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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피어난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4-14 (수) 13:01 14년전 3946  

올 겨울은 유난히도 지리했습니다.

봄이 온 듯 하다가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한 날들이 이어지고 춘삼월에도 춘설이라기 보다는 폭설에 가까운 눈이 내렸습니다. 한겨울에도 넉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소나무도 춘삼월 춘설에 많이 부러졌습니다. 게다가 100년 만에 4월 한파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하니 전세계적으로 기상이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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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폭설에 가까운 춘설이 내린 날, 동네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하얀 눈을 뒤집어쓴 올괴불나무 꽃을 보았습니다. 갑작스레 내린 눈에 꽃이 짓물렀지만 꽃술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대단했습니다. 꽃잎은 상했지만 꽃술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제대로 핀 올괴불나무 꽃을 담을 마음에 공원을 다시 찾았지만 이미 꽃은 다 지고 이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가 싶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이렇게 내년을 기약하는 정도인 것도 있지만, 마지막 단 한 번의 마지막 기회인 것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잘 분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봐야 할 때, 말해야 할 때, 서야 할 때를 잘 알아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고 혹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자기가 서야 할 자리가 아닌데 서려고 한다면 무리수가 따르게 됩니다.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파리가 나오기 시작한 올괴불나무,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강원도 횡성부근의 야산을 산책하는 중이었습니다. 갈색의 숲에 보랏빛 처녀치마가 피어있고, 푸른 이끼가 성성한 계곡에는 괭이눈이 꽃을 피웠습니다. 지난 겨울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처녀치마는 꽃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진한 보라색 꽃을 피웠고, 산짐승들이 얼마나 배고픈 겨울을 보냈는지 평소에는 입에도 안대던 처녀치마 이파리를 죄다 뜯어먹었습니다. 그렇게 처녀치마를 보며 지난 겨울 참으로 매서웠구나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니 올괴불나무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 맞아! 여기는 봄이 조금 늦지. 올 겨울 유난히 추워서 여기는 이제 봄이 오는구나!’

 

내년을 기다리지 않고 올해 이 꽃을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늦게 피어난 꽃, 그 꽃을 보면서 나는 아직 삶을 꽃 피우지 못한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혹은 삶을 꽃피우기도 전에 우리와 이별한 이들과 이미 시들어버렸다고 버림받은 이들을 떠올렸습니다.

 

일찍 피어나는 꽃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꽃이 지고 난 뒤에 피어나는 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기어이 피어 향기를 내고, 열매를 맺는 꽃들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당장의 성과에 목을 매고,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만성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조급한 세상입니다. 물론 대기만성속에 들어 있는 큰 것에 대한 욕망 같은 것들도 문제가 있습니다만 작은 종지 같은 이들이 큰 그릇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담을 수 없는 큰 그릇을 이미 다 담은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판을 치다 보니 꽃을 피워야 할 이들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것.

좀 추상적인 의미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수 있는 세상이라야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의미적으로는 이 말이 통용되긴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정직하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 착하다는 것은 바보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바보들은 늦게 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다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때론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삭풍에 시들어 버릴 수도 있고, 떨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의미 있는 삶입니다.

 

늦게 피어난 꽃, 나는 그들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꽃피우리라는 희망 말입니다.

 

저는 지난 부활절연합새벽예배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극명한 두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예배는 유명하다는 대형교회 목사들과 신도들과 단체로 구성된 대규모의 예배요, 한 예배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교회의 목사들과 신도와 단체로 구성된 소규모의 예배였습니다. 한 예배는 커다란 광장에서 드려졌고, 한 예배는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강변에서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교계신문이나 일반언론에서는 부활절연합예배 소식을 알릴 때에 광장에서 드려진 큰 예배를 소개했습니다. 강변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우리와 뭇생명들에게 선물로 주신 강을 지키겠다는 이들의 소식은 아주 조금, 편린처럼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성직자나 교인이나 큰 교회, 대형교회가 못되어 안달이고, 그런 대형행사에 앞자리 안지 못해 자리싸움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앉아야 능력이고, 자기 교회 목사설교만 끝나면 자리를 성급하게 뜨는 그런 예배를 어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걱정되는 것은 이런 교회, 이런 목사가 되려고 안달하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작아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시들어가는 한국교회에 영성을 되찾을 꽃들이며,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루터기입니다. 이런 꽃들은 늦게 핍니다. 그럼에도 그 꽃이 있어 행복한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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