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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박쥐> - 지옥에서 나가기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10-06-25 (금) 12:51 13년전 5368  

                                                <박쥐> - 지옥에서 나가기  



<박쥐> - 지옥에서 나가기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 대한 세간의 평이 극단적으로 나뉘면서 영화 <올드보이>로 2004년 제57회 깐느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쥐었던 그가 과연 이번에도 깐느영화제에서 수상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올드보이>가 수상한 심사위원대상 이상의 상을 <박쥐>가 수상하리라 기대해 본다. 어쩌면 <밀양>의 전도연에 이어 김옥빈의 여우주연상 수상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김옥빈의 연기는 훌륭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가 친구의 아내와의 치정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는 자극적인 설정으로 <박쥐>는 제작단계에서부터 이미 화제를 모았다. 막상 영화가 개봉되어 작품의 뚜껑이 열리자 영화를 본 관객들과 평단의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역시 박찬욱이라며 거장의 걸작이라고 감탄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기대에 못 미친 수준미달의 작품이라는 쪽도 있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이 달라질 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영화의 미장센을 통해서 미적 아름다움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박찬욱의 <박쥐>는 그의 이전 어느 영화 못지않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영화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말하고 싶어 하는 주제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영화가 어떻게 그 주제를 영상과 음악, 그 외 영화적 도구들을 통해 스크린 위에서 잘 풀어 나갔는지, 그리고 그런 작업들이 얼마나 관객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지에 촛점을 두고 영화를 살펴본다면 영화에 대한 평은 또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쥐>는 욕망과 구원에 대한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를 줄곧 생각했다. 이 영화가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며 볼 수 있는 킬링타임용으로 만들어진 오락영화가 아니라고 한다면 감독은 분명 이 영화를 통틀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욕망>과 <구원>에 관한 영화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영화 <박쥐>의 영어제목은 Bat(박쥐)가 아니라 Thirst(갈증)이다. "나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라는 신부 상현의 말이 이 영화가 욕망과 그로부터의 구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억압된 자유와 성(性)에 대한 갈증, 그리고 피에 대한 갈증, 그 갈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 영화 <박쥐>의 주제다. 과연 무엇이 구원인가?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디테일하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소 논의가 달라질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으로부터 사람을 구하여 주는 일> 혹은 <고통과 죽음과 죄악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영화 <박쥐>는 분명 <구원>을 주제로 삼는 영화임에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 줄게요>

우선 영화 포스터의 메인 카피를 보자. 사제복을 입은 신부 상현(송강호)가 놀란 눈의 태주(김옥빈)을 끌어안고 있는 포스터 사진에는 이런 카피가 실려 있다.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 줄게요> 뱀파이어가 된 신부 상현이 감옥살이같이 무료하고 갑갑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픈 태주에게 건네는 이 말은 이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핵심키워드이다. 영화 속 태주에게 구원이란 병약한 남편의 수발을 들며 채워지지 못한 성적욕망을 억누르며 남편과 시어머니의 애완견으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태주는 그 해방감을 잠시라도 맛보기 위해 몽유병환자처럼 밤이면 밤마다 맨발로 골목길을 달린다. <난 맨발로 막 나가요. 이 지옥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나가요. 쟤네들은 내가 우울증인줄 알지만 그 시간이 난 깨어 있는 것 같고 나머지 시간이 자고 있는 것 같아요> 태주의 한복집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성적으로 탐하는 장면에서 상현에게 하는 태주의 이 말은 그녀가 삶속에서 간절히 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태주는 어려서부터 <캄캄한 집구석, 병신아들, 그리고 끝도 없이 질질 짜는 뽕짝들>이 너무너무 지겨웠다. 태주는 고아가 된 세 살때부터 주인집(강우집)에 얹혀살면서 병약한 주인집 아들의 애완견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신부 상현은 어느 날 밤, 밤길을 달리던 태주를 어둔 골목길에서 마주친다. 상현은 태주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어 신겨줌으로써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선물하고픈 자신의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상현이 자신의 신발을 벗어 태주에게 신겨주는 이 장면은 영화의 복선이 깔린 장면이다. 신발은 새로운 길과 떠남에 대한 상징이다. 뱀파이어가 된 두 사람이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태주는 상현의 신발을 꺼내 신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태주가 상현과 함께 죽음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떠나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골목길에서 상현이 태주에게 신겨준 신발이 <욕망을 억누른 채 지옥같이 갑갑한 삶>을 살아가는 태주에게 <욕망을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안겨주고픈 상현의 배려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을 앞둔 태주가 상현의 신발을 꺼내어 신는 것은 <산자를 죽여 피를 먹어야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지옥 같은 뱀파이어의 삶>에서 죽음을 통해 <자유한 세상>으로 떠나가는 것을 상징한다.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께요> 상현의 이 말은 병약한 남편의 자위행위까지 도우며 애완견처럼 살아온 태주의 <지옥 같은 삶>과 뱀파이어가 된 이후 산 자를 죽여 그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지옥 그 자체인 삶>에서 태주를 구원하고자 하는 상현의 약속이 담긴 말이다.

