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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를 “벧엘”로!(창 28:10-22)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12 14년전 12963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역사서(18)

족장사(族長史)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

(창 12:1-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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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를 “벧엘”로!(창 28:10-22)

(도입[導入])

아브라함기사(창 12:1-25:18)에 뒤이어 나타나는 야곱기사(창 25:19-36:43)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창 4:1-16)에서처럼, 두 형제 사이(두 아들 사이, cf. 눅 15:11 -32)의 갈등과 긴장관계를 다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두 형제 이야기는 장자(長子)보다는 둘째 아들이, 기득권자보다는 비(非) 기득권자가 축복의 계승자(cf. 창 4:25-26; 창 25:23)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흐름은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 비유(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두 아들 비유)에서도 나타난다. 왜 최후의 축복 수혜자(祝福 受惠者)는 번번이 장자가 아니고 둘째 아들, 즉 기득권자가 아니고 비 기득권자일까? 하나님은 본질상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 기득권자가 아닌 비 기득권자의 편이시라는 말일까?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편당성(偏黨性, God's factionalism)”을 증언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출 23:6)라고 말씀하셨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그를 두둔해서도 안 된다(출 23:3)라고 엄히 경계하시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편당성”에 관한 이념은(예컨대,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바, “하나님의 편당성”에 관한 이념은) 단지 하나의 시대적/잠정적(暫定的) 이념에 불과한 것이나 아니겠는가?

예컨대, 강자(强者) “가인”의 위세에 속수무책 묻혀버린 약자(弱者) “아벨”을 대신한(히브리어 “탓하드”의 기능 주목, 창 4:25) “셋”의 출생과 그리고 그 셋을 뒤잇는 계보(“가인→셋”이 아니라! “아벨→셋”이라는 계보)를 정통 계보로 구성한 사제 신학자(P기자)의 족보 구성(창 5:1-31)은, 분명, “가인”의 형제살해의 범죄행위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아벨 변호”(창 4:25-26; J자료)라는 야비스트(J)가 설계한 바, 그 야훼의 구원사적 의지에 관한 증언을 후대의 사제 신학자가 수용한 한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 여기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는 그러한 방식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점들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가인”의 경우와는 달리, “에서”는 “야곱”에 대해서는 결코 강자(强者)라고만은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에서”는 장자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고 또 가부장(家父長)인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더욱이 동생 “야곱”에 대하여 보복감정까지 가지고 있는 자로서 묘사는 되어 있지만(창 27:41), 그러나 실상 “에서”는 늘 야곱의 약삭빠른 속임수에 손쉽게 걸려 넘어졌거나 또는 그로 인해 심한 낭패를 당하기만 한 자였다(창 25:32-33;27:39). 그럼에도 “에서” 그는 동생에 대한 분노를 오래 품고 있지는 않는(창 27:44-45; 33:4,12) 자였다. 형편이 이러한데, 하나님은 의외로 종국에 가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이스라엘”로 격상시키고(창 32:28[29]; 35:10) 그를 선택하여 축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일까?

그러나 “야곱”이 “에서”를 제치고 하나님의 축복 계승자(이스라엘)로 선택된 것을, 그렇다고 하여, 그 무슨 신(神)의 예정(豫定)으로 본다거나(창 25:23은, 그러나, 후대 사건을 기초한 소급 예언, 즉 vaticinium ex eventu 로 보아야함), 또는 “야곱”이 지닌 적극적 사고가 낳은 삶의 당연한 귀결로 본다거나 할 수는 없다(창 32장에 나타난 “야곱”의 씨름 설화는, 흔히들 오해하고 있듯이, 결코 “야곱”의 씨름 승리를 보도하고는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야곱”으로 하여금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실질적 조상이 되는 축복을 얻을 수 있게 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두 가지 범주로 구별하여 대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야곱설화 전체를 통하여 “야곱”이 과연 하나님의 편애(偏愛)를 받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는 일, 그리고 (2)“야곱”의 행위 중에서 하나님의 인정(認定)을 받을만한 부분이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일. 이상의 두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잠정적 대답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야곱설화 전체를 통해서 본 바, “야곱”의 삶의 행태(行態)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결코 “편애”(偏愛)가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야곱”은 ①붉은 죽으로 장자 권을 매입한 것과 시력이 약한 아버지를 속여서 형에게 갈 축복의 말씀을 도독해 간 그 잘못(cf. 출 21:15,17; 레 19:32)에 대해서 하나님의 묵인과 관용을 받지는 결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야곱은) 고향 땅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살지 못하고 먼 하란 땅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②뿐만 아니라,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행한 “야곱”의 속임수와 도둑질 때문에 그는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하게 되고 구사일생으로 잠간 위기를 모면은 하였으나 형 “에서”의 공격에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하였다. 마침내는 얍복 강변에서 하나님의 사자(使者) [아니면 하나님 자신]의 공격을 받고 “허리”(엉덩이뼈, 허벅지 관절, 환도뼈, ← 히브리어 “야렉크-예렉크”는 性器가 있는 부근을 가리킴, “야렉크”는 性器에 대한 완곡한 표현, 즉 euphemism임)가 위골되어 부셔지는 응징(膺懲)을 받았다. 일종, “야곱”의 후손 생산의 자리에 하나님의 치명적인 공격을 받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편애를 받아 그의 모든 간교한 행위에 대한 특별 면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오히려 그는 “생산(生産) 축복의 자리인 허리”(“야렉크”)에 신의 공격을 받고 “절름발이”가 되었을 뿐이다.(창 32:25[26])

