가 말하는 바, ὁ ὤν은 아니다.)

(4)그러므로 야훼는 여기서 모세에게 “나는 출애굽 구원을 창조할 자다.”라는 뜻의 계시(啓示)를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 계시의 의미는 <야훼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한 自存者가 아니라! 역사상의 인간, 즉 개인 또는 집단에게 구원을 있게(창조)하는 자>라는 것, 그러므로 구원역사는 곧 창조사라는 것을 알리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야훼는 창조자이며 해방자요 동시에 해방자이며 창조자이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원”은 역사의 필연 또는 인과(因果)의 결과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의한 창조주의 새 창조(재창조)행위일 뿐이라는 것(특히 제2이사야 참조)이다. 이것이 모세의 소명 때, 모세에게 준 결정적인 인센티브(incentive)라는 것이다.

3:16-22, 창조자이시며 해방자이신 “야훼”는 “히브리사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상의 하나님(엘로헤 아보데켐)은 “엘”(창조주)이시며(엘로힘=엘),이 “엘”은 “야훼”이시고 이 “야훼”는 또한 “히브리인의 하나님”(’elohe ha‘ivriyim)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히브리인”은, 아직은, 민족단위를 이루지 못한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무리”에 불과하다. 야훼 하나님은 이들을 돕는 자가 되셔서 그들 떠돌이들로 하여금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분이셨다. 그리고는 “가나안” “헷” “아모리” “브리스” “히위” “여부스”사람들이 사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비옥한 땅; J가 즐겨 사용하는 호칭)을 국토로 주실 분이시라는 것이다. 모세는 이러한 야훼의 구원의지를 계시 받고 그 구원방법까지를 미리 인지(認知) 받는다. 그 예고 받은 구원과정은 <이집트 왕이 완강히 저항[억압의 고난] - 야훼 하나님께서 “기적으로”(강한 손[과 편 팔]로, 출 3:19; 신 26:8) 이집트를 치심 - 출애굽 구원>이라는 형식을 취할 것임이 예고된다. 즉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에 “관여”(關與)하신 것이다. 이제 그는 “Being with”가 되신 것이다.(cf. 출 3:12; 4:15).

4:1-9(third objection), 이 부분은 네 번의 사양(辭讓/拒絶 objections) 중에서 앞의 것들과 구별되는 부분으로서 소명(召命)을 받은 자(계시[啓示]를 받은 자)의 그 소명(계시[啓示])의 진정성(眞正性:: genuineness: authenticity)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즉 소명(계시)을 받은 자라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세 가지의 이적(표적, signs) 행위의 능력을 주신다(①지팡이가 뱀이 됨, ②손의 피부에 나병을 일으킴, 그리고 ③이집트에서 행할 표적으로서, 나일 강물을 피로 만드는 일). 이 세 이적들은 모두가 다 그 형태와 내용이 “변(變, change)하게 하고 또 그것을 다시 회복(回復)하게하는 기능을 하는 것”(transformation)으로 되어 있는데(삶→죽음→삶) 이것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창조의 기능”을 암시하며 동시에 소명 받은 자(모세)의 뒤를 밀어주는(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부분은 다음 네 번째의 사양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표적행위들의 의미를 “알레고리”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Knight, 랍비들, 교부들[특히 Origen], 등)은 여기서는 이차적인 문제들이다. 여기서의 주요 강조점은 <야훼는 창조적 능력을 가진 분이시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는데 있다.

4:10-12(fourth objection), 여기서의(대화의 종결부분!!에서의) 특이한 점은 모세가 이 마지막 단계에 와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야훼”를 가리켜 “주여!/나의 주여!”(“아도나이” 대화 때 불렀던 “나의 주여!”라는 )라고 주종(主從)의 관계로서 부르고 자신을 가리켜서는 “당신의 종”(“압떼카” ‘avdeka)이라고 칭(稱)하였다는 점이다(10절).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두 번이나 사양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 번째는 표적행하는 능력까지 갖추어주셔서, 이젠 영락없이 야훼께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야훼의 “종”(’evedh)이 되고 말았는데, 그러므로 야훼께서는 자신을 마음대로 이집트에 보내실 수는 있게 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승인하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제 모세는 야훼의 파송명령에 따라 이집트로 떠나야하도록 결정되었는데, 그럼에도, 자신은 본질 면에서 볼 때는 여전히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둔하고 무디다”는 표현을 히브리어로는 kevadh라고 표현함, 이 말은 be heavy/be dull을 의미함),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말재주가 없는”(문자적으로는 “말의 사람이 아닌”을 의미) 사람으로 나아있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여전히 “메신저”(使者; messenger)로서는 적격자가 아닌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것이었다. 땅의 먼지로 빚어진(창 2:7), 유한한,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흙덩이의] 사람”에 불과한데(그것이 나의 진정한 현실인데), 무엇이 이러한 현실까지도 극복할 수 있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세의 반응에 대한 다음과 같은 “야훼” 하나님의 결론적 답변(11-12절)이 갖고 있는 그 의미라고 하겠다.

