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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창 22:1-23:20)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13 14년전 8157  

전송17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역사서(17)

족장사(族長史)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

(창 12:1-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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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창 22:1-23:20)

(본문 주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번제에 관한 이 설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試驗)하셨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명백한 신학적 성격을 가진 설화문학이다. 이 사실은 우리 본문의 그 문학적 구성을 통하여서도 확인된다. 즉 서론: 시험의 제시(22:1a) 본론: (1) 시험 부여(22:1b-2) (2) 시험 치름(22:3-10) (3) 시험 통과(22:11-12) 결론: 시험의 결과설명(22:13-14) {보충 설명: 22:15-18과 설화 마감 선언: 22:19} [그런 다음 전체 시험설화는 더 큰 약속설화의 문맥에 편집접맥 됨: 22:20-24; 23:1-20]이라는 구성 구조를 가진다. 즉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한 주제가 전(全) 설화를 장악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험”은 시험 받을 자에게 부여되고 그 시험받는 자는 그 시험을 치루고 그런 다음 시험받은 자는 그 시험이 통과되었음을 확인하는 이 시험의 세 요소가 전(全) 본문을 지배하고 이끌어 간다.

그러나 이 “시험 설화”가 전하려는 그 메시지(케리그마)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복음 선포의 문제는 문학비평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해석학의 몫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 문학구성이 아무리 명료하게 정리된다 하여도, 이 설화문학의 진술을 신학적 해석 없이 그 문학구성에 따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그 뜻은 보편타당한 진리가 되지 못하고 그러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을 오히려 혼란스럽게만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자식 번제”를 즐기는 비인도적 신(神)으로 남게 되고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식을 제물로 희생하고서라도 자신의 신앙적 승리만을 챙기고 찬양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 그것은 결국 저열한 이교도의 반(反)윤리적인 신앙보다 더 심각하고 더 위험한 반(反)도덕적 신앙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만일 이런 신앙을 찬양하는 경우엔,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의 뜻은 전적으로 왜곡된다. 즉 하나님은 약속을 임의로 파괴하는 신의 없는 신이 되고 동시에 인신제물을 최상의 감사 제물로 탐닉(耽溺)하는 저급한 “데미어즈”(demiurge)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설화를 통하여 ①아브라함이 겪은 “시험”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②이러한 시험 사건을 통하여 증언하려는 그 메시지(케리그마)가 무엇인지를 해석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을 그 무엇보다 더욱 성실히 이행하여야 할 것이다.

1-2절: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는 그 사건의 시간대(時間帶)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신의 약속”(아들 약속)이 “성취”된 시점(時點)으로서 아브라함의 생애의 절정점(絶頂点)에 해당하는 때이다. “시험”은 흔히 자기성취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때에 찾아온다. 아브라함은 생각한다. “신의 약속이 내 안에 성취된 그런 나, 믿음의 선조가 된 ‘나’의 믿음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과연 나는 내게(아내의 생리가 끊어진지도 오래된 나이 100세가 다 된 나에게) 이처럼 놀라운 약속을 주시고 또 그 약속을 이처럼 기적같이 이루어주신 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창 12:2-3)다운 믿음을 과연 나는 갖고 있는 것일까?” 마침내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자기 주변의 종교인들, 특히 가나안 땅의 열광적 바알주의운동의 그 열렬한 신앙양태, 이른 바, “자기상해(自己傷害)를 불사(不辭)하는 믿음”(cf. 왕상 18:26-29)과 모압 족(“그모스” 신을 믿는 족속)과 암몬 족(“밀곰/밀곰” 신을 믿는 족속)(왕상 11:5,7, 33; 왕하 23:13)의 그 “자식을 번제물로 바치는 신앙행위”(왕하 3: 27; 13:10; cf. 레 18:21; 20:2) 등등과 비교하면서 심각한 신앙적, 신학적 회의에 빠진다. “과연 야훼 하나님은 자식을 마치 동물번제처럼 도살하여 번제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시는 그런 신(神)이실까?” “자기 자식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는 인신희생제(人身犧牲祭)를 신심(信心) 깊은 신앙행위로 보시는 분이실까?” “신(神)의 윤리성(倫理性)은 논외(論外)의 문제인가?” (칸트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신뢰관계 안에서는 그러한 말씀이 선포될 수가 없다고 본다.)

