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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에 의한 출애굽 구원사건의 성격 예시(豫示) 설명 (출 4:18-31)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11 14년전 7947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 25

출애굽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출 1:1-15:21)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야훼에 의한 출애굽 구원사건의 성격 예시(豫示) 설명

(출 4:18-31)

도입(導入)

우리의 본문은 통일성이 결여된 여러 추가적인 단편자료들을 “출애굽 구원사건을 미리 설명해 주려는 의도”에 따라 수집, 결합, 편집된 문단(文段)으로 보인다. 문단 전체는 “이미 선교임지인 이집트로 돌아간 것”으로 보도하는 20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이집트로 돌아가기 직전(直前)!의 광야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아놓은 형태이다. 비록 그 배열은 이집트로 돌아가는 과정을 순서적으로 정렬해 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즉 <그의 장인인 이드로에게 작별인사를 함(18절) -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는 모세의 생명을 노리던 사람들(cf. 출 2:15a)이 모두 죽었으므로 위험요소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려주심(19절) - 야훼께서 모세에게 바로의 고집(완악/완고한 마음) 때문에 생길 난관의 때에 대처할 말을 친히 일러주심(21-23절) - 길 도중의 어느 노숙 장소에서 밤에 일어난 일에 관한 보도(24-26절) - 이집트에 있는 아론이 야훼의 지시를 받고 광야로 마중 나감(27-28절) - 마침내 모세가 마중 온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장로들과 백성들의 예의를 갖춘 영접을 받음(29-31절)>이라는 구성으로 잘 정렬되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서로 간의 연속성은 매우 불투명하다. 예컨대, 야훼문서(J; 19-20a, 21-23, 24-26, 27-31절)와 엘로힘문서(E; 18, 20b절) 사이의 불연속성은 전승자료 사이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20b절과 21-31절 사이의 불연속성, 그리고 특별히 24-26절과 그것의 전후문맥과의 불연속성은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은 출애굽 구원과정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모세가 이집트로 파송되어 돌아온 사건은 18-20절로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봐이요멜 야훼”로 시작하는 J 자료 문단(文段)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21-23, 27-31절) 연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출처가 불분명한 낯선 한 자료(24-26절)가 반복된 두 자료 사이에 끼어들어 와서 또한 역시 비슷한 설명기능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세가 이집트 임지(任地)에 도착하기 이전에 출애굽 대() 구원사건의 그 성격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려는 J 성서기자의 의도가 특별히 강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 본문이 증언하려고 하는 바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하여 모세가 이미 이집트로 돌아갔다고 보도하는 18-20절과 27-31절은 그 기능을 다한 것으로 접어두고, 그 대신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의 것인, 반복된 설명문단(①21-23절과 ②24-26절)을 중심으로 하여 설화 편집자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본문주해)

21-23절은, 20a절과는 전혀 달리, 모세가 이집트로 출발하기 전()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즉 이 본문은 “봐이요멜 야훼 …”(그리고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로 시작하는 형식을 띤, 이른 바, <모세에게 맡기신 야훼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모세에게만 알려주는 내용이고 그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신탁(神託; oracle)의 형식으로 된 것으로서 야훼께서 이집트 왕(바로, Pharaoh)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모세가 야훼를 대신하여 전언(傳言; messenger formula)해야 할 말씀이었다.

모세에게(독자들에게도) 내밀하게 알려주는 그 내용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주신 모든 “모프팀”(“이적/징표”의 복수형)을 “바로”왕 앞에서 행하라는 것>과 그리고 <야훼께서 “바로”왕의 마음을 고집 부리도록 강하게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쉽게 내보내지 않도록 하리라는 것>(“강퍅하게” 또는 “완악하게”라는 개역 또는 개역개정 역본의 번역은 히브리 원문[“하짜크” strengthen]에 대한 誤譯임)이다. 이것은 <모든 능력(권능)이 오직 야훼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모세에게와 그리고 모든 독자에게 알려주는 기능을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노-야훼주의(mono-Yahwism)를 증언하고 있는 말이다. 야훼만이 홀로 신()이시라는 말이다. 야훼께서는 바로 왕의 깊은 속마음을 마음대로 조정하실 수 있으신 유일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 전체를 조정하는 끈(strings)을 당기고 늦추고 하는 모든 조정행위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으신 유일한 분이시라는 말이다(It is Yahweh who pulls all the strings!). 그러한 그 야훼께서 지금은 자신의 아들이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볼모로 잡고 있으면서 죽음에 이르도록 까지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그 이집트 왕에게, 오히려 역(逆)으로, 쉽게 굴복하지 않는 강한 고집을 심어주셔서 쉽사리 이스라엘의 자유(구원/해방)를 허락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야훼께서는 과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구원/해방을 일구어내시겠다는 것인가? 그 대답은 모세에게 위탁하여 바로 왕에게 선포하게 하신 그 “신탁(神託, oracle)의 말씀”(koh ’amar YHWH[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문단) 속에 담겨있다.