<상현의 관심은 고통 받는 인간의 구원이다>

내가 이 영화를 <구원>을 주제로 삼은 영화로 보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영화의 첫 장면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병상에 누운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30년 전 자신이 베푼 선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효성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30년 전 길에서 만난 배고픈 오누이에게 자신이 먹으려던 카스텔라를 건네 준 자신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과연 기억하고 계실지를 상현에게 묻는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이 환자가 죽음 앞에서 물은 이 질문은 과연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한 물음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베푼 선행을 기억하고 계신가? 길에서 만난 배고픈 오누이에게 자신이 먹으려던 카스텔라를 선뜻 건네준 30년 전의 그 일을 하나님은 과연 지금도 기억하고 계실까? 절대자인 신 앞에 선행을 쌓음으로써 신의 호의에 힘입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고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인과응보적인 사고다. 환자의 이 물음에 대해 신부 상현은 "당근이죠. 기억은 그 분 장기에요"라고 답해줌으로써 환자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신부 상현의 입을 통해 환자는 자신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심으로써 자신이 베푼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영혼이 신의 자비아래 놓일 것을 믿고 마음에 안심하게 된다.
상현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구원을 염려하는 환자에게 사제로써 구원을 약속하고 보증한다. 그리고 곧 이어 그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다며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인간의 생명을 구원할 신약을 개발하는 엠마누엘연구소의 생체실험에 자진해서 지원한다. 엠마누엘연구소로 떠나는 상현을 만류하는 원장신부에게 상현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 살리는 일 하고 싶어요" 이렇듯 상현의 관심은 고통 받는 인간의 구원이다.

<딜렘마 - 사람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람의 피를 먹을 수 있는가?>

엠마누엘연구소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 이브에 감염된 채 죽음의 문턱을 넘던 상현은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 받고 기적적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상현은 엠마누엘 연구소 지원자 500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붕대감은 성자"로 불리며 신비한 치유의 능력을 가진 자로 숭배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상현은 병원에 입원한 어린 시절의 친구 강우와 그의 아내 태주, 그리고 강우의 엄마 라여사를 만나게 된다. 상현과 강우는 초등학교 동창이고 태주는 세 살 때 부모에게 버려진 이래 강우의 집에서 "딸처럼 강아지처럼" 키워져 지금은 강우의 아내가 되어 있다. 강우의 집에 처음 초대받은 날, 상현은 태주의 생리혈에서 피에 대한 갈증을 처음 느끼게 된다. 그 날 이후 상현은 피를 먹지 않으면 체내의 이브바이러스에 의해 살갗에 수포가 돋아나고 껍질이 벗겨지다가도 피를 먹으면 다시 감쪽같이 피부가 깨끗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가 된 것에 대해 당혹해 한다.