3-8절: 아브라함은 곧 일어나서(cf. 12:4a)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길 떠날 준비로서 단지 번제에 쓸 장작만(!)을 챙겼다.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없이! 그리고는 “사흘 길”을 걸은 후 목표지에 도착하였다. 이 고뇌에 찬 “사흘 길”은 문자 그대로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여왕” “이난나”(Inanna)가 지하의 세계로 내려간 그 “삼일(사흘 밤낮) 여정(旅程)”(Inanna's Descent to the Nether World; ANET, Pp. 52-57)에 비유될 수 있다. 이 신화에 의하면, “이난나”는 지옥의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가 공포의 지옥 재판관들 앞에서 완전 나체의 몸으로 무릎을 꿇어 절한 다음 말뚝에 목이 메여 걸린 시체가 되는 심판을 받았다가 “사흘”을 지난 다음에야 “엔키”(Enki)신의 배려로 환생하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기독교 전통도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행 길을 “비아 돌로 로사”(via dolorosa=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까지 걸어가신 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길이 그토록 참혹하고 적막한 길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이 겪은 심리적 상황을 우리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짧은 대화문으로 묘사한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습니다만,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조치를 취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창 22:7-8)

이 표현은 히브리 설화문학 예술의 최고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C. Westermann, P. 359)고 할만하다. 여기 나타나는 아버지의 대답이 묵비(黙秘) 속으로 감추어지는 그것은 결코 임기응변적 속임수가 아니라(!) 혈육의 아버지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바, “하나님의 가능성”(“엘로힘 이레 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조치를 취하실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Elohim will see for him.이다.) 속에 그 대답을 던져 그 가능성을 열어 놓는 신앙고백적인 신학적 언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 물음에 대한 참 대답자라는 것을 묵시(黙示)하고 있는 것이다.

9-10절: 아브라함은 여기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앙인으로만 부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9절은 근본적으로는 2절에 연결될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제단을 쌓고(bnh) 자식을 묶어(`rk)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은(`qd) 다음 자기[아들]을 칼로 잡으려(shht) 하였다. 이 네 개의 히브리어 단어(동사)는 모두 놀랍게도 희생제사적 용어가 아니고 제의(祭儀) 밖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단순한 제사행위라고만 볼 수는 없고 “심각한 신학적 물음의 진행과정”을 서술한 비제의적(非祭儀的)인 문학적 표현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실로, 시험 받는 아브라함의 저 중대한 신앙적/신학적 질문, 즉 “야훼 하나님은 아들을 잡아 죽여 제물로 바치기를 요구하는 그런 신(such a god)이신가?”라는 항변이 마침내 하늘에 상달(上達)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롬 4:11)으로 하는 모든 신앙인들의 신학적 질문도 함께 하나님께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이 순간은 “[지상의 모든] 용사들이 거리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평화협상에 나섰던 [모든] 사절들이 슬피 우는 [순간]”(사 33:7)이었다.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z/tse`aqh, cf.김이곤, “Outcry" Inter. July 1988, pp.229ff.)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

11-12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11절)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12a절)> 하늘로부터 들려 온 이 음성은 하나님의 다급/긴급한(urgent) 계시(啓示)의 음성이었다. 이 부분은 우리 본문의 전환점이요 절정점이었다. 이 계시는 또한 아브라함이 시험에 통과하였다는 선포요 동시에 아브라함이 그 시험 속에서 던졌던 중대한 신앙적/신학적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말하자면 이 말씀은 “야훼 하나님은 아들을 잡아 제물로 바치기를 요구하는 신이실까?”라는 신학적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긴급한(urgent) 대답이었다. 그 대답의 내용은 단지 <“나는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행위를 원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라는 것, 뿐이었다. 다음과 같은 베스터만의 주해(註解)는 매우 명쾌한 해석학적 분석의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즉 그 아이에게 닥칠 그러한 잔인한 운명을 [야훼]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의도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고 또 확인시켜 주고 있다.”(Genesis 12-36, P. 361)

