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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왕이 고집을 부리도록 하신 야훼 (출 7:8-11:10)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12 14년전 7519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 - 역사서(27)

출애굽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

(출 1:1-15:21)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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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왕이 고집을 부리도록 하신 야훼

(출 7:8-11:10)

도입(導入)

<전능하신 신(神), “엘 샫다이”께서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사리로부터 해방시키셨던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는 아마도 이집트에서 일어난 재앙사건에 관한 기사(記事, ①출 7장 8절로부터 시작하여 출 11:10에 이르기까지의 記事)와 유월절 기사(記事, ②출 12:1-13:16의 記事)의 중심적인 신학적 쟁점(이슈)으로 보인다. 이 신학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의 근간(根幹)이 되는 신학을 기초로 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그 근간(根幹)이 되는 신학은, 두 개의 큰 기사 군(記事 群, ①출 7:8-11:10과 ②출 12:1-13:16) 요소 요소에 나타난 “강조 수사어투”들이 잘 말해 주고 있듯이, <출애굽 구원사건은 야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친히 “홀로” 기획하셔서 이루신 바, 전적으로 그것은 “야훼의 사건”(“떠발 야훼”=야훼의 사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자료 구성은, 비록 고대의 것(J, E & N)과 후대의 것(P)의 복잡한 결합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근간(根幹)이 되는 하나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두 개의 신학적 증언을 가지런히 담아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① 지금 다룰 출 7:8-11:10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 다른 하나는② 다음 호에서 다룰 출 12:1-13:16에서 나타난다. (※출 7:8-11:10의 장절 구성은 히브리어 본문과는 다른데, 8:1-4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7:26-29로 장절 구분이 되어 있고 8:5-32는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8:1-28로 장절 구분이 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히브리어 본문의 장절은 [ ]안에 표기한다.)

본문해설(本文解說)

출 7:8-11:10은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는 표적을 행할 아론과 모세를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소개하는 “도입 문”(導入 文; 출 7:8-13)과 그것에 이어, 이집트 땅에 일어난 열 가지 재앙에 관한 기사들(記事; 출 7:14-11:10)을 연결하여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열 가지 재앙은 ①[나일] 강물이 피가 됨(출7:14-25; 우리 본문에서 말하는 “나일 강”은 히브리 본문에서는 그냥 “강”[“여올”]에 정관사를 붙인 “그 강” 즉 “하여올”이라고만 불린다.), ②개구리 재앙(출 8:1-15[7:26-8:11] 이하 [ ]안의 장절 표시는 히브리 본문의 장절 표시임), ③이 재앙(출 8:16-19[8:12-15]), ④파리 재앙(출 8:20-32[8:16-28]), ⑤가축 재앙(출 9:1-7), ⑥악성 종기 재앙(출 9:8-12), ⑦우박 재앙(출 9:13-35), ⑧메뚜기 재앙(출 10:1-20), ⑨흑암 재앙(출 10:21-29), ⑩초 태생의 죽음에 관한 “경고성 예고 선포”(출 11:1-10)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열 번째 재앙의 경우는 그 재앙이 즉각 시행되지는 않고 단지 “경고성 예고 선포”로만 그친다. 즉 출애굽 구원을 일구어낸 사건은 일련의 재앙들의 인과(因果)의 결과로서 이루어지지는 않고 단지 <유월절 축제와만 연결되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력히 암시한다. 말하자면 출애굽 구원은 단순히 아홉(또는 열) 가지의 재앙들의 인과(因果)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유월절 사건(출 12:1-13:16)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함으로서 재앙사건들은 유월절 사건과는 구별되는 “다른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이번 호에서는 출 7:8-11:10] 다룸).