신탁(神託)의 내용(22-24절)은 <이스라엘은 나[야훼]의 아들, 즉 나의 “맏아들”(bekor” “prototokos")이다. 라는 것과그래서 나는 나의 아들[내 백성; LXX]을 내어보내어 그가[그들이] 나를 예배할 수 있도록 하라고 네게 말하였으나 그러나 너는(이집트 왕 바로) 그를[그들을] 내어보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렇다! 그러므로 내가 정녕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라고 하는 두 “말씀”(“오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선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아들로서 “선택”[養子]하였다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모-자식의 혈연관계라는 것이며 따라서 야훼께서는 “혈족[친척, kinship]의 신분으로서 볼모잡힌 자기의 아들을 구출/속량하여야 할 의무”(창 14:12-16; 레 25:39-43; 느 5:8)를 가지는 것임을 적시한다. 이것은 고대 중동세계가 행해 온 친족에 의한 속량관습을 반영한다. 특히 여기서 이스라엘을 야훼의 “맏아들”(“뻬콜”)이라고 한 것은 또한 “모든 초-태생(初-胎生)은 다 야훼의 것이다”(출 13:2; cf. 출 13:11-15)라는 구약의 법을 “바로 왕”(이집트 왕)이 범법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출 4:22는 맏아들 죽임의 재앙에 대한 구약 성서적(Elohist) 입장을 설명하는 결정적 전거(典據)라고 할 수 있다. 즉 둘째로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의 ‘맏아들’이니 <맏아들 죽임>에 대한 보응은 <맏아들 죽임이다>라고 하는 선언 ”이었다. 이러한 계율을 가리켜 흔히들 “동태(同態)복수의 법”(lex talioni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법의 적용은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해석학의 근본이념에 속한다. 즉 출 4:22-23에 나타난 “동태(同態) 복수”의 형식을 빌린 표현형식은, 왕하 16:7과 말 1:6이 잘 암시하고 있듯이,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여 마치 야훼를 동태복수법의 형식으로 보복하시는 복수의 신으로 이해하여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고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아들> 또는 <주인-종>의 관계로 은유(隱喩; metaphor)하는, 이른 바, 계약관계의 언어(the language of covenant)로 은유한 그 신학적 정황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해석되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야훼께서 이집트 왕에게 전언(傳言)한 그 말의 의미는, 창 4:14에 나타나고 있는 그 살인자 가인에 대한 혈족보복의 관습이 말하고 있듯이, “혈족의 생명에 대한 같은 혈족(kinsman)의 보호의무의 관습”에 비유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맏아들 관계에 있는 아들 이스라엘에 대한 아버지 야훼의 부자(父子)계약관계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 표현으로 읽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바, 해석상의 중요한 점은 이러한 계약관계의 표현이 경고적인 성격을 띨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의미를 강조하는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즉 23b절의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정녕 네 아들, 네 맏아들을 죽이겠다.”(hinneh ’anokiy horekh ’eth-binekha bekhorekha)라는 어투는 “[맏]아들의 죽임”이라는 <희생을 통한 구원/해방>주제를 “특수한 문학적 강조기법”(히브리어 hinneh ’anokhiy horekh는 指示的/直證的 강조 수사법에 의한 강조화법이다. C. Houtman, Exodus, I, P. 18)을 사용하면서까지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 이집트 왕의 “[맏]아들이 이스라엘 억압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는가?” 죄가 있다면 바로 왕의 죄이지 그의 아들의 죄는 아니다. “동태복수법” 원리에 구속력이 있기 때문인가? 그러나 야훼 하나님이 그 무슨 이 세상에 현존하는 “동태복수법”이라는 그 어떤 한 법리(法理)에 구속을 받으신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 단지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의(自意)에 의하여 “[맏]아들의 희생”을 통한 이스라엘 구원/해방을 계획하셨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야훼 하나님 뜻이었고 야훼 자신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야훼께서 다음 문단(文段)에서 이러한 그의 의지(意志)를 다시 한 번 더 “상징적 행위로”(!) 강조하여 밝히셨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점이 우리의 본문을 해석하는 요체(要諦)라고 하겠다. 즉 다음에 연결되는 출처불명(出處不明)의 “에피소드”(揷話, 24-26절)를 통하여 그 동일한 주제([맏]아들의 희생을 통한 구원/해방이라는 동일 주제)가 다시 반복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해준다.