또한 이 말씀은 신명기 역사가나 개혁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미 선포된 히브리 야훼종교의 기본 이념을 대변한 말씀으로서, 그것은 곧 <“나는 인애(“헷세드”)를 원하고 제사(“쩨바하”)를 원하지 않으며 번제(“올롯트”)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따앗트 엘로힘”)을 더 원한다.”(호 6:6)>라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와 정확한 동의평행이지만, 신명기적 역사가도 또한 <말씀을 듣는 것(“쉐모아”)이 제사(“쩨바하”)보다 더 좋고,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하크쉽”)이 숫양의 기름(“헬렙 엘림”)보다 더 좋다.(삼상 15:22b)>라고 역설(力說)하였다. 그러므로 창세기 22:11-12의 이 말씀(“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천계(天啓)의 신언(神言)이었음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은 시험을 통과하였다(12b,c절, “앗타 야다아티”=“이제야 나는 알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현(顯現, appearance)과 그분과의 만남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cf. 욥 40:6-42:6)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하나님과 부딪혀야 무엇이든 결론이 난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경험과 야곱의 얍복 강 경험은 정확한 상응을 이룬다고 하겠다.

13-14절: (시험의 결과) 이전에는 불가능하였었던 아브라함의 희생번제의 제사행위는 이러한 신학적 시험을 통과한 다음에야 진정으로 가능해졌다. 즉 어린 아이 희생번제라는 반도덕적 종교행위가 폐지된 후(“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어린 양 희생번제”가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고 보니, “아, 보라!”(“붸힌내!”) “거기에 숫양 한 마리가 수풀에 그 뿔이 걸려있지 않은가!”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즉각! “즐거운 승리함성” 대신에, 그 곳,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일어났던 그 곳을 이름 지어 단지 “야훼[여호와] 이레”(“보다”[see]의 단순 능동 미완료태 3인칭 남성 단수)라고 부르는 일만을 하였다. 그 뜻을 풀이하면 “야훼께서 보실 것이다.”(Yahweh will see.)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 후, 그 자음은 그대로 둔 채, 수동 형태[niph`al 형태]로만 바꾸어 “야훼 예라에” 즉 “야훼께서 보여 지실 것이다(=야훼께서 나타나실 것이다. Yahweh will appear.)”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야훼(여호와) 예라에”를 기독교의 전통적 번역에서는 “야훼(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Yahweh[The Lord] provides.)라고 번역해 왔다. 아마도 이 번역은 우리 본문 8절의 “엘로힘 이레 로”(“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조치를 취하실 것이다.”)를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새번역, 그러나 개역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고 번역)라고 번역(意譯)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70인 역본(LXX; Ὁ θεὸς ὄψεται ἑαυτω)과 미국 유대인 공동체의 영어번역(God will see to the sheep for His burnt offering.)은 직역(直譯)을 고수하였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개신교의 의역보다 70인 역본과 미국 유대공동체의 번역이 히브리 본문(MT: 마소라 텍스트)의 본의, 특히 그 신학적 의미를 바로 살렸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처럼 신학적 의미를 깊게 담고 있는 “난해의 어구”는 어떠한 권위 있는 번역도 의역보다는 직역을 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14b절의 ”야훼 예라에“도 또한 70인 번역(κύριος ὤφθη)과 미국 유대공동체의 번역을 따라 직역을 택하고 그 의미해석의 문제는 독자들에게 넘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직역”(70인 역본과 미국 유대공동체 TaNaK)을 따르는 경우), 그 신학적 의미는 창 22장의 본의(本意)에 더욱 가깝게 규명되는 것을 본다. 본문 8a절과 14b절의 본 의미(“엘로힘[야훼] 이레”→“야훼 예라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살피실 것이다”→“야훼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본문의 신학적 의도에 더 부합할 것으로 보인다.