누가 사람에게 입(“페”)을 만들어주셨으며(sim동사) 누가 벙어리(“일렘”)를 만드셨고 귀머거 리(“헤레 쉬”)를 만드셨고 눈 밝은 자(“피케아하”)를 만드셨으며 눈 어두운 자(“이웰”)를 만드 셨는가? (여기 사용된 “만드셨다/만들어주셨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sym 은 창조행위를 가리킴. cf. Houtman, Exodus, I, P. 410)

나, 야훼가 아니냐?(11절)

자, 이제 가거라! 내가 네 입과 함께 하겠다(“에흐예 임-피카”). 네가 말할 것을 내가 네게 알려[가르쳐, 히브리어 “야라”=“토라”라는 말의 어근사용!!을 주목하라]주리라(호레티카”).(12절)

근본 문제는 모세가 “메신저”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느냐 아니냐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보내시는 분, 그분이 어떻게 하시느냐 하는 것에 모든 것이 전적으로 달려 있으므로 모세에게는 <믿음으로> 복종하고 이집트로 가는 그것만이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이냐?

맹목적 복종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인가? 11절에 나타난 야훼의 이 답변은 사실 그 믿음의 본질을 알려준다. 즉 인간이 갖거나 잃거나 할 그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거나 간에 그것은 단지 창조주 야훼만!!이 결정하신다는 선포(생사화복을 모두 “홀로” 주관하시는 분이 야훼이시라는 선포)로서 그 대답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모세가 “자신이 할 수 없으리라고 염려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걱정을 이제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자(One who causes to be)는 하실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불가능의 현실 앞에서지만,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또 동시에 있는 것을 없게도 하시는 창조주>(One who is가 아니라 One who causes to be 즉 One who creates =Creator!!)의 행하심 안에만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12절에서는 그 대답을 좀 더 구체화하여 설명한다. 즉 창조주 야훼께서 “말의 능력이 없는 모세”의 입술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인 말로 약속하신 것이다. 이 “창조주(=야훼=One who causes to be=One who creates)의 함께 하심”(Being with, ’ehjeh-'immakh[‘impikhah], 출 3:12; 4:12)만이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transform)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해주며 모세로 하여금 이집트로 가기로 결심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incentive)를 줄 수 있는 바로 그 요소라는 것이다.

13-17절, 이 부분은 그러므로 다섯 번째의 사양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은 첫 째 사양을 다시 반복하고(13절) 또 마지막 네 번째의 사양을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아론이 모세의 대변인이 되는 이 일은 예언자 기능이 본질적으로는 “대언(代言) 기능”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출애굽 구원은 대언자(代言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고 “대언자”(代言者)는 단지 야훼의 뜻을 전하는 “나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모세가 염려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18-19절, 모세가 야훼의 부르심에 따라, 이집트로 떠나가는 것에 관한 이 마지막 결구(結句)는 출 2:23의 출애굽 구원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에 관한 말과 평행을 이루며 그리고 또 이 출 2:23-25는 출 4:18-19와 함께 모세 소명 기사(記事; 출 3:1-4:17)를 앞-뒤로 감싸 안는 일종의 “인클루시오”(inclusio)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도출: 설교응용)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들을 들을 수 있고 또 그 메시지를 설교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1)“야훼”는 단순한 “존재”(Being, ὁ ὤν), “초월적 타자(他者)" 또는 "역사 초월적 자존(自存)의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One who is/One who exists가 아니라(!) One who causes to be=One who creates이실 뿐이시다. (출 4:10-12)

(2)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존재하게 하시는가? 무엇을 창조하시는가? 그 대답은 <야훼는 구원(해방)이 필요한 자에게 구원(해방)을 있게(창조) 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이다.(출 3:7-8, 9-10; 3:16-20) 야훼의 이러한 창조사적/구원사적 기능을 설명하는 고전적 성구(聖句)는 출 33:19에서 발견할 수 있다.

(3)“야훼”는 인간구원의 충동을 그들 인간들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으로부터 받으신다.(출 2:23-25; 3:7-10)) Cf. 김이곤, “Outcry" Interpretation, July 1988, Pp. 229-239.

(4)야훼는 그의 본질에 있어서 “약자(고난 받는 자)의 삶 속에 자신을 성육(成肉)시키시는 분”이시다. 타지 않는 불꽃떨기 속에 현존 하시는 분이시다(출 3:1-12) 고난 받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 현존하신다.

(5)야훼는 고난 받는 우리들에게 “에흐에 임막크”(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에흐에 임피카”(내가 너의 입술과 함께 하겠다)라고 약속(約束)하시는 분이시다.(출 3:12; 4:12,15) 이 말이 우리에게는 최대의 희망이요 위로이다. 이 약속(約束)을 믿는 “신앙”을 우리는 “마누엘”신앙이라고 부른다. 이 임마누엘 신앙은 에녹(창 5:24), 모세(출 4:12,15), 이사야(사 7:14), 예수(마 1:23)에게서 모범적으로 계시(啓示)되었다.

(6)이러한 “야훼”의 본질이 계시된 장소광야의 하나님의 산이었다. 이것은 야훼 신은 이집트 제국의 신, 제국주의의 신, 힘의 논리의 신, 정복의 신, 십자군이나 지하드(Jihad)의 신은 아니라는 것을 역설(力說)한다. 또한 야훼 신은 가나안 풍요제의 “물질의 신”, “관능(官能; sex)의 신”은 결코 아니라는 선포이기도 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훼”는 단연코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 진통의 과정을 통하여, 끝내는 긍휼을 창조해내시고야 마시는 분>(출 33:19; 34:6)이실 뿐이라는 것이다.(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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