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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 못생긴 것, 느린 것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4-24 (토) 09:40 14년전 3901  


작은 것, 못 생긴 것, 느린 것

(로마서7:22-24)

오늘 저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한 구도자로서 평생 붙잡고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제 개인의 화두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작은 것입니다.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경제학자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읽은 후부터 줄곧 나의 삶 한 방향을 이끌어 오던 이슈입니다. 그것을 패러디해서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에서 맞닥뜨리는 현상들에 대해서 수 없는 반전의 질문들을 했습니다.

현실은 거대담론과 물신주의가 팽배합니다. 큰 것이 아니면 발붙일 자리가 없는 것 같고, 모두가 큰 것만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작은 것' 타령이라뇨? 

그런데 저는 이것을 붙잡기로 했습니다. 작은 것이 주는 삶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면 그게 바로 귀머거리요, 장님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고, 장님의 눈이 떠지는 기적이 저에게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큰 것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큰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아니, 작은 것도 아름답다는 것을 온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닌지요. 예수님의 곁에는 늘 작은 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 더럽다고 천시받던 병든 사람들, 죄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오늘날 사회를 가리켜 ‘물신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물질이 신이 된 사회, 물질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고 믿는 사회, 그래서 결국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의 목숨은 물론이요 신앙까지도 담보로 합니다. 오로지 모든 인간활동의 목적은 ‘물질’을 얻는 데 있습니다. 이런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물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타락하면서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큰 것만 추구하다 보니 그 소유욕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물질도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나옵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따먹은 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분열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인간이 하나님을 피해 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분열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땅에서 가시덤불을 내게 하십니다. 자연과 인간의 분열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자신과 소유욕에 붙잡혀 사는 자신으로 분열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연과 인간의 분열’입니다. 자연은 그대로 있는데 인간이 죄를 범하자 자연에도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소유욕, 작은 것을 경시하는 풍토는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분열된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려면 인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태도 변화입니다. 이것을 조금 추상적인 말로 바꿔 말하면 그동안은 큰 것만 추구하며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가겠다는 것과도 통합니다. 삶의 전환, 이것을 신앙적인 용어로 바꿔말하면 거듭남이요, 회개입니다.  

두 번째는 못 생긴 것입니다. 

제주도에 살았던 덕분에 농약을 치지 않은 귤을 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몇몇 아는 분들에게 보내니 못생겼어도 아주 맛있다며 난리가 났습니다. '너무'까지는 아닌데 아마도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외모, 외형,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강조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명품을 입으려고 하고, 성형수술은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사람은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가벼움과 경박함의 문화들이 바보상자 TV를 장식해 갑니다. 그리고 전염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내면에는 '못 생긴 것'에 대한 갈망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가 '못 생겼다.'라고 하던 것들이 결코 못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못 생김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 바꾸어 이야기하면 연약함 속에 들어 있는 강인함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변으로 밀려나 있던 '못 생긴 것'을 통해서 '희망'을 보는 사람들, 신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소망'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잘 생겼다.' 혹은 '못 생겼다.'라는 것은 사회적인 편견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가난한 자들, 떠돌이들, 병자들, 여성들, 어린이들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못 생긴 것'들이었지만 오직 예수님의 관심은 그 '못 생긴 것'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못 생긴 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체가 되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겉모습만 보던 삶에서 그 속내까지 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져야 합니다. 깊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당장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에 찾아오는 고난 같은 것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를 성숙시켜주는 친구와도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피하려고만 하면 더 큰 고난이 우리의 삶을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못 생긴 것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그 작은 들꽃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느린 것', 즉 '느릿느릿'에 관한 것입니다. 

스피드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서 '느릿느릿' 살겠다는 것은 어쩌면 바보 같은 이야기처럼 들려질지 모르겠습니다. '빨리빨리!'가 슬로건이 되어버린 현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빨리 가는 것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천천히 가는 것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산을 오를 때에도 천천히 가면 빠른 걸음으로 갈 때에 보지 못하던 수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숨도 가쁘지 않습니다. 산행의 목적이 정상탈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을 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가는 길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에 눈길을 주는 일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 못 생긴 것, 느린 것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씨름을 하면서도 늘 내 마음속에서는 로마서 7장 24절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말씀이 한탄처럼 울려나옵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이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지적인 희열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입니다. 이 시대는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악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 큰 것, 예쁜 것, 빠른 것이 신앙보다 위에 있으므로 악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 그것을 누구부터 깨뜨려야 하겠습니까?

자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등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갈등을 붙잡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긴장감이 없다면 삶도 신앙도 맨송맨송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율배반적인 말 같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것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못생긴 것이 결코 못 생긴 것이 아닙니다. 느린 것이 결코 느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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