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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시편 19:1-6)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4-01 (목) 10:26 14년전 8299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는 다양하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뜻이니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그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면 들려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 다양한 통로 중에서 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통해서 그 분의 음성을 듣는다. 작은 농어촌 마을에서 목회를 하다보니 자연이 내 일상 속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자연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다. 설거지하면서, 걸레질하면서, 일터에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에 다가가 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저 나 하나 건사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허덕거리는 나 자신의 삶의 부끄러워지고, 그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분이 들려주시는 소리를 어느 곳에서 보다 많이 듣는다. 이렇게 자연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요란하지 않지만 마치 태풍이 온 바다를 뒤집어 놓는 것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나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요즘 베스트셀러 중에서 자연과 관련된 책들이 많다.
현대인들의 삶이 자연과 동떨어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자연의 소중함을 이제라도 느끼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태풍이 제주를 강타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종달리에는 제법 높은 지미봉이라는 오름을 위시해서 여러 오름들이 동네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인지 바람의 길목이 되어 다른 동네보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가 많다. 태풍에 마당에 있는 팽나무의 북쪽 가지들이 부러지고 망가졌다. 북풍이 주로 많이 불어오기 때문에 북쪽가지들이 많이 다친 모양이다. 태풍이 지난 후 꺾어진 나뭇가지를 정리하는데 남쪽에 있는 성한 나뭇가지들도 함께 쳐준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가 균형을 잃어서 쓰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완벽한 좌우대칭은 아니지만 나무는 좌우의 균형을 맞추며 땅을 딛고 서있다. 나무는 살아가기 위해서 뿌리와 나뭇가지와 줄기가 협력을 한다. 좌우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쓰러지고 만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분재되어있는 나무들도 좌우 균형의 미를 살리지 못하면 죽고 만다.

그것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면 나무를 통해서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신앙에는 두 날개가 있다.

어느 한 날개만 커지면 제대로 날 수 없다.
야고보서 2장 17절의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믿는다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조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무를 통해서 다시금 돌아보며 나의 신앙을 균형 잡아가는 것이다.

또 하나, 나무마다 향이 있는데 그 향이 가장 깊은 곳은 '옹이'다. 아시다시피 옹이는 가장 단단한 곳이기도 하다. '옹이'는 나무가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흉터다.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병균이 나무를 죽이려고 할 때 결사적으로 저항을 하면서 생겨나는 것이 나무의 옹이다. 그런데 그 못 생긴 옹이에 나무의 가장 깊은 향이 숨어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난'을 떠올린다.

견딜만한 아픔을 주시는 그 분께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 고난이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고난, 절망 같은 것들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분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의 향기는 깊어지는 것이다. 나무의 옹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고난을 승화시켜 이렇게 깊은 향을 내는 나무를 보아라. 너의 삶에 다가오는 고난들을 피하려고만 하면 깊어질 수 없다. 그것들을 친구처럼 맞이하는 법을 배워 너의 신앙의 향기를 깊게 하라.'

겨울을 준비하는 앙상한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 고백도 했다.

'놓아야 할 때 놓는 지혜를 나무에게서 배운다.

월동준비를 하면서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덧입는 것이 아니라, 비워버리고 벗어버리는 나무의 삶은 처절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비우고, 놓아버림으로 인해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욕에서 자유롭고, 무소유의 삶을 통해서 오히려 인간들의 삶과는 견줄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비울 줄 알고, 놓아버릴 줄 아는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아니, 그저 비우고, 놓아버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병든 사람은 놓아버려야 할 때에도 끊임없이 잡으려고만 한다. 때론 다른 이들의 몫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감을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풍성한 듯 보이는 삶을 또한 많은 사람들이 동경한다. 여기에 인간사의 비극이 있을 지도 모른다.

나무를 보라.
미련 없이 놓음으로, 벗음으로 새로운 봄을 잉태하는 나무를 보라.'

<본인의 글-'누가 누구를 붙잡고 있는 것인가?' 중에서>

 

꽃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꽃처럼 요상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40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제주의 작은 농어촌교회에 둥지를 틀고 시골생활에 적응을 해갈 때의 일이다. 어느 봄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산책을 하는데 풀 섶에서 노란 양지꽃이 '안녕!'하고 인사를 한다.

'저것을 언제 보았던가?'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본 이후 그 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최소한 25년 동안은 저 존재를 잊고 살아간 것이 아닌가! 나는 저를 25년 이상 잊고 살았는데, 그래서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했는데 양지꽃은 누가 보아주든 말든 늘 그 모습 그대로 봄이 오면 햇살 바른 양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피고 지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그 날 이후 산책을 할 때마다 풀 섶에 눈길을 주니 수많은 꽃들이 다가왔다.
그 분께서 만들어주신 저 예쁜 꽃, 그 분의 숨결이 들어있는 저 예쁜 꽃들을 그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치는 것도 죄인 것만 같아 그들과 눈맞춤을 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 둘 알아가면서 그들에 관한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해 하나 둘 깊이 알아가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것들, 그래서 그 이름조차도 불경스럽게 불리는 것들조차도 허투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고 그 작고 못 생긴 꽃들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불경스러운 이름을 가진 꽃들을 소개하는 글을 하나 소개한다.