이집트에 내린 재앙에 관한 기술(記述)들은 다음 몇 가지 (1)문학적 수사의 특징과 (2)신학적 동기의 특징을 갖고 있다. (1)그 특징적인 문학적 수사어구로는 ①“야훼의 말씀대로”(“카아쉘 띱벨 야훼”)라는 수사어구(修辭語句, 출 7;10; 7:13; 7:22; 8:15[11]; 8:19[15]; 9:12; 9:35), ②“야훼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도록[완고하도록] 하셨다”(또는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였다[완고하였다”])라는 어투(語套, 출 7:13; 7:14; 7:22; 8:15[11]; 8:19[15]; 8:32[28]; 9:7; 9:12; 9:35; 10:1; 10:20; 10:27; 11:10), 그리고 ③“<내가 야훼라는 것>(“키 아니 야훼”)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라는 수사어구(修辭語句, 출 7:17; 8:22[18]; 10:2 cf. 출 10:1) 등등을 들 수 있고, 그리고 (2)그 특징적인 신학적 동기는, 주석의 결과 때문에 나타난 것이지만, 매 재앙사건들을 묘사할 때 그 재앙들을 이집트에서는 신격화(神格化/神聖化)된 것들에 대한 비 신격화(非 神格化/非 神聖化; de-sacralization)작업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1)문학적 수사들의 신학적 동기:

여기 나타나고 있는 특징적인 문학적 수사들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어떤 케리그마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경전적인 동기를 가지고 채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①“야훼의 말씀대로였다.”(“카아쉘 띱벨 야훼”)라는 수사형태가 빈번히 요소요소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기적적인 성격의 재앙현상들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의지(意志=말씀)의 결과로 온 것이지, 결코 우연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이 재앙들에 대한 합리주의적 해석이 가능하지 않은 그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나일 강물이 붉은 피로 변하였다는 기록을, 그 무슨, 합리주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렇게, 홍수나 자연재해로 떠밀려내려 온 황토 또는 적토(赤土)가 강바닥에 많이 쌓여 강물이 붉게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든지 또는 붉은 낙엽이 강바닥에 깔려 있어서 강물이 붉게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집트 땅에 나타난 재앙은 어디까지나 야훼의 의지의 결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재앙의 현상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의미의 말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사실(事實) 전승(傳承)”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해석”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고대의 자료(cf. 출 7:10,13,22; 8:15[11]; 9:12,35)에는 후대의 신명기적 사가(dtr)의 역사해석적인 표현법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집트에 내린 자연적 재해(災害)들에 대한 고대 역사가들(J&E)의 신화시적(神話詩的, mythopoetic) 표현들을 후대 사가들이 신학적으로 해석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②“야훼의 말씀대로였다”라는 수사는 자주 “야훼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다”라는 신학적 반성을 담은 수사 어투와 긴밀하게 결합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바로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자는 바로 왕 자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야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왕의 그 고집은 “바로” 왕 자신의 의지, 즉 바로 왕의 심성이 악(惡)해서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왕의 심성(心性)과는 관계없이, 야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필요악(必要惡)으로서 요구되어 “바로”가 그런 악역(惡役)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그런 말이다. 일종, “바로”왕은 여기서 “이스라엘 구원역사 계획(scheme)의 빅팀(victim: villain)”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매춘”(賣春) “도박”(賭博) “약물중독” 등등과 같은 것에 빠져 본의 아니게 자신을 망쳐 역사의 찌꺼기가 된 경우와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이런 경우,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을 도와 하나님의 인류구원역사를 성취하게 하는데 필요한 “악역”(villain)을 맡은, 이른 바, 자기를 희생한 하나의 “구속사적 희생물”이 아니냐는 매우 난삽(難澁)한 신학적 논쟁(Princeton University의 E. Pagels 교수와 Harvard Divinity School의 K. L. King 교수가 공저로 내놓은 책,Reading Judas, New York: Penguin Group, 2007은 이런 문제를 새 성서해석학의 과제로 내놓았다)과 결부될 수도 있다. <가룟 유다와 기독교 생성초기에 대한 재(再)관찰>이라는 관점에서 되짚어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대표적 애 제자(愛 弟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의인(義人)이심에도 불구하도 십자가에 달려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량(贖良)하시려 하시는 그 깊은 구속사적(救贖史的) 의지(意志)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마 17:22-23; 막 9:30-32; 눅 9:43b-45), 오히려,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하는 따위의 속(俗)된 자리다툼이나 하면서(마 18:1-15; 막 9:33-37; 눅 9:46-48; 22:24-34)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막으려 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너[희]는 나의 걸림돌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일(유대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 처형을 받아 인류대속의 죽음을 죽는 그일)은 생각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마 16:21-23; 막 8:33) 라고 하는 꾸중을 듣기까지 하였는데 반하여, 가룟 유다는 오히려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요 13:28)을 오직 홀로 알아 은밀하게 “네가 할 일을 속히 하여라.”(“호 포이에이스 포이에손 타키온”, 요 13:27)라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언급을 받고 “밤에”(요 13:30) 최후의 만찬 자리를 중간에(외로이?) 빠져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실로, 가룟 유다야 말로, 비록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마 26;24) 또는 “그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눅 22:22)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스승으로부터 받았다고는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가장 믿고 중책을 맡겼었던 주요 제자가 바로 가룟 유다가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정도로 그의 역할(villain, 惡役으로서의 역할)이 중대하였다는 평가를 현대 신학자들(E. Pagels & K. L King)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인 성격의 메시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분의 그 고유한 섭리>라는 변증신학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일 뿐, 더 이상의 논리적/합리적 논쟁을 제기할 문제는 아니라고 하겠다.

