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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그곳에서 예수를 만나다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4-02 (금) 07:29 14년전 4270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다양한 통로 중에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분의 말씀은 참으로 감미롭고, 아름답고, 장엄하다. 풀섶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작은 들꽃들과 바위나 절벽에 피어 더욱 더 깊은 향기와 화사한 빛깔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절망적인 상황을 오히려 반전시켜 가는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삶에 다가오는 고난도 그 분의 뜻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들꽃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고백일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기적을 베푸실 때에 귀머거리와 벙어리들과 장님들을 고쳐주셨다.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날 이 기적은 사라진 것인가? 우리가 그 기적의 의미들을 단지 육체적인 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전인적인 해방의 차원, 하나님의 형상회복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장님들은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그것이 귀머거리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하지 못하면 벙어리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욕심 채우는 것만을 탐하고 바라보면 그것이 장님이 아닌가?

육체적으로 건강하나 이렇게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을 행하시길 원하고 계신다. 문제는 무엇인가? 기적을 체험한 이들의 믿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물질만능, 최첨단과학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너무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체로 세우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가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려고 하고, 사회도 이것을 당당한 삶이라고 부추긴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끊임없이 자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 때에도 우리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경쟁의 시대다. 경쟁의 논리는 끊임없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높아짐의 대열에서 우리의 기도는 더 높아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유치한 기도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가 되었다. 이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드려져야 할 때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들을 듣고, 그 분이 들려주신 말씀을 전하며, 그 분이 보여주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내 삶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가 만나는 것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 분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나는 고백을 한다. 특별히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하나님께서 자연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하나 둘씩 깨달아간다. 그랬다. 아주 작은 들꽃 하나도 허투로 피어있는 것은 없었고, 그 분의 숨결이 그들에게 들어 있었다. 작은 농어촌교회를 섬기고 있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그 선물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들어오면서 나는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산책을 하는 길에 해오름의 바다를 바라볼 때가 많다. 바다는 넓고 깊다. 넓고 깊으니 온 생명들이 살아 숨쉬고, 그 바다로 인해 오염물질들도 정화되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참 고마운 바다, 넉넉한 바다를 주신 분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 하루를 시작할 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고백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니 귀도 트이고 말문도 트이게 되었다.

바다를 보며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다

어느 날 바다의 발원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저 높은 산 계곡 어딘가의 작은 이슬방울이었을 터이고, 이슬방울이 하나 둘 모여 작은 계곡을 이뤘을 것이며 물들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뤘을 것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있는 법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니 끊임없이 낮고 천한 자들에게로 내려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런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 그것으로도 모자라 세례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사함의 표징인 물세례를 받으시며 죄인 인간들과 동일한 곳까지 내려오신 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섬김의 도를 몸소 보여주셨던 분, 자기의 뜻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끊임없이 낮아지심으로 인해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그 분과 바다는 닮았다.

여름 휴가철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산과 들과 바다로 나간다. 그 이유는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의 삶을 재충전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자연과 더불어 단 며칠이라도 보내고 오면 다시금 힘을 내서 우리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의 근원, 그것은 단지 일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해도 우리가 다녀온 그 자연 속에 하나님의 기운이 충만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른 사이에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들이 재충전되는 것이다. 그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분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데 그러한 통로를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눈뜸이요,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그 분의 말씀을 듣게 되는 시작인 것이다.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경외감, 어떤 이들은 거기서 머물러 샤머니즘화된 자연숭배를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게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어느 이른 봄날 산책길에 노랗게 핀 양지꽃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름이 생각난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더 신기한 것은 내가 잊고 살았던 그 세월동안에도 그 꽃은 늘 한결같이 피고 지며 그 삶을 이어왔다는 사실이었다. 가만히 풀섶을 살펴보니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들이 여기저기에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을 하나둘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 둘 깨달아 가며 그들과 조우를 하며 3년째를 보내고 있다. 맨 처음에는 예쁜 꽃만 찾았는데 서너 달 지나고 나니 그야말로 이름 없는 들꽃이라 불리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못생긴 꽃들이고,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들이었다. 흔한 말로 '잡초'였다.