24-26절은 야비스트(J 기자)가 첨가해 넣은 야비스트의 자료이기는 하여도 그 원형은 이스라엘 전승의 전통에서 가져 온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이 에피소드의 현재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모세가 야훼의 강권에 떠밀려 이집트로 돌아가던 도중의 어느 한적한 광야 길에서 갑자기 야훼의 살해공격을 받았는데, 그 순간 아내 십보라가 그녀 아들의 포피(包皮; 'orlah, foreskin)을 잘라 그 남자의(his) 발에 대면서 “당신은 나의 ‘피-신랑’이다”라고 말하였더니 야훼께서 그를 놓아 주셨다는 것이고, 여기서 십보라가 말한 “피-신랑이라고 한 것은 ‘할례’ 때문에 한 말이었다.”라는 설명문을 붙이며 끝내는 내용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인 불연속성이다. 즉 모세를 그토록(네 번 辭讓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시면서까지 억지로) 권유하여 이집트로 보내신 그 야훼께서 이집트로 가고 있는 모세를 갑자기 공격하여 심지어는 살해의 공격까지 하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여기 나오는 “야훼”를 “야훼의 사자(使者)”로 고쳐 읽는다(LXX)고 하여도 논리의 불연속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 자세히 본문을 살펴본즉 이 24-26절의 히브리어 본문 안에서는 “모세”라는 실명(實名)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러니까 한국어를 포함한 거의 모든 번역들이(유대인 영어번역, JPSA를 비롯한 몇몇 주석가들의 私譯을 제외한 대부분의 飜譯들이)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모세”라는 실명을 태연스레 첨가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맥상으로는 분명히 모세 일가족이 야훼(LXX는 “주의 使者”로 고침)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며 “야훼”라는 신명(神名)까지 뚜렷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24절) 이 자료를 이곳에 갖고 온 사람은 분명 야비스트(J)임이 확실하다고는 하여도, 이 자료의 “원형”은 야비스트의 것이 아닌, 이른 바, 외국자료(비 이스라엘자료)임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아마도 우리의 본문, 출 4:24-26은 미디안 광야(?)의 이 지역에 특별하게 얽혀 있었든 어떤 미디안의 민간전설(결혼 적령기를 맞는 이들의 성년이 되는 민간의식)을 야비스트(J)가 신학적으로 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Gunkel이나 Morgenstern이 추론한 ”할례의 장소“라는 추측은 牽强附會로 보인다. W. H. C. Propp, Exodus 1-18, P. 218).

그러므로, 추측컨대, 출 4:24-26의 민담자료는 미디안 광야의 어느 외지고 무시무시한 한 장소(“할레를 행하던 장소”라고 보기는 힘 든다)에서 “밤에” 겪은 그 어떤 공포의 경험(밤에 발생하는 어둠의 위협? 아마도 “광야의 마귀”에 대한 지역전설?)을 신학 화(神學 化)하여 “무엇인가[야훼의 의도]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채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컨대, 레위기 16:6-34(cf. 레 16:8, 10, 26)가 백성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무죄한]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받는 “아사셀”(‘aza’zel; Azazel)이라는 광야귀신(desert demon)에 관한 “매우 원시적인 악귀추방(apotropaic) 전설”을 신학 화하여 이스라엘의 “죄 속량”의 의미로 설명하는데 응용하였듯이, 여기서도 미디안에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광야 길 도상의 어느 한적한 한 지역에 얽혀 있던(a limited locality 즉 aetiology) 귀신에 관한 원인론적 지역 민담(an aetiological saga)을 출애굽 해방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론된다.

