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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첫째 주일: "판도라의 상자와 성서"

박경철 (전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31 (수) 16:20 14년전 7606  
제목: “판도라의 상자와 성서”
성경: 구약: 이사야 40:1-5 신약: 마가복음 1:11-8

서구의 문화를 우리는 기독교 문화라고 흔히 말합니다. 기독교 문화는 성서의 문화이고, 성서의 사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곧 구약 히브리 사상과 문화입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배경은 로마 시대의 배경이고, 이는 헬라의 배경과 역사를 이어가고 있지요. 그래서 기독교 문화를 이루고 있는 서구의 사상과 문화의 큰 두 줄기는 히브리 사상과 문화 그리고 헬라 사상과 문화라고 봅니다.

인간 사회를 규명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 인간사의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선과 악이 들어 있지요. 생사병로의 인간사 속에는 고난과 그 고난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인간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다시 오심을 기리는 대림절 첫 주입니다. 옛부터 서구 교회는 대림절을 맞이하며 4주간 매주일 촛불을 하나씩 밝혀오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부터 대림절 촛불을 밝혀갑니다. 그 첫 주로 오늘 첫 번째 촛불을 밝혔습니다. 대림절 4개의 촛불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첫 번째는 ‘희망’, 두 번째는 ‘정의’, 세 번째는 ‘기쁨’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촛불은 ‘사랑’입니다. 이 전통에 따른다면 오늘은 ‘희망’의 촛불을 밝힌 것입니다.

서구 문화에서 ‘희망’에 관한 대표적인 이야기 중에 하나가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최고의 신인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불을 갖게 된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키게 되지요. 그로 인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 듯 그 교만은 신의 능력을 넘보게 됩니다. 이에 화가 난 제우스는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에게 명하여 인류 첫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게 해서 아름답게 꾸며 인간세계에 내려 보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녀를 경계하였지만, 그의 아우 에페메테우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신들은 그녀에게 많은 결혼 선물과 상자 하나를 선물합니다. 판도라 그녀의 이름의 뜻이 ‘일체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판도라는 호기심으로 그 상자를 열게 되었는데, 그 속에 있던 인류의 불행의 씨앗인 인간의 모든 번뇌와 괴로움이 상자 밖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급하게 상자를 닫자 그 상자에는 오직 하나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수많은 번민과 고통 가운데서도 아직 판도라 상자 안에 남아있는 ‘희망’이 다시 나올 것을 고대하며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의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판도라의 상자의 이야기와 관련이 없다 하여도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때론 원치 않는 불행을 당하며 고통 가운데서도 그 고통을 이겨내려는 힘겨운 몸짓은 바로 그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기독신자들은 판도라의 상자 안에 있는 ‘희망’을 끄집어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지만 우리들에게도 불행과 고통이 닥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고통을 이겨내려는 우리의 믿음의 상자, ‘희망’을 끄집어내려는 것은 ‘판도라의 상장’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될 것입니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요? 오늘 대림절 첫 주, ‘희망’의 촛불을 밝히는 우리에게 성서는 무엇을 말해 줄까요?

구약성서를 통해 이스라엘이 가장 고통 가운데 처한 상황이 곧 바벨로 포로기 생활입니다. 영원할 것이라던 다윗왕조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무참히 불타버리고 이방인의 땅으로 포로로 잡혀가 있던 시절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렇게 무참히 어길 수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신에게 질 수 있는가? 이런 회의와 절망 가운데 처한 시기가 곧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구약성서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쓰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의 약속을 접고 당신의 백성을 져버리신 게 아니다. 하나님이 이방신에게 진 게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을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당신의 백성을 심판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비하셔서 당신의 뜻을 돌이켜 죄지은 당신의 백성에게 심판과 연단을 통해 이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인줄을 새록 깨닫게 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구원의 길을 베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그들의 역사를 교훈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것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이 곧 성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이사야서 40장 말씀은 바로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외친 구원의 선포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그런데 이 구원의 선포를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본문인 마가복음의 시작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시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의 복음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마가복음의 기자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서 본 것이지요. 그것은 복음으로 오시는 예수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그 길을 예비하는 자로 세례요한을 제일 먼저 보여줍니다. 복음으로 오시는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요한의 일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지요. 죄사함의 표로 말입니다. 복음의 예수를 맞이하는 제일 먼저의 일은 곧 죄사함을 받는 회개였던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 우리의 ‘희망’을 기대하는 신앙인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선포는 복음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이지요. 대림절 첫 주 첫 번째 ‘희망’의 촛불을 밝힐 때,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빈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우리 옛 선조들의 민간신앙의 모습 중에는 무언가 간절히 기원할 때는 몸을 정갈하게 씻는 일이 있었지요.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특히 대림절을 맞이할 때도 자신의 몸도 마음도 정갈하게 씻고 오늘 이 땅에 다시 복음으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되는 4주간의 대림절이 아닐까요?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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