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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목사도 신도도 넘치지만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5-10 (월) 09:21 13년전 3640  

목사의 한 사람으로 목사를 바라보는 눈이,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신도를 바라보는 눈이 기쁘고 즐겁지 않다면 이미 모든 것이 넘쳐나도 하나님과는 그만치 먼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 신앙을 증거하는 표징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새까만(?) 후배를 만났는데 은근히 부아가 치민 이유는 선배들이 허다한데도 목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활보하는 것만이 아니라 "2만 명 목회"를 운운하며 자기는 그렇게 큰 비전을 가지고 있는 목사라고 떠들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목회를 양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목회자들, 그런 목회자들이 나이 든 목사들의 고리타분한 생각이 아니라 한창 목회에 대한 비전을 올바로 잡고 나아가야할 젊은 목회자들 조차도 그런 양적인 성장에 매몰되어 목회가 아닌 목회를 하고자 결단하는 목사들을 많이 만난다.
교회는 큰든 작든, 도시에 있든 시골에 있는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면 되는 것임에도 엄연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어, 시골에 있는 목사는 능력이 없는 목사, 작은 교회 목사 역시도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 목사라는 인식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례비는 교회의 양적인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목회자들도 어지간해서는 맘몬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교단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한다.

명예욕이다. 그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교단이나 한국 기독교가 가야할 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욕심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남의 티끌 같은 허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를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대들보 같은 허물은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합리화 시키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면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설교를 듣고, 그런 목회자가 곧 하나님이요 신이라고 생각하는 신도들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뜻을 묻기 보다는 목사의 뜻을 읽기 위해 바쁘고, 교회에서 명예직이라 생각되는 자리를 위해서 봉사를 한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이 봉사한 것에 대해 인정해 주지 않으면 교회를 옮기고 서운해 한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이들에게 더이상 필요가 없다. 사람이 인정해 주어야 그들은 비로소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목사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교인이 있어도 목사에게 갈비 한 짝 대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은 그저 교회의 양적인 성장(교회증축이나 교회내의 행사등을 위해)을 위해서 사용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할 일이요, 그것도 어느 정도의 금액을 넘어가면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기 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을 듣기를 원한다. 그들은 매 주일 목사의 설교를 평가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질책이 있으면 그 목사 실력도 없고, 설교 개판이라고 험담을 한다. 목사는 적당하게 교인들의 구미를 맞추는 설교를 하면서 공허한 이야기들, 그냥 '아멘!'하면 그만인 것들로 현혹하며 "믿쑵니까!"를 반복하고, "아멘!"을 유도한다.  웅변학원을 다녀야 목회를 잘한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전도사시절 담임목사의 사모가 어렵사리 조언이라고 하는 것이 "웅변학원을 다니시라"는 것이었다. 설교도 좋고 내용도 좋은데 언변이 딸린다는 것이다. 그 이후 웅변학원에 한 번 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목회는 스킬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이후에 그저 나는 내가 편하게, 가식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나만의 설교를 하기로 했다. 결국 설교는 교인들과 목회자간의 소통이다. 아무리 멋드러진 설교를 해도 목회자가 삶으로 교인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식적인 관계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이런 가식적인 관계의 형성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그것이 곧 성공하는 목회가 되어버렸다. 자기 양(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저 주일 대예배 끝나면 높은 곳에 자리 잡고 10여분 고개를 까딱이며 눈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되어버린 것은 교회의 본질, 목자와 양의 관계 모두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인들은 이런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그저 예배만 참석하고 헌금하고 세상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정도의 위안을 받으면 그만이다. 물론 적극적으로 교회에서 어떤 명예직을 맡으려면 사회적인 명성이나 위치가 없다면 주차관리서부터 꾸준히 교인들과 목사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아무리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본이 된다고 할지라도 거의 모든 경우에는 물적인 토대, 즉 교회에 헌금을 얼만큼 할 수 있느냐로 헌신의 가치는 전락되고 만다. 교회에서도 사회와 똑같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성공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교회에서도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을 것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목사는 똑똑한 교인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교인들만을 원할 뿐이다. 이런 것들이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신앙따로 삶 따로의 삶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교회도 넘치고 목사도 넘치고 교인도 넘치지만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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