“바로” 왕의 마음을 야훼께서 완고하게 하셨다는 증언도 바로 이러한 역리적(逆理的)인 신학적 문맥 안에 들어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비록 할 수 없으나 홀로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그의 구원 경륜은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③그러므로 <“내가 야훼”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하여>라는 수사어구(修辭語句; 출 7:17; 8:22[18]; 10:2 cf. 9:16)는 여기서는 이집트에 내린 재앙기사(災殃記事)의 신학적 동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수사 구(修辭 句)는 이미 이 재앙기사 앞에 나오는, 이른 바, <이집트에서 다시 일어난 “제2의 모세소명기사”(P; 출 6:2-27; 6:28-7:7)>에서 이미 두 번이나 반복되었었던 수사 구(修辭 句, 출 6:7 그리고 출 7:5)이며 강조 어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하여 “제2의 모세 소명기사” 속에서 이 수사 구(내가 야훼라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기 위하여”라는 수사 구)가 “나는 야훼이다”(“아니 야훼”)라는 야훼의 자기선언 수사어구의 지원을 받아 그 신학적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실로, 신명기적 역사가(dtr) 및 사제 신학자(P)와의 신학적 상응관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그 신학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특히 출 9:16에서 “나의 명성(”쉠“)을 온 땅에 널리 알리려고”라고 할 때의 그 신명기 신학의 중심 신학 즉 “이름[名聲] 신학”(Name-theology)과 결부된다는 것은 더욱 의의 깊다고 하겠다. 이러한 관찰들은 우리의 본문인 이 “재앙기사”가 후대의 신학자들(P와 dtr)의 신학적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이집트에 내린 재앙사건들의 반복보도는, 신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전적으로 야훼의 절대 주권신학(P)과 야훼의 명성(名聲)의 신학(D & dtr)을 증언하려는 신학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겠다. 즉 야훼가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시고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야훼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사건들이 한 약소민족의 해방(구원)을 철저히 지향(指向)하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명성(名聲, Nomen Domini)을 온 천하에 세계적(우주적)으로 널리 전파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이집트의 신성을 비 신성화함:

문학적 수사들과는 별개로, 고대 설화 자들(J&E)이 제공한 그 “재앙에 관한 자료들” 그 자체(per se)도 또한, 그 문학적 수사가 지향하고 있는 것에 못지않게, 그 언어들의 의미를 주석을 통해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집트의 자연신화들을 비 시신성화(非 神聖化, de-sacralization)시키는 신학적 작업을 이미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즉 히브리인의 신 야훼께서 이집트제국의 신들을 일시에 무력화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는 고대 중동세계에서는 다신론적인 성격을 가장 많이 가진 제국이다. 특히 모세 시대의 그 이집트 백성들은 무려 80여 종류(餘 種類)의 신(神)들을 섬겼다고 중동 종교 연구가들은 말해주고 있다. 이집트의 젖줄인 나일 강, 그 “나일”의 신(神)은 하피(Hapi)라고 하는 신인데, 이 신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인 물고기를 먹을거리로서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신이었다.