상현은 그 후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환자의 전대사(임종성사)를 베풀며 처음으로 산 자의 피를 맛보게 되고 영화 첫 장면에 나왔던 효성이라는 남자의 피를 빨아 먹음으로써 본격적으로 뱀파이어의 삶을 살게 된다.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환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신약개발실험에 참가했던 상현은 이제는
도리어 사람의 피를 먹지 않고서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람의 피를 먹을 수 있는가? 사람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로서의 생존본능과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사제로서의 양심 사이에 갈등하며 상현은 링거 주사를 맞는 환자의 피를 거꾸로 뽑아내 용기에 담아가지고 다니면서 뱀파이어의 삶을 연명해 간다.  타인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했던 상현은 이제 제 자신의 목숨을 타인의 피(죽음)에 의지해야 하는 딜렘마에 빠지고 만 것이다.

<억눌린 욕망의 해소가 구원인가?>

사제이기 때문에 또 성적인 불구자와 같은 남편 때문에 억눌러왔던 두 사람의 성적욕망은 태주가 상현을 병원으로 찾아 온 날 봇물처럼 터지고 두 사람은 효성의 병실에서 서로의 육체를 갈구하게 된다. 상현은 태주의 목덜미를 깨물어 상처를 내고 그 피를 핥으므로 태주와의 섹스가 단지 태주의 육체를 탐하는 것만이 아니라 뱀파이어로서 그녀의 피를 갈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병실에서의 섹스씬이 관능적이기 보다 긴장감을 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날 상현의 고백으로 상현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태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상현에게서 도망가나 며칠 후 상현과의 통화에서 상현을 통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뱀파이어는 어떻게 해서 되는 거예요? 섹스를 통해서는 전염 안 되나? 나도 좀 만들어 주면 안돼요?>

상현을 다시 만난 태주는 500원짜리 동전을 종이처럼 찢어버리는 상현의 괴력을 보고 상현더러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한다. 광야에서 마귀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 보라고 했다. 마귀의 이 시험은 예수로 하여금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숭배의 대상이 되어보라는 유혹이다. 천사들의 손이 네 발을 받들어 땅바닥 돌에 부딪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네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줘라. 네 신적인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네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라는 이 유혹은 자기 자신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구주로 스스로 믿게끔 만드는 오만의 덫이다. 예수는 이 유혹을
뿌리쳤다. 그러나 상현은 태주를 안고 건물 옥상에서 가뿐히 뛰어내린다. 이것은 상현 자신이 태주를 지옥같은 삶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세주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현이 태주를 품에 안고 옥상에서 아래로 날아서 떨어질 때 태주의 표정은 희열 그 자체다. 이 장면에서 김옥빈의 표정연기는 압권이다. 김옥빈의 얼굴에서 영화 속 태주가 느끼는 자유와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다.

태주를 안고 계단을 오르다가 상현은 우연찮게 태주의 허벅지에 난 상처를 본다. 그 상처가 강우에 의한 것인 줄로 착각한 상현은 <내가 강우를 아까 그 동전처럼 만들어줄까요?>라고 태주에게 묻는다. 사실 태주의 허벅지에 난 상처는 태주가 자신의 성적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실밥 뜯는 가위로 스스로 자해한 탓에 생긴 것이다. 그 내막을 알리 없는 상현은 강우의 짓인 줄로 알고 분노한다. 태주는 분노하는 상현의 목을 가만히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요 그 사람들 강아지로 살았어요. 남편 자위하는 것까지 도와주면서. 아시죠? 나는 거의 처녀나 다름 없어요> 태주는 강우를 향한 상현의 분노와 자신을 향한 상현의 성적욕망을 이용해 남편을 제거함으로써 지옥 같은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결국 상현과 태주는 강우와 함께 댐저수지로 밤낚시를 가게 되고 사고를 가장해 강우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이로써 태주는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찾은 듯 했다.