(2)그러나 야곱의 이러한 “신의 응징(膺懲)을 받는 삶” 속에서부터나마 몇 가지 주목할 점들이 나타난다는 점에 우리는 특히 주목해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대로, 우선 “야곱”은 끝까지!(창 35장의 “야곱설화”의 끝 바로 직전의 창 34장에 나타난 “디나” 사건에 이르기까지!) “신의 응징”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의 응징을 받는 그의 삶” 속에는 언제나 “응징하시는 신의 손”(cf. 출 33:23의 “신의 등”)을 붙잡는 “야곱”이 있었고 그리고 동시에 거기에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깨는(일종의 회개와 같은) “자기-깨어짐”(self-brokenness)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기 깨어짐”이 야곱에게는 “자기 살림”의 길이었고 “자기 승리”의 길이었던 것이다! 우리 본문(창 28:10-22)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한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음 호에서 다룰 “얍복 나루터에서의 야곱”{창 32:22-32 [23-33]}설화도 또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본문 주해)

“야곱”은 고향 땅 브엘세바에서 쫓겨나 하란(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의 거리는 약 460km)으로 도망치고 있었다.(cf. 창 27:41-45; 이것은 가나안 여인과의 혼인 맺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삭과 리브가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낸 것이라는 창 27:46-28:5의 기록과는 배치된다. 그러나 이것은 두 전승자료 사이의 차이 때문에 온 것으로 보임). 도피 도중에, 우연히, 그는 한 장소, 그러나 매우 의미 깊은 그 장소(히브리어 “함마콤”)에 맞닥뜨리게 되었다(히브리어 “파가아”의 강조적 의미를 살린 번역). 정관사가 붙은 히브리말 “그 장소” 또는 “그 곳”이라는 말은, 비록 야곱이 도피 여정(旅程) 중에서 맞닥뜨리게 된 곳이기는 하지만, 그 곳은 먼 후일 북 왕조 이스라엘의 중심도시인 “성소의(왕궁의) 도시가 된 저 유명한 “벧엘”이라는 성소 도시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히브리어 “함마콤”을 “한 곳에”(개역), 또는 “어떤 곳에”(새번역, a certain place, cf. G. von Rad's Genesis, Pp. 277, 278에서도 이 점을 주목하지 않음) 등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유서 깊은] 그 곳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히브리 본문의 의도(정관사 사용의 의도, cf. 왕상 19:9)에 더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해는 졌고 날은 어두워 “야곱”이 머물러 쉴[잠자리를 펼] 곳은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옛날 아브라함이나 롯이 나그네에게 베풀었었던 것처럼(cf. 창 18:2; 19:1) 그렇게, 그를 도와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 따위는 아무도 거기엔 없었다.(!!) 즉 고대 동방의 그 당연한 나그네 환대(hospitality)의 윤리 같은 것이 거기 그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는 “신의 응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야곱”은 분명 그 시대에서는 철저히 소외당한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마저 외면당하였던 자였던 것이다.

