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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삼상 16:6-7)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5-16 (일) 09:11 13년전 6099  

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 할머니는 재활용쓰레기를 모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구부정한 허리에 바람이 다 빠진 리어카를 끌고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폐 휴지와 빈 병을 모아 고물상에 팔아 근근이 생활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날 이 할머니가 너무 힘겨워 하는 것 같아서 집에 있는 휴지라도 실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시원한 물 한 컵을 들고 할머니에게 갔습니다. 할머니는 무거운 폐 휴지를 리어카에 실으시면서 '주여, 주여.....'하고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하루 벌이는 고작 삼천 원 정도랍니다. 그 삼천 원 에서 십일조도 떼시고 감사헌금도 하신다고 합니다. '저 분의 저 피땀 어린 귀한 헌금이 목회자인 나의 사례비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순간 저는 온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그 할머니만 생각하면 '과부의 헌금'(12:41-44, 21:1-4)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받으시는 예물은 거만하게 바치는 많은 예물이 아니라 적어도 겸손하게 바치는 예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표면으로 드러난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의 용모와 신장을 보고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합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도 물론 그 사람의 모습이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다. 물론 이것을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겉모습만큼 속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도 그만큼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인 성향들은 겉모습을 가꾸는데 치중하게 할 뿐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판단의 잣대를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육체적인 약함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오히려 위안을 얻고, 힘을 얻는다는 점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감으로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보여주는 이들에게 '고맙다'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우리가 고침 받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장애가 있으면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이들을 바라보는 눈을 고치고, 동시에 우리의 비뚤어진 마음, 올곧지 못한 마음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제가 꽃 사진을 담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예쁘게 담을까 골몰하고, 예쁜 꽃만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을 정말 사랑하게 되고, 그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부터는 예쁜 꽃보다는 못생긴 꽃, 척박한 곳에 피어난 꽃, 주변에 흔하게 피어있지만 잡초취급을 당하는 꽃을 찾아 다녔습니다. 예쁜 꽃이 의미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꽃을 바라보니 작고, 못생기고, 흔한 꽃들 속에도 예쁜 꽃과 다르지 않은 속성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은 외적인 모습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그릇 안에, 하나님을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무엇인데, 다른 피조물들과 비교해봐도 문제투성인데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은혜로 여기는 사람은 신약성서의 이야기로 하자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가 끊임없이 삶의 향기로 드러나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외향중심적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가벼운 사회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중심을 가꾸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 중심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갈등하게 됩니다.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에 시커먼 흑심을 품고 있는 이들은 잘나가는 것 같은데, 진실되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그로 인해 이런저런 상실감 같은 것들이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우리가 감당하고 걸어가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겉으로 얼마든지 거룩한 사람인척 할 수 있습니다.

『숲 생태학 강의』, 『열려라 꽃나라』, 『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 『숲의 생활사』, 『나무의 죽음』, 『다시 걷고 싶은 우리 숲』, 『신갈나무의 투쟁기』등의 책을 쓴 생태가 혹은 숲 해설가로 이름이 알려진 차윤정이라는 생태학자가 있습니다. 저도 생태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자연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를 좋게 봤습니다

그런데 14일자 신문을 보니 그가 4대강추진본부환경 부본부장 겸 홍보실장직을 맡게 되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순간, 그녀가 지금까지 취해온 행보는 철저하게 돈과 명예를 위한 행보였다는 것, 그 동안 내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그의 마음 중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신갈나무는 돈벌이의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일 나무에 대해서 숲에 대해서 정말 알고 사랑한다면 그런 자리는 정중하게 거절해야 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토목공사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속이 상하고 뜻이 안 맞아도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완전히 속았다는 배신감 같은 것 때문에 그녀의 책들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정말 생태운동가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구나 착각을 한 것이죠. 언젠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 마음 중심이 속속들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 서면,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이 부끄러운 것들까지도 다 드러날 것입니다.

신앙인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뭔가 다르겠지기대를 하고 보았는데, 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은혜로워서 역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달라했는데 속내를 보니 자기들보다도 더 추한 모습을 볼 때 분노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겉모습을 치장하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가꾸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변합니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 변화가 되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마음중심을 바로 잡는데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지만 즐거운 길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매 순간, 늦은 때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중심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았는지, 남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무엇으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했는지 하나임 앞에서 솔직하게 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을 보고 하나님이 환한 웃음을 지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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