<지옥에서라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랑>

만약 강우의 죽음 이후부터 두 사람이 거침없이 서로를 성적으로 탐닉하는 애정행각 쪽으로 영화가 흘렀다면 이 영화는 삼류 치정멜로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친구의 아내를 탐한 나머지 친구를 죽이고 친구의 아내를 빼앗은 뱀파이어 신부의 치명적 사랑 운운…,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강우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언어상실증에 걸린 라여사의 생일파티자리에서 태주는 상현에게 뺨을 얻어 맞는다. 라여사에게 버릇없이 굴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상현에게 뺨을 얻어맞은 태주는 죽은 강우는 자신에게 손 한번 대지 않았다고 무심코 말한다. 이 때 비로소 상현은 태주의 허벅지에 난 상처가 강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우를 죽인 자신의 살인행각이 태주에게 감쪽같이 속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 상현은 분노한다. "강우가 손댔어? 안댔어? 걔는 그것 때문에 죽은 거야.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사람 안 죽이려고. 뱃속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울부짖는데 행여 사람 다칠까봐 걸음까지 살살 다녔어! 너 때문에 무너진 거야, 널 구하려고." 자신의 거짓이 들통났음에도 모든 책임을 상현에게 떠넘기는 태주에게 분노한 상현은 마침내 태주를 목 졸라 죽인다. 순간의 분노와 배신감때문에 태주를 살해한 상현은 태주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다가
태주의 몸에 흐르는 피를 보고 갑자기 미친듯이 핥기 시작한다. 태주의 피를 빨아먹던 상현은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어 태주의 입에 가져다 대고 자신의 피를 빨게 한다. 죽은 줄 알았던 태주는 어느 순간 상현의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빨기 시작한다. 상현과 태주가 서로의 피를 미친듯이 빠는 이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섬뜩하고 충격적인 장면이다. 상현의 피를 정신없이 빨아대던 태주는 마침내 뱀파이어로 부활한다. "Happy Birthday, 태주씨!"

상현이 태주를 뱀파이어로 부활시키는 이 장면은 태주를 향한 상현의 사랑이 단지 성적인 욕망때문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 장면,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상현이 태주에게 말한다. "태주씨랑 오래 오래 살고 싶었는데…지옥에서 만나요" 이 말 속에 태주를 행한 상현의 진심이 담겨있다. 분노와 배신감에 태주를 목 졸라 죽였지만 곧 자신의 피를 나누어줌으로써 상현이 태주를 뱀파이어로 부활시킨 것은 비록 <산 자의 피를 빨아먹어야 살 수 있는 지옥 같은 삶 속>일지라도 영원히 태주와 함께 하고 싶은 상현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지옥에서라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랑, 그것이 태주를 향한 상현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상현의 이 사랑을 비웃기라도 하듯 태주는 피에 굶주린 진정한(!) 뱀파이어로 거듭나고 말았다. 태주는 상현과 달리 냉장고에 보관했던 피나 자살하려는 자가 자진해서 나눠주는 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산 자를 죽여서 그 피를 먹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뱀파이어가 되었다. 피를 구해다 줄 테니 더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상현의 당부에 태주는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여우가 닭잡아 먹는 게 죄냐?" "냉장고 속의 피, 자살하는 자의 피나 먹는 주제에…"라며 상현을 조롱하고 우리는 "인간 먹는 짐승이야"라며 상현과 결별할 것을 선언한다.

<변질된 신앙을 위한 영혼의 순교>

매주 수요일마다 강우의 집에서 열리는 마작모임에서 강우엄마 라여사를 통해 마침내 강우 죽음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죽.였.다. 간신히 까딱할 수 있는 손가락으로 손톱에 피멍이 들어가며 몰래 쓴 이 세 글자를 통해 사고사인줄 알았던 강우의 죽음이 사실은 상현과 태주에 의한 살인이었음이 밝혀진다. 두 사람의 살인행각이 드러나자 태주는 사실을 알게 된 마작모임 멤버들을 하나 둘씩 살해하고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경찰의 조사를 피해 집을 떠나야 한다며 태주와 강우엄마를 차에 태우고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 차를 몰고 가던 중 상현은 자신이 일하던 병원 앞에 잠시 멈추어 선다. 그곳은 상현을 "붕대감은 성자"로 숭배하며 상현에게 치유의 기적을 갈구하던 사람들이 주야로 텐트를 치고 상현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곳이다. 상현은 한 텐트 속에서 여자환자를 강간하려 든다. 여자의 비명소리에 놀라 깨어난 사람들은 강간범이 다름 아닌 신부 상현이라는데 충격을 받고 상현에게 돌팔매질을 해 쫓아버린다.  