불쌍한 “야곱”(!). 그러나 그는 그 “신의 응징의 아픔” 속에서 오히려 그 아픔 안에 내재(內在)하시고 오히려 아픔의 자리 거기에서 더욱 특히 역사(役事)하시는 조상의 하나님(13절)을 꿈속에서 만났던 것이다(12절). 꿈은 간절한 염원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철저히 버림받은 자리에서도, 감히, 그를 버리신 그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의외의 놀라운 신앙사적인 사건이었다. 신의 응징을 받았기에 이름 없는 들판으로 내어 쫓긴 몸이 되었고 그러므로 그는 그저 저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에 의지하여 그 돌을 베개하고 밤하늘의 별들을 이불 삼아 외로이 누운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철저히 소외(疏外)된 그 노숙(露宿)의 현장에서도, 즉 신의 징벌을 받고 있는 그 고난의 현장 속에서도 감히!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층계)와 그리고 그 위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사자들(divine beings: messengers of God, cf. 욥 1:7)을 보는 대단한 길조(吉兆)의 꿈을 꾸게 되다니! 이야말로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고대인들은 아마도 지상과 천상의 세계가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왕래를 하는 “하늘 문”이라는 것이 있다는 민간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유랑자 “야곱”에게도 그의 조상들(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여전히, 비록 신의 징벌을 받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서도, 계속 살아있어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은총의 말씀까지 들을 수 있었다니(13-15절), 이야말로 보기 드문 역설적(逆說的)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잠에서 깨어난 그는 “놀람의 탄성”(16절)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 그가 그의 어두(語頭)에서 사용한 히브리말 “아켄!”(’akhen, 16절)이라는 말은, 분명, 전혀 예기치 못한 운명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나 외치는 말, 이른 바, “아, 놀라워라. 정말로 이런 일도 다 있다니!”라는 의미의 “감탄사”이다. 실로, “신의 징벌” 속에서 오히려 “신의 은총의 현재하심”을 발견하는 그 믿음!,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신앙이 아니고 달리 무엇인가! 야곱의 신앙적 승리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려움”(일종의 神에 대한 敬畏, 히브리어 yr', 17절 語頭)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늘 무서운 줄 몰랐던 그 기고만장한 그가 <하늘이 두렵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이다. “신의 가혹한 징벌의 고통”이 짓누르는 곳, 바로 거기에 “신(神)에게로 이르는 문(門)”이 있고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집”[聖殿]이 있다는 저 신비한 진리가 드디어! 야곱의 눈에 포착되었던 것이다(17절)! 이 “눈”(eyes)이야 말로 다름 아닌 “믿음의 눈”(eyes of faith)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야곱은 곧바로 일어나! (히브리어 shakham은 “일찍이” 일어나는 행동과 “열망을 가지고” 행하는 행동을 동시에 가리키는 단어로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결행한 행동을 나타낸다.) 그 베고 자던 돌을 “제단으로 삼고”(문자적으로는 “기념 석상으로[기념비로] 세워놓고”) 거기에 기름을 부어 거룩한 제단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18절). 순식간의 일이었다. 일종의 예배행위(제의행위)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곳을 가리켜 벧-엘(beth-’el), 즉 “하나님(엘)의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19절). 이른 바, 여기서 우리는 벧엘 제의(祭儀: 성소, 예배장소)가 야곱으로부터 시작(기원[起源])되었다는 일종의 제의 기원론(祭儀 起源論;cultic etiology) 같은 것을 여기서 본다(Gunkel, et al.) 이른 바, 그가 북 이스라엘 제의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베고 있던 이름 없는 그 무명의 “돌”이 “거룩한 제단”이 되고, 그 황량한 무명의 한 장소가 “하나님의 집”(성전)의 뜰이 된 것이다. 즉 무명의 지역, “루스”가 유명한 성소,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의 “벧엘”이 된 것이다(20-22절). 그러나 이것은 제의 기원론(祭儀 起源論) 이상의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즉 이 사건은 “야곱”의 삶의 대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자리를 변화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성소(聖所) 또는 성전(聖殿) 기능의 본 모습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고난의 자리(“루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집(“벧엘”)이 되도록 하는 것, 즉 “고난(苦難)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임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신앙적 승리의 한 진정한 표본인 것이다.

(설교 실연)

루스를 벧엘로!(창 28:10-22)

