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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쓸모있는 연장인가?(딤후 2:20-21)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5-26 (수) 10:46 13년전 5286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성경에 '질그릇' 또는 '토기장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말씀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 외에도 고린도후서 4 :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하는 말씀과 이사야서 64:8절에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라는 말씀, 이사야 45:9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그릇 조각 하나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툰다는 내용 등이 있습니다.

1995년 11월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니 15년이 넘었습니다. 요즘 이전의 목회를 돌아보고 향후 10년을 계획하면서 저에게 주어진 화두 같은 단어가 있다면 "질그릇"이라는 단어입니다.
돌아보니 나의 모든 삶이 어쩌면 '질그릇'을 치장하는 삶이었으며, 무모하게도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되지 못해 안달하는 삶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 인하여 기뻐하고, 필요하다면 질그릇을 깨뜨려서라도 그 안에 감추인 보배,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살았어야 하는데 보배는 안중에도 없고 질그릇, 언젠가는 개어져버릴 그릇을 치장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금그릇이나 은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막사발을 만드는 사람이요, 항아리를 만드는 사람이요, 질그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의 특징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불완전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이나 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늘 사도 바울의 탄식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간직한 보배로 인하여" 미완의 존재지만 "완전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본질은 질그릇이 아니라 질그릇 안에 감춰진 보배인 것이죠. 그런데 보배를 드러내고, 보배를 빛나게 하는 삶이 아니라 허상, 겉으로 드러나는 질그릇을 드러내고, 그것을 꾸미기 위해 살아가니 본질과 비본질의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요, 그로 인해 비인간화된 삶을 강요당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주신 말씀 디모데후서 2:21절에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된다"고 하십니다. 깨끗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는데 "선한 일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하나님도 좋아하시는 일이요, 자신이 싫어하는 일이 하나님도 싫어하시는 일"인 사람,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선한 일, 그것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요, 깨끗하게 되면 귀하게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금그릇, 은그릇이 되면 귀하게 사용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되면" 귀하게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입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큰 집'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 상징성 중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종 그릇이 상징하는 바는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요, 직분을 맡은 이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느 그릇이 더 우월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각 그릇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릇이냐가 아니라 "깨끗하냐,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보다도 "어떤 그릇이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제주도에는 '골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지로 치면 '호미'같은 것인데 굉장히 날렵한 것이 마치 작은 낫처럼 생겼습니다. 김을 매거나 조개를 캘 때, 해산물 채취를 할 때 아주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호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돌많은 제주땅에서 호미는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골갱이가 연장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됩니다. 제주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어떨까요?
오히려 골갱이라는 존재는 생소한 것이요, 일반적인 것이 호미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골갱이가 어떤 곳에서는 호미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호미든 골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용도에 따라 사용하고자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도 제주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텃밭을 가꿔 교인들이 공동식사를 할 때의 식탁과 가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곤했습니다. 교회에는 잔디밭도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는 잡초를 뽑느라 분주합니다. 이때 주로 골갱이를 사용하는데 간혹 골갱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찾다가 못 찾으면 자루가 흔들거리는 골갱이라도 있으면 불편해도 그것을 사용하고, 호미가 있으면 그것을 사용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바로 들어 쓰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에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쓰시고자 할 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는 시급한 상황입니다.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못하더라도 다른 것을 들어 쓰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릇이든, 어떤 연장이든 그 종류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깨끗한가? 준비가 되어있는가?"이것이 중요한데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지금 나는 쓸모 있는 연장인가?"하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옛날에 쓸모 있는 연장이었어, 또는 앞으로 쓸모 있는 연장이 될 거야"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쓸모 있는 연장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로, 연장은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됩니다.
연장이 주인이 손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연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자꾸만 우리의 뜻만을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도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 많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주인의 뜻대로 사용되길 거부하고 주인을 움직이려는 연장 때문에 그리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인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어지는 연장이 되십시오. 그러면 큰 일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용될수록 연장은 빛납니다.
한 동안 창고 구석에 놓여있었던 골갱이를 보니 녹슬고, 자루도 삭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손떼가 묻은 연장은 비록 달았어도 녹슨 구석도 없고 자루도 손떼가 묻어 단단합니다. 지금 막 밭에 나가야 하는데 어떤 걸 쓸까요?
쓸모 있는 연장, 그것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일에 사용되면, 주님의 도구가 되어져 헌신하면 달아 없어질 것 같은데 더욱 더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맛을 아는 사람들, 그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또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녹슬지 않고 사용되어지지 않는 연장보다 더 오래 빛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손에 맞는 연장이 있습니다.
저 혼자 텃밭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가꾸고, 아이들도 흙을 만지게 합니다. 더군다나 교회 잔디밭은 교인들과 함께 가꿉니다. 그러다 보니 골갱이가 많이 필요해서 오일장에 나가 몇 개 구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과 함께 잔디밭에 잡초를 뽑을 때면 밭일을 별로 안하는 교인들은 아무 골갱이나 들고 일하는데 늘 밭일을 하시는 권사님들은 집에 가서 자신이 사용하는 골갱이를 가져오십니다. 아무 표시가 없는 것 같은데 손에 잡아보면 본인의 것인지 아닌지 영락없이 아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내 손에 쥐여지는 골갱이, 내가 찾는 골갱이가 있습니다. 그걸로 일하면 손도 편하고. 일도 능률이 오릅니다. 물론 다른 것을 가지고도 할 수는 있지만 나는 내 손에 맞는 연장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손에 얼마나 잘 맞는 연장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손에 맞는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수많은 교회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맞는 연장, 그래서 하나님 손에 들려 사용되는 연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손에 들려진다는 것은 우리 삶이 기적의 삶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의 손에 오병이어가 들려 지니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가 쓸모 있는 연장이 되어 하나님 손에 들려지면 거기에서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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