따라서 여기(출 4:24-26)에 등장하는 “그를”(him) 또는 “그의”(his)의 주인공은 전부 “모세”라고 획일적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이 부분(출 4:24-26)을 앞의 단원(출 4:21-13)과 연결하여 그 성격의 평행관계를 고려해 보면, 야훼께서 죽이려고 한 “그”(him)와 십보라가 자기 아들의 포피(包皮; foreskin)를 잘라 그의 발에 갖다 댄 “그의”(his), 그러자 야훼께서 즉시 놓아준 “그”(him)는 모두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게 한다. 첫 번째 “그”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야훼께서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 하신 이유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모세일 수는 없다고 하겠고 두 번째의 “그의”는 그 자른 포피가 아들의 것이고 “발”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남자의 성기(性器)를 가리키는 완곡어법(婉曲語法; euphemism)인 이래, 그 “그의”의 주인공이 남편 모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그의”의 주인공은 그녀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여기서 문제의 초점이 설령 “할례”라고 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 장본인이 모세일 수는 더욱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할레”가 중심주제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모세이든 모세의 아들이든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 하였다는 것은 구약의 현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5:9의 할례언급은 할례 받지 못했던 광야생활의 불가피성을 오히려 변호해 주는 기능을 할 뿐, 할례를 받지 않은 이유로 야훼께서 이스라엘인을 징벌한 경우는 아니기 때문이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하여 죽임에 처하는 경우는 구약에는 없다. 창 34:14와 수 5:9에서는 할레 받지 못한 상황이란 “벗겨 주어야 할 수치”에 해당할 정도일 뿐이다. 창 17:14도 계약 위반자에게 주는 excommunication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무[無]할레로 인한 살해 형벌은 여기서는 아버지 모세와 아들 모두[그 아들이 복수임, cf. 출 4:20]에게 할례가 시행되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그 경우에는 him이 아니라 them되어야 한다].) 이 경우, 남는 문제는 십보라가 어떻게 자기 아들을 “피 신랑”(혹은 “피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피 신랑”(“피 남편”)이라고 할 때의 이 “신랑” 또는 “남편”이라는 말은, 그러나!, 여기서는 히브리어 “이쉬”(’ish)가 아니고(!) “하탄”(hatan)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 “하탄”이라는 말은 남편에게 붙이는 말이라기보다는 “할례를 받은 자” “ 혼인을 한 자” “성인 의식을 치룬 자”(a puberty-rite)에게 붙이는 말이기 때문이다.(son-in law or bridegroom, cf. W. L. Holladay, Hebrew Lexicon, P. 120) 이 “하탄”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히브리어 사전 편수자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견해이다. 특히 캇수토(U. Cassuto, 출애굽기 주석, P. 61)는, 비록 여기서 말하는 him & his를 모세로 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를 “남편”이라는 의미로는 보지 않고 “할례 받은 유아”(the circumcised infant; bridegroom of the Torah/Genesis/jubilee)라는 의미로 본다. 희랍역본(LXX)도 “나의 아이의 할례로 인한 피”를 강조함으로서 “모세”가 아니라 “아들”임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여기서 출 1-2장에 나타나는 히브리 산파들과 이집트 공주 등과 함께 “여인”이 이스라엘 구원사의 지평에 등장하여 이스라엘 해방/구원을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여인들의 반열에 들게 되고 그 여인들 중에서도 특히 모범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많은 성서번역은 이 부분(출 4:24-26)에 감히 히브리 원문에도 없는 “모세”라는 실명(實名)을 삽입하므로 번역의 대 오류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해석학적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을 끌어들였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창 4:18-31)은 편집상의 추가를 통하여 24-26절을 21-23절의 반복강조로 편입함으로 우리 본문이 갖고 있는 구원사적 출애굽 구원의 성격을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해석학적 기능을 잘 감당하고 있는 모범적 본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석학적 분석의 빛에서 볼 때, 우리의 본문은 <21-23절과 24-26절의 “반복”>이라는 특수한 강조어법을 통하여 <출애굽을 통한 야훼의 이스라엘 구원 방식과 그 성격>에 대한 성서기자 또는 성서 편집자의 케리그마적 증언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본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도출)

18-20절과 [27-28]29-31절 사이에 끼어든 두 문단, 즉 21-23절과 24-26절의 동의평행(同義平行)의 병렬(竝列)은 분명 명백한 강조형식이다. 그린베르그(M. Greenberg)가 잘 지적해 주었듯이, 후자는 전자 때문에 여기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Understanding Exodus, P. 117; cf. L. Kaplan, D. N. Osborn, at al.). 즉 맏아들의 죽임에 대한 경고는 장차 이집트에 내릴 마지막 재앙(유월절 재앙)에 대한 명백한 전조(an unmistakable foreshadowing)이다. 말하자면 이집트로부터의 이스라엘 해방이란 이집트 왕 또는 이집트 땅의 맏아들(이스라엘 억압에 대한 죄 혐의가 전혀 있을 수 없는 그 죄 없는 맏아들!!)의 피의 희생을 통하여서, 즉 반복 병렬된 두 번째의 문단(24-26절)에서 좀 더 보충 설명된 바, “피-신랑” -“하탄 따밈”(hatan damim)- 의 고백/선포를 통하여서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시적 동태복수법 형식을 빌린 야훼의 구원행위”의 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신 것은 그 무슨 동태 복수 법리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은 야훼 하나님의 자유로운 독자적 의지(意志)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류타락 이래 펼쳐 오신 야훼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본문을 제시한 성서 편집자의 신학적 증언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또한 요한복음 3:16-17에서 선포된 복음이 담고 있는 “신의(神意)”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산모는 진통을 통하여서만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그 대답이라는 것이다. 이는 또한 창 3:16의 선언에 대한 요 3:16의 상응이기도 한 것이다. 유월절의 “피”가 상징하는 의미도 바로 이 문맥 안에 들어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설주에 칠해져 있는 “희생의 피”를 보면 “파괴자”(“함마쉬키트”)가 그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야훼께서는! 아, 야훼께서는 지시하실 것이라는 것이다(출 12:23 ↔ 출 4:26; “우파사흐 알-합페타흐” ↔ “와이레프 밈멘누” cf. 눅 24:25-26)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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