모리아 산에서 이루어낸 아브라함의 승리(시험 극복 또는 시험 합격)와 갈보리(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죽음 극복)는 모두가 다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야훼)의 자기 현현(顯現; theophany/vision)>에서만(!!), 즉 욥의 경우처럼(욥 40:6-42:6),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엘로힘(야훼) 이레”(하나님은 가능하시다)의 신앙에서부터 “야훼 예라에”(하나님 야훼와의 상봉과 구원 승리)의 최후 승리(cf. 욥 40“5-42:6)로 나아가는 구원사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는 신”이 아니라 “아들을 살리시고 아들 대신 숫양을 화목제물로 바치게 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시고 아브라함과 예수를 죽음에서부터 살리신 그 참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발견하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설교 實演)

나는 그런 신이 아니다

창 22:1-14; 요한 3:17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흔히들 말하기를 “믿음의 조상”이라고들 한다(롬 4:13). 그러나 신앙의 대 선조라고 하는 이 아브라함도 그의 신앙의 절정기인 그 어느 때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한 심각한 “시험”(試驗, הסנ, nissah)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시험은 그 자신이 100년 세월이 넘도록 지켜왔던 그 모든 신앙전통을 모두 다 잿더미로 만들 만한 그런 엄청난 신앙적 위기의 사건이었다. 이 시험의 사건을 가리켜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본문의 성서기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라는 짧은 말로 표현하였다.

성서기자들은 철저히 이러한 형식으로 역사적 사건을 기술한다. 이 점이 일반 세계역사가들이 역사를 쓰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성서기자는 아브라함이 시험에 빠졌던 그 사건을 기록할 때, 전혀 서슴없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라고 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말은, 성서에서는, <시험>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반성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에 관한 해당구절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한 간구도 또한 전적으로(!) 그 <시험>의 주체(主體)를 “우리”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본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에 나타나는 바,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그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은 그 어떤 사건에 대한 사실적(寫實的) 묘사가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저 끔직스러운 시험”의 실체를 성서기자가 신학적으로 반성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이 설교를 통하여 반드시 규명하여야 할 중심적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일어났었던 그 “시험의 실체”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 라고 하겠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직면하였었던 그 “시험의 실체”는, 우리의 본문에 대한 철저한 주석적 관찰을 통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하겠다. 즉 아브라함은 자기 주변의 종교들이 추구하는 그 열정적인 신앙을 보면서, 그것에 비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앙적 열정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라는 회의적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주변 종교들은 아브라함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적 열정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만큼 그 종교적 열정이 너무나 엄청나고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15세기경부터 기원전 7세기경까지의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중동세계들이 남겨놓은 그 방대한 종교자료들을 살펴보면, 중동세계는 그야말로 그 종교적 열정이 용광로 속처럼 들끓고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특히 가나안 땅을 휩쓸었던 바알종교의 열정은 “자기의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해하면서까지” 그 신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기를 추구할 정도(왕상 18:28)였고 암몬족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바, 밀곰 또는 몰렉이라는 그들의 “민족신”에 대한 충정은 감히 자식을 불로 지나가게 하여 자식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는 신앙의 경지에까지 가 있었다(왕상 11:7b; 왕하 23:10). 또한 암몬족의 형제국인 모암족의 세계에서도 그모스라는 “민족신”에 대한 충정의 표로서 자기 자식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신앙의 경지에까지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왕상 11:7a). 심청전이라는 소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옛 민간신앙에서도 처녀 딸을 산채로 용왕님에게 제물로 바치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도 일어날 수 있다는 신앙이 유포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마음을 지배하였던 신앙적 의문과 종교적 회의(懷疑)도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저 가나안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에 대한 높은 신앙심의 표로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잘라내는’(왕상 18:28) 데까지 가고 있는데, 그러나 나는 과연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저들만큼 높은 열정을 가지고 믿고 있는가?” “암몬족이나 모압족의 신앙인들은 자기 자식을 불로 지나가게 하여 자식을 번제물로 태워 자기들의 신에게 바치기까지 하는데, 그만큼의 깊은 신심(信心)을 나도 과연 갖고 있는가?”(왕상 11:5,7a,b; 왕하 23:10) 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의 실체였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것을 사무엘을 성소 봉사자로 바치는 “나실인 관습”과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려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저 모압 인들이나 암몬 인들과 같이 그렇게 자기 자식을 실제로 도살(屠殺)하여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그런 끔직스러운 비윤리적 종교행위 자체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여기서 자신의 신앙이란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 인들이나 밀곰이나 그모스를 섬기는 모압과 암몬 인들의 신앙에는 매우 못 미치는 참으로 보잘것없고 초라한 신앙이 아닌가? 라고 스스로에게 강하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이고 또 어떤 신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신앙이냐 라고 하는 물음을 아브라함은 자신을 향하여 진지하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순복음교회 교인들이나, 또는 여호와 증인의 신도들이나 또는 민간 여객기를 하이재킹(hijacking) 하여 100층도 넘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들이받아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비행기 자살테러단, 저 “알라” 신을 섬기는 이슬람교 교도들이 갖고 있는 그런 종교적 열정에 비하면, 우리네들의 신앙은 너무 미지근한 것이 아닌가? 십일조도 제대로 못 내고 새벽기도회도 열심히 못 나오고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도 없는 이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시험”의 실체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리하여 이 시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비장한 결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숨을 건 모험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몰래,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 등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외아들 이삭과 그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어 가지고 번제로 드릴 양도 없이! 불과 칼만을 챙겨서 결연히 사흘 길이나 되는 모리아 산을 향해 길을 나섰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랐던 이 길, 이 길은 참으로 기막힌 길이었다. 그리하여 이 길을 가리켜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라틴 말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뜻은 “슬픔의 길”(sorrowful road)이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까지 걸어간 그 길을 가리킬 때 쓰는 통상적 언어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 야훼와 한판 승부를 하기 위하여 즉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바로 이 길, 이른 바,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칼을 잡고 나이 백세에 얻은 금지옥엽의 그 사랑하는 아들을 도살하려고 손을 내어밀었다. 하늘과 땅이 숨을 죽이듯 긴장된 참으로 기 막히는 순간이었다. 만일 그의 손을 제지하는 자가 거기에 없었더라면,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 손에 잡은 칼을 아들, 이삭의 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슴을 향하여 내리 찔렀을 것이라고들 성서해석자들이 말할 정도였다. 이 절박한 순간!! 그러나 돌연 하늘로부터는 하나님의 사자의 다급하고도 숨 가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러나 이렇게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불렀다는 것은 이 하늘계시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말이었다.