야훼 신이 내린 첫째 재앙은 바로 이 “나일” 강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여 “하피” 신의 “식물”(食物)제공의 역할을 무력화시키는 일이었다. 즉 이 재앙의 선포는 나일 강을 창조하신 창조 신 야훼가 “물고기를 살리는 물의 생명력”을 강타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게 하심으로 나일의 강 신 “하피”를 압도하였다는 선언이다. 이를테면, 이집트 왕 바로에게 이집트가 신앙하는 그 “하피” 신이 창조신 야훼에게 굴복(屈服), 살해(殺害)되어 그 “하피” 신이 흘린 피가 나일을 덮게 된 그 참패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도 또한 같은 문맥 안에 있는데, 이집트인들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매년 겪는 개구리 소음(騷音)과 악취(惡臭)를 피하기 위하여 개구리를 제압하는 신 “헥트”(Hekht)를 강가에 모셔서 섬겨왔다는 전승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헥트”의 위력도 모세가 전한 야훼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 곧 무력화되고 이집트 전역과 바로의 왕궁은 개구리 범람의 재앙을 막아내지 못하여 큰 곤궁을 겪었다는 것이다.

셋째 재앙인 “이”(“킨남”kinnam, gnats 피를 빨아먹는 미확인 곤충, 출 8:16-18[12-14]) 재앙에 나오는 그 “킨남”이라는 곤충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게 규명되지는 못하였으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아마도 출 8:17[13]에 나오는 표현, “아론이 [이집트] 땅의 먼지쳤다”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땅의 티끌이 일어나 흡혈곤충으로 바뀌게 된 이 독벌레가 성역화(聖域化)된 이집트의 신성한 을 병들게 하여 그 땅에 사는 온 백성과 가축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주었다는 데 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왕의 술사들이 이 이적을 흉내 내려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신격화된 이집트 땅의 신성이 야훼로부터 비(非) 신격화의 격파를 당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언한다고 하겠다.

넷째 재앙은 “파리” 재앙인데, 이 “파리”(“아롭” “‘arob)도 미확인 곤충이다. 주석가들은 “파리”라는 번역보다는 “바퀴벌레”(혹은 “딱정벌레”?)라는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번식력이 강하여 때로는(주로 11월경에) 수백만 마리로 무리지어 이집트 땅을 휩쓸어 지나가면서 사람이고 짐승이고를 가리지 않고 물어뜯고 옷과 가구와 식물을 쏠고 갉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어린 애기와 노약자들은 이 “아롭”(바퀴벌레?)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이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이집트인들은 이 벌레의 모양을 왕권을 상징하는 모표(emblem)로 사용하거나 또는 신(神)으로까지 숭배하였는데, 이집트 제 12대 왕조 때부터는 모든 “부적(符籍)”의 중앙에 이 벌레의 모양을 그려왔었다고 전하고 있을 정도다. 여기서도 이 벌레의 침입이 히브리인들의 거주지인 “고센” 땅에는 침범하지 못하게 하여 구별함으로 “야훼가 이 땅에 계심”을 이집트인들에게 알리게 하였다는 점이 강조된다.

다섯째 재앙은 “가축(집짐승)의 죽음”의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특별히 이전의 재앙들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준 것은 없었으나, 그러나 여기서도 이집트인들의 가축은 죽고 이스라엘인들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는 그 “차별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또한 하나의 아이러니(irony)도 작용하고 있었는데, 이집트인들은 가축치기 목자들을 불결하다고 혐오하여 유목민에 대하여 인종차별까지 하여 왔었으나 “황소”라는 가축만은 “신(神)”(이집트 神 Ptah의 化身)으로 섬겼었는데, 이 신격화된 황소(또는 송아지)들조차도 이 가축병 돌림에서는 제외되지 못하였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여섯째 재앙은 악성종기의 재앙인데, 셋째 재앙과 유사한 점이 있다. 단지, 여기서는 모세의 이 이적행위의 “제스처”(gesture)가 다소 예언자적 상징행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cf. N. W. Robinson)이 다소 이색적일 뿐이다.