'쥐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쥐오줌도 있다.
그러면 이 쥐오줌풀은 씨앗이 열렸을 때 쥐오줌을 뿌려놓은 형상일까?
쥐오줌풀이라는 이름을 얻은 내력은 뿌리에서 나는 향기(?)가 쥐오줌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름 하나 붙여주기 위해서 그 식물의 가장 튀는 속성을 알기까지 세심하게 관찰한 이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춘수 시인은이렇게 '쥐오줌풀'을 노래했다.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
오늘 해질녘
다시 한 번 눈 떴다 눈 감는
하느님,
저만치 신발 두 짝 가지런히 벗어놓고
어쩌노 멱감은 까치처럼
맨발로 울고 가신
하느님, 그
하느님
<김춘수, 쥐오줌풀 전문>


느닷없이 쥐오줌풀을 보고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을 떠올린 시인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맨발로 울고 가신'이라는 대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십자가의 고난을 떠올리게 된다.'

<본인의 글 - '불경스러운 이름을 가진 꽃들' 중에서>

불경스러운 이름을 가진 꽃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쥐와 관계된 꽃들 중에서 '쥐똥나무'와 '쥐오줌풀'을 소개하며 썼던 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이들이 바로 불경스러운 자들이요, 천덕꾸러기들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이다. 천덕꾸러기, 소망 없이 살아가던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니 온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그 분의 사랑의 손길이 닿은 것들마다 그저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당신의 숨결을 숨겨놓으신 것이다.

벌레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꼬물거리는 작은 벌레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때로는 그들을 죽이심으로 인간들에게 경고하기도 하신다. 인간이 받아야 할 죄의 대가, 고통을 벌레들에게 지게 하시는 것이다.

환경의 문제로 온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각설하고 이 환경오염으로 인해 일차적인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무 죄도 없는 작은 벌레들이다. 마치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이에 대해서 통곡할 수 있어야 하며,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하는 한탄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하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교회에 딸린 작은 텃밭이 있는데 그 텃밭은 나의 명상공간이기도 하고, 설교의 보고이기도 하다.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먹을 만큼만 지으면 되니 큰 부담이 없어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농약을 치지 않으니 잡초뿐만 아니라 벌레들까지 들끓는다. 어느 날 나무젓가락을 가지고 배추벌레를 잡는데 7살 짜리 막내가 거들어준다더니 그냥 스스럼없이 고사리 손으로 배추벌레들을 잡아서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예쁘다. 아빠 이거 가지고 놀아도 돼?"한다.

그 날 이후 작은 텃밭에 자라는 채소는 벌레들과도 나눠먹기로 했다.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우리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작은 배추벌레 속에는 '나비'가 들어있지 않은가?

비약일까?
작은 벌레를 보면서 또는 곤충들을 보면서 나는 '거듭남'이란 이런 거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야 하는 그 분의 음성을 듣는다.

구원의 확신, 거듭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옛 자아들, 온전히 죽지 못하는 내 속에 들어있는 속물근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꾸짖음이다.

계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계절을 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혹시 싫은 계절이 있다면 하고 물으시는 분들에게 스스럼없이 겨울이 제일 싫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먹을거리가 풍성한 가을이다.

계절마다 맞물려 있는 시간들이 있다.

겨울과 봄, 봄과 여름, 여름과 가을, 가을과 겨울 이렇게 두 계절이 공존하고 있는 시간들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 계절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들이며, 아름답기에 참으로 짧은 시간들이다.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연둣빛 새싹들이 저 동토(冬土)를 뚫고 올라올 때, 수 천 수 만 겹의 파도가 우리를 유혹하기 시작하는 계절에, 피워내던 꽃들이 하나 둘 지고 각양각색의 달콤한 열매로 익어 가는 계절에, 울긋불긋 물들어가며 온갖 과실을 내어놓으며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계절 앞에 직면해 있다.
이 계절에 나는 죽은 듯 침묵하고 있던 새싹들의 아우성을 본다. 그들의 침묵, 그것은 그저 죽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겨울 추위와 싸우며 새 봄을 기대하는 침묵이었다.

봄에 피어나는 씨앗들이 튼실한 열매를 맺으려면  '꽃눈처리'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꽃눈처리란 영하의 기온에서 최소한 10-15일 정도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이 과정이 없으면 새싹을 내고 꽃을 피워도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그저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작은 씨앗들마다 자기의 몸에 고난의 흔적들을 간직하며 인내로 겨울을 보냈던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돌아본다.
자연을 통해서 듣는 하나님의 음성, 그것은 아주 세미한 음성이지만 한 번 그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 내 삶 구석구석에서 말씀하시는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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