아, 그러나 그 하늘계시의 내용은 단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모습이었다!! 이 “하늘계시”가 갖는 참 의미는, 분명, 이것이었다. “나 야훼는 아들을 잡아 죽여 그것을 제물로 바치는 그런 종교적 헌신을 요구하는 그런 신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나 또는 번제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신앙>일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진실로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사실이 선포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야훼 하나님은 자식을 잡아 죽여 제물로 바치는 그런 종교행위를 “결코 원하지 않는 신”이시다는 선포였다. 즉 우리가 믿는 성서의 하나님은 바알, 밀곰, 그모스, 등과 같은 신, 이른 바, <아들을 잡아 제물로 바치기를 요구하는 따위의 비도덕적이요 반윤리적인 그런 신>은 결코 아니! 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신은 아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 성서가 증언하는 그 하나님은 결코 바알이나, 몰렉이나 밀곰이나, 그모스와 같이 인신희생물을 좋아하시는 그런 반윤리적인 신은 아니시라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원하시지만, 그러나 양이나 소나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행위는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강력히! 제지하시면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었다. 야훼 하나님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충성을 요구하시는 그런 신은 결단코! 아니시었다. Never! Never! Never!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반윤리적인 우상을 결사적으로 섬기고 있는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그러므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상을 살피시어 우리를 심판하시고 지옥의 형벌로 벌주시는 그런 신(神)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희생양을 따로 마련해주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한없이, 한없이 베풀어 주시는 그런 신(神)이시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 선생께서도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 3:17)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제물 바치기만을 요구하시는 신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신이시다. 하나님은 징벌하시는 신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신이시며 미워하고 보복하는 신이 아니라 사랑하고 긍휼을 베푸시는 신이시다. 심판하시는 신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신이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제물 바치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심판의 칼로 치신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나 없나를 시험하시기 위함 때문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징벌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과연 용서받을 자격이 있나 없나를 시험하시기 위함 때문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미워하시고 우리에게 보복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나 없나를 시험하시기 위함 때문이다.(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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