인간구원 전선(戰線)의 전위(前衛)이며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들 말하는 교회의 참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그 곳은, 그러나, 화려하고 웅대한 건물과 그리고 빈틈없는 종교교리와 종교제도를 갖추고서 우리 사회의 일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곳, 그러므로 매주 찾아오는 저들, 구원을 갈망하는 많은 신도들로 성시(盛時)를 이루는 곳, 그런 곳만이 “교회”는 아니(!)라는 것, 즉 그런 곳만이 성역(聖域)이거나 성전(聖殿)이거나 또는 교회(敎會)이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주지(周知)의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곳에서도 성전이나 교회의 기능이 어느 정도는 활발하게 작용한다고도 볼 수는 있다. 왜냐하면 이 지상 교회가 가진 제도적 기능의 인프라(INFRA)는 그런 것들을 주요 구성자료로 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교회 과제의 제일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역설적(逆說的)이게도, 교회의 본질이 오히려 왜곡, 파괴되고 오히려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 기능에 역행(逆行)하는 현상을 낳게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적 과제는 인간구원의 사건을 만들어가는 데 있는데, 만일 교회가 교회의 형식적 인프라를 교회 제일의 과제로 삼는 경우에는 실질적 인간구원의 사건이 결코 거기서[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어떠한 현실적 요구가 따라온다고 하여도 항상 꼭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는 그 여하한 경우에라도 그의 본질을 추구하는 과제만은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그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교회가 그의 본질적 과제를 바르게 수행하는 참 모습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교회가 어떻게 하여야 그 안에서 부단하게 인간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도록 하는 기능을 견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교회로 하여금 참 교회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인프라”(Infrastructure)는 과연 무엇인가? 이 중대한 물음에 대한 최선의 대답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라고 하겠다.

우리의 본문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고난의 현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갈급(渴急)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하여 그는 하나님을 만났으며(마 7:7-8) 또한 그러므로 하여 그는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 즉 “하늘로 들어가는 문”(창 28:17)을 발견하였노라고 하는 것을 매우 확실한 언어로 증언하고 있다. 실로, 놀랍지 않은가?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곳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최선의 자리였다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매우 확실한 언어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고난의 매를 들고 채찍질하시는 “하나님의 소매”를 “야곱”이 붙잡은 것이다. 비록 소매 긴 김에 춤을 춘 격이고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낸 격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과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야곱”은 고난의 매를 맞는 그 곳에서(!!) 고난의 매를 드신 하나님을 발견/인식하고 그를 붙잡은 것이다. 실로, “고난”(苦難)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자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편 119편 시인도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 119:71)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된 의미의 “교회”는 이러한 체험과 고백이 일어나는 곳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곳이다.

“야곱”은 그러므로 곧(!) 그 자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베고 자든 돌을 일으켜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는 “서원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예배행위”가 아니고 달리 무엇인가! 한동안 잊혀졌던 “기도”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른 바,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영교(靈交)”가 회복된 것이다. 그 회복된 영교(靈交) 때문에 “루스”가 “벧엘”이 되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 영교 때문에 그토록 외롭고 고독하였던 그곳이 하나님의 위로와 임마누엘 축복약속이 풍성하게 넘쳐나는 축제의 장소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최초의 성전 건축자인 솔로몬도 “성전봉헌기도”(왕상 8:22-53; 대하 6:12-42)를 통하여 고백한 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특히 왕상 8:27-28,35-36, 등)라고 한 그 고백이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듯이, 교회는,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비로소 “참 교회”인 것이다. 여기 “야곱”의 경우가 잘 말하고 있듯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곳은, 그러므로, “아픔의 회개”를 통하여 자신을 향해 징계의 채찍을 드신 그 하나님의 옷소매를 확! 붙잡는 곳이다. 자신을 향해 채찍을 드신 하나님의 팔을 붙들고 그 팔에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곳은 꼭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건물이 있고 잘 확립된 교리와 그리고 무리지은 많은 신도 군단(信徒 群團)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야곱”의 첫 성전 “벧엘”은 오히려 이름 없고 황량한 “루스”라는 이름의 무명의 들판이었다. “야곱”의 처지를 위로해 주고 측은히 여겨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황야였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분노의 채찍이기는 하지만 그 채찍을 드신 하나님이 계셨던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역설(逆說)이지만 흔들릴 수 없는 신앙현실(信仰現實)이었다. “야곱”의 위대함은 바로 이것, 이 역설(逆說)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의 눈”(eyes of faith)이 있었다는 그 점이었다.

진실로 그렇다. 자신에게 임한 신의 진노의 채찍과 그 채찍의 고통, 그곳에서 오히려 은총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믿음, 그것보다 더 위대한 신앙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하겠다. 야곱의 신앙적 승리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실로, “고난”(苦難)이 오히려 희망의 장소(!)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그 어떠한 위대한 가르침에 못하지 않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대속적인(代贖的) 죽음, 거기서부터만 우리는 우리의 최대의 희망인 “부활”(復活)의 승리를 약속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유언(遺言)이기 때문이다.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인지는 이로서 분명해졌다고 하겠다. 왜 맏아들이 아니라, 탕자였다가 돌아온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더 큰 기쁨이 되었는지도 이제야 분명해졌다고 하겠다.(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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