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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누가복음 21:1-4)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4-01 (목) 10:18 12년전 6701  

누가복음 21장 1-4절에 보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하는 것을 보시고는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을 하나님께서는 더 크게 받았다고 하십니다.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합니다.

헌금을 어떤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증거 할 때 이 말씀은 많이 인용됩니다만 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오해하는 점이 있습니다. 부자의 헌금이 그것인데 '풍족한 중에서 바쳤다'는 말씀 외에는 다른 말씀이 없는데도 부자가 헌금을 할 때에 정성껏 바치지 않았다거나 형식적으로 바쳤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부자의 헌금 역시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며, 사람들은 단지 양적으로 많으냐 적으냐하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하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물론 하루 두 렙돈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과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족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나눔의 부재로 인한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입니다.

첫 번째로는 많든 적든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잘 나서, 내가 남들보다 더 노력을 많이 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내 것이 되고 맙니다. 분명히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얻었다고 할지라도 땀흘린 만큼 거두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내가 얻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했지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것이라고 성별해서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는 것이지, 내 것의 일부를 드린다는 심정으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를 했는가에 연연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첫 걸음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땀흘려 수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땀흘림의 대가로 얻는 모든 것은 적든 많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감당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청지기'라는 말을 사용(눅12:42; 16:1)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할 뿐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은 모두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과부의 생활비가 모여 교회의 재정으로 사용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예물이 어떻게 쓰여져야겠습니까? 허투로 쓰여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절실하게 원하시는 곳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근래에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교회재정의 많은 부분이 교회자체를 유지하는데 사용된다고 합니다. 선교비나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보다 교회를 치장하고,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필요이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과부의 헌금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하게 바쳐진 예물일지라도 귀한 곳에 사용되지 않으면 바친 손길이나 쓰는 손길이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예물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에 사용된다면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간의 격차가 극심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도시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농어촌교회의 희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농어촌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다녔던 이들이 자라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면서 도시교회의 대형화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농어촌교회는 농촌인구의 고령화와 일자리의 부족으로 인해 늘 그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농어촌교회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도시교회나 큰 교회에서는 농어촌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지원들을 한다기보다는 시혜적인 차원에서 흉내나 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농어촌교회의 일년 예산을 다 합쳐도 대형교회의 한 주간 헌금액수보다도 적은 현실입니다. 그러니 농어촌교회의 목회자들은 최저생계비도 보장을 받지 못하는가 하면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연봉 몇 억에 2000cc급의 대형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이것은 불의한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가 실현되려면 교회의 이름으로 사용되는 모든 재정이 투명해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나눠져야 합니다. 개교회주의와 성장주의에 빠져서 교인들이 하나님께 성별하여 드린 예물을 '개교회의 것'으로 여기는 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는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하고 남은 것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와 함께 헌금했던 부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 하루 루 렙돈으로 살아가는 과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자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린 예물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몫을 드렸다 생각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치고 남은 물질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축적해 놓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검소하고 조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감으로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쌓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습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교회의 큰 흐름을 형성한 영성은 '기복주의'적인 영성이라는 비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잘 믿으면 만사형통 한다'는 식의 메시지는 아무리 땀흘려 일해도 늘 그 자리를 맴도는 이들에게 큰 매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도 여전히 그 '만사형통'이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지가 조금 세련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부자'가 되는데 초첨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라'고 하지만 그 '풍요로운 삶'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물질적인 것이요, 부흥회에서 말하던 '만사형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기에 더 나아가서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 주십시오'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냥 '리더'라고 하니 세상적인 것 같아서인지 '영적 리더'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나 '영적 리더' 역시도 그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은 '기복신앙'에다 현대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리더쉽'을 결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냥 '리더'도 아니고 '영적 리더'니 보이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자기만족, 자아도취에 빠져서 자기의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과 죄를 사해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은 '죄를 사해주는 일-영적인 일, 보이지 않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쉬운 '육체적인 병 고치는 일-보이는 일'은 외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자 비난을 합니다. 그들의 죄 사함이라는 것은 요즘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빙자한 '사기'였던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꼴찌가 있어야 일등도 있고, 일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법입니다. 꼬리 없이 머리만 있는 뱀은 괴물입니다. 온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도 중요하지만 꼬리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머리냐 꼬리냐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이뤄가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풍족한 중에 헌금을 했던 부자는 가난한 과부와 비교해 볼 때 '머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요, 가난한 과부는 '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의 예물을 더 크게 받아주셨습니까? 꼬리의 예물을 더 귀하게 받으신 것이죠. 그러니 머리, 리더가 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 모두가 그리 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 그것은 물질의 문제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는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제생활에서 정의가 일그러져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일그러져 있다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를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올바로 세우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런 고백들이 있을 때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눠야 합니다. 심정적으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봉사하고, 물질을 나눠야 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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