일곱째 재앙인 “우박”(천둥을 동반한)재앙은 지금까지의 재앙기사들 중에서 “신학적 의미를 가진 특수 수사 언어”들을 가장 많이 가진 기사이다. 우선 이 우박재앙 기사는 야훼 하나님께서 종말론적 성격을 띤 “경고성 예고”의 말씀을 먼저 던지신 다음(“내일 이맘때에는 …하리니” 출 9:8; 우박이 내릴 계절 또는 기후가 아닌 때, 그것도 갑자기, “내일” 우박이 내릴 것이라고 한 그 경고가 가진 종말론적 성격 참조)에 재앙이 내려질 뿐만 아니라 그 경고의 말씀을 “들은”(말씀에 복종한) 사람들(말씀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재난을 피하였지만 그렇지 않고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았든(말씀에 복종하지 않았든) 사람들은 재난을 당하였다는 (다분히 종말론적이며 “말씀” 강조의 성격을 가진) 기록을 특별히 부각시킨다는 특징(말씀에 대한 복종여부를 강조하는 dtr적 특징 참조!)을 가진다. 그리하여 이 기사의 마지막 말은, 예상대로, “야훼께서 말씀하심과 같았더라.”(ka’asher divber YHWH)라는 수사어구로 마무리된다. 왜 이 일곱째 재앙 사건만이 이처럼 풍부한 신학적 수사를 사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단락(段落)에는 후대의 신명기적 사가(dtr)의 손질이 어느 곳보다 더 많이 작용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 우박재앙이 이집트 온 땅에 일어난 재난으로서는 이집트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 두 번이나 강조되고 있고(출 9:18, 24) 특히 바로의 패배고백, 즉 “내가 죄를 범하였다(하타아티). 야훼는 의로우시고(핫차띡) 나와 내 백성은 악하였다(홀샤임).”라는 법정용어를 사용한 패배고백이 유일하게 여기서만 천명되기도 한다. 그런 다음, “그 일 때문에 온 세상이 야훼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레마안 테다아 키 라야훼 하아렛츠)라는 모세의 최종적 종결 선포가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선포되는 것으로 모세-바로의 대결을 마무리 짓기까지 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재앙을 예고할 때 야훼께서 이미 예고하였었던 “신탁”(神託; 코-아말 야훼)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즉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다는 것[야훼만이 神이라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출 9:13)는 것이다.(여기[출 9:30]에는 또한 창 2-3장에서만 나타나는 “야훼 엘로힘”이라는 호칭이 오경에서는 창 2-3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나타난다는 mystery도 발견된다!)

여덟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출 10:5,15,19)은 예언서들(아모스, 요엘, 등등)에서 흔히 종말론적 경고를 할 때 나타나는, 특히, 최후의 전쟁(終末)이 가까웠음을 알릴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 재앙표현(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 표현, cf. 욜 1:4-7; 2:20)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요엘의 예언서에서뿐만 아니라, 아모스의 예언서에서도 이미 “피할 수 없는 종말적 파멸”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었던 “남김없이 멸하는 심판”에 관한 표현(암 4:6; 7:1-2)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종말의 급박성은 이집트 왕 바로가 일단 모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였다는 보도(출 10:9)와 그리고 이집트 온 땅에 임한 메뚜기 재앙이 극한으로 치닫자(출 10:14-1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나는 너희 신, 야훼와 너희들에게 죄를 지었다. 이제, 원컨대 나의 죄를 한 번만 용서해주고 너희의 하나님 야훼에게 기도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해다오.”(출 10:16b- 17)라고 애원하는 데서도 그 급박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더욱이 이 <메뚜기 재앙>을 <죽음>이라고 표현한 것을 통해서는 더욱 우리는 그 재앙이 종말론적 성격임을 더욱 충분하게 잘 감지할 수 있다. 재앙 기사(記事)의 후반부에 배치된 것으로서는 적절한 배열로도 보인다.