그들을 눈여겨보면서 그네들의 삶이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름을 하나 둘 알게 되면서 많은 꽃들이 자기들만의 전설이 있고, 꽃말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 날 바닷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핀 꽃들을 만났다. 바닷가라는 상황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게다가 바위틈이라니. 그들의 삶이 고단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평지에 있는 꽃들보다 더 향기롭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그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음성이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바라보다 보면 내 삶에 힘든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삶의 화두를 얻었다. 그 삶의 화두는 하나씩 다가왔는데 순서대로 하자면 '느릿느릿, 작은 것, 못생긴 것, 단순한 것, 낮은 것'이라는 화두다.

느릿느릿 걸어야만 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걷다보면 풀숲에 숨어있는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예쁜 것만 찾아다녔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꽃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외면당하는 못생긴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싫증나지 않고 오랫동안 각인되는 꽃은 복잡한 겹꽃보다는 단순한 홑꽃이다. 꽃들을 보기 위해 오른 갯바위에서 넓고 깊은 바다를 바라보면 그 곳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높고 깊은 산의 계곡 어딘가에서 시작된 작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은 바다에 이르게 될 테니 말이다.

꽃들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이런 화두를 만나게 되었고, 이 화두는 내 삶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앞으로의 삶도 이 화두를 붙잡고 살아갈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있어 나는 행복했다.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소명감을 가지고 농어촌 목회를 시작했어도 아마 지금쯤은 지쳐서 두 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가끔씩은 정말 그럴까 하다가도 꽃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참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들이었다. 아, 예수님이 그저 가난하고 천한 자들에게로 가신 것이 아니었구나, 그들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들이 있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니 그것이 그렇게 안타까워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삶의 지평을 열어주신 것이구나 느끼게 된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회 변방에서 숨어지내 듯 우리와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임에도 가장 낮은 곳, 변두리에 살아갈 것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서 장애인들이 있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장애인들은 대략 1백 5십만 명 정도라고 한다.
등록되어있지 않은 이들까지 합하면 더 많은 장애인들이 불편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는 사실 그 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를 아는 척도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부족하다보니 그들은 변방에 밀려나 있다. 사회에서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 장애인들, 그런 까닭인지 농촌마을에는 장애인들이 상당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해맑은 모습과 삶에 대한 사랑, 그 모습 그대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단순히 그들과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나은 위치에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렇게 감사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데 그들보다 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나에게 감사의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면서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감사의 조건을 깨닫게 해 준 그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봉사를 하는 것이 그 빛을 갚는 것이라는 심정으로 그들을 대한다. 결국 내가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돕는 다는 사실, 결코 그들에게 시혜자적인 입장으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잡초'처럼 취급당하는 이들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니 그들을 보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단순히 허구가 아니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낮아진다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으뜸이 되기 위해서 낮아지는 것은 가식적인 낮아짐이다. 그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렇게 낮은 곳으로 향하다 보니 바다가 되어있는 현실, 그런 낮아짐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그리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앙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사람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것은 그들의 삶에 낮아짐(겸손)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고백한 만큼 삶도 변해야 하는데 여전히 옛 사람에 머물러 있기에 결국 자신도 공허하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준다.

저 깊은 산 속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흐르다 마침내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전적인 변화다.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이 있다. 아직 바다가 되기 전의 상태,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민물이 아닌 바다가 되는 그 정점이 있다. 그 정점,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이라고 말하고, 성서적으로는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진리를 깨닫기까지, 또는 신앙의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수십년, 평생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은 순간적인 일이다.

그러나 보고 만나는 일이 한 순간에 이뤄진다고 해서 저절로 깨달아지고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인 것이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은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보려는 사람들, 들으려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는 일까지도 서슴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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