끝으로, 재앙보도의 마지막에 속하는 재앙(장자 죽임의 사건인 열 번째 재앙은 앞의 아홉 가지 재앙들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그것이 단지 이 재앙 시리즈에서는 선포만 하는 것[출 11장]으로 편집되어 있고 또 그 장자 죽임 사건은 단지 유월절과 무교절 축제와만 연결되어 실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수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홉 째 재앙이 있은 후에는 모세와 바로가 둘 다 서로 다시는 이 문제를 가지고서는 더 이상 상면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맹세하면서 헤어진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서도 이 아홉째 재앙이 재앙 시리즈의 마지막임을 분명히 한다고 하겠다) 아홉째 재앙은 “흑암재앙”이다. 흑암 재앙이 마지막 재앙으로 설정된 것은 그 재앙의 물리적 강도(强度)와 관련되었기 보다는 신학적 의미와 더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흑암”(호셱” hoshekh)은 특히 동양적 관점에서는 질병과 죽음이 서식(棲息)하는 그늘진 곳(히브리어의 sheol과 상응함)으로서 신의 은총이 없는 곳을 상징한다. 반면에 “빛”은 신의 은총이 미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특히 고대 이집트 제국은 왕 바로를 태양신의 아들로 생각하였고 그들의 주신(主神), 아몬 레(Amon Re)는 태양신이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재앙 사건은, 신학적 시각에서 보면, 창조신 야훼께서 이집트의 태양신(太陽神)을 단순한 천체(天體)의 하나로 격하(格下)시켜 비신성화(非 神聖化; de-sacralization)시킨 사건으로서 읽어야할 것이다. 창조의 신(神) 야훼는 “태양”을 신(神)으로서가 아니라 천체(天體)의 하나로 보고(cf. 창 1:14-19) 모세로 하여금 하늘을 항하여(하늘은 태양의 운행 지역이다. cf. 시 19:4-6[5-7]) 손(능력의 상징)을 내미는 제스처(gesture)를 취하게 하여 이집트 땅 위에 “흑암”이 임하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처소에서 낮(밝음)을 잃고 삼일 동안은 어둠 속에서 일어나지를 못하였으나(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였으나),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거주하는 곳에 밝은 빛 아래에서 계속적으로 활발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신(神)이 아니라 야훼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천체 중 일부로서 창조자의 지시에 따라 운행하는 것(창 1:16; 시 19:5-6[6-7])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집트 신과 이집트 종교에 대한 최대의 굴욕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모세와 바로는 서로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맹세하면서 결별을 선언하고 헤어지게 되는 데(출 10:28,29), 이것은 재앙시리즈가 실제적으로는 여기 제9재앙에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오는 열째 재앙은 앞에서 언급된 아홉 개 재앙 시리즈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독립적으로 분류되어 유월절 절기 및 무교절 절기와만 연결되어 독립적인 신학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출 11:4의 번역, “모세가 바로에게 말하였다.”라는 어구는, 그들 사이에 더 이상의 대결이 계속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히브리 원문 그대로, “바로에게”라고 하는 원문에도 없는 그 말은 빼고 그냥 단지 “모세가 말하였다”라고만 번역해 두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출 11:4-8은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라는 신탁(神託; oracle) 선포로 시작하여 전개된 독립된 야훼 신탁 구문(句文)으로만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오는 말[導出]

아홉 가지 재앙에 관한 보도들은 출애굽 구원의 과정을 차서(次序)대로 서술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이 보도들은 야훼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선포를 그 신학의 근간(根幹)으로 하고서 이집트에 내렸었던 그 재앙 사건들을 전적으로 <야훼가 유일한 신이시요 유일한 역사의 주인이시다>는 진리를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하여 야훼께서 친히 증명해보이신 사건으로서 해석한 “하나의 역사신학적인 반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야훼다” 또는 “내가 야훼임을 너희로(온 땅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하여”라는 등등의 수사 어구가 이 재앙보도의 신학적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열쇠(master -key)가 된다고 하겠다. 이 수사 어구가 또한 “야훼의 말씀대로 되었다”라는 진술이나 “야훼의 명성(名聲)을 온 땅에 알리려는 것이다”라는 진술들과 연결되어 신학적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한 것은 아마도 후대의 역사가인 신명기적 역사가(dtr)의 영향일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홉 가지의 재앙들은, 그러므로, 그 강도(强度)에 따라 점층적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첫째 재앙이 가장 강도가 높은 재앙일 수 있다!) 여러 이적사건들을 반복 나열하여 야훼의 유일한 권능을 이스라엘인은 물론이고 이방인인 이집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 야훼 신의 유일성을 만방에 선교하는 기능을 하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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