내가 이 영화를 구원을 다룬 영화로 보는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이 대목이다. 신부 상현의 성기가 드러난 장면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은 이 장면은 상현역을 맡았던 배우 송강호가 밝혔듯이 신부 상현이 자신을 질병에서 구원해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제로서의 상현을 죽여 버림으로써
그들을 헛된 믿음에서 깨어나게 하는 순교적인 행위이다. 이 강간미수사건으로 상현은 붕대감은 성자에서 졸지에 후안무치한 성폭행범으로 급전락하고 말았다. 상현에게 신적인 치유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상현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상현은 사제로서 가장 추하고 역겨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통해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신자들의 그릇된 믿음을 깨버린 것이다. 상현의 이 행위에는 헛된 믿음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허구적인 믿음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사제로서의 마지막 책임감이 담겨 있다. 허황된 믿음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포기되지 않는다. 상현은 구세주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상현 자신이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산 자의 피를 먹어야 생존 할 수 있는 뱀파이어가 몸속에서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현을 성자(聖者)로,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줄 구세주로 숭배하고 있다. 그들은 상현의 기도문을 마치 주문 외우듯이 외우며 주술적인 믿음에 빠져 있다. 기적에 대한 염원이 저들의 신앙을 변질시켰다. 저들의 이 헛된 믿음을 무엇으로 어떻게 깰 것인가? 상현은 자신의 죽음을 찾아가는 길에 자신을 병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구세주로 믿는 신자들 앞에서 사제로서 죽는 길을 택함으로써 그들을 헛된 믿음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였다. 돌팔매질을 당하며 쫓겨나는 상현의 입가에 보일 듯 말듯 스쳐 지나가는 미소가 상현이 대체 무슨 이유로 성폭행을 시도했는지를 알 려 준다.

<자기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

내가 이 영화의 주제를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마지막 이유는 바로 영화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닷가 절벽위에서 뱀파이어인 두 사람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으며 새까맣게 타들어가 산화하는 장면인데 근래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가슴 뭉클한 라스트 씬이라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태주와 그녀를 끝내 죽음으로 데려 가려는 상현의 사투가 벌어진다. 결국 더 이상 죽음을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은 태주는 상현과 함께 자동차 앞 본닛에 나란히 걸터앉아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 때 태주는 가방에서 상현의 구두를 꺼내어 신는다. 맨 발로 어둔 밤골목을 달리던 자신에게 상현이 신겨주었던 바로 그 구두다. 신발은 새로운 세계로의 길과 떠남을 상징하는 것이다. "태주씨랑 오래 오래 같이 살고 싶었는데 …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동터오는 태양의 강렬한 빛 아래에서 두 사람의 얼굴과 온 몸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태주는 울부짖는다. 상현은 울부짖는 태주를 꼭 끌어안고 두 사람은 함께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산 자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지옥 같은 뱀파이어의 삶,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게요> 상현은 붉게 타오르며 떠오르는 태양 빛 속에서 태주와 함께 한 줌의 재로 산화하며 태주에게 한 이 약속을 이룬다. 구원은 자기죽음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인을 희생시켜야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고 그 희생자의 피를 먹어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거기가 바로 지옥이다. 지옥은 살인과 간음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 사후에만 가는 곳이 아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해치고 그 희생을 대가로 자유와 희열을 얻는 곳이라면 그곳이 죽음 이편에 있든 저편에 있든 어디에 있든지 거기가 바로 지옥이다. 내가 살기위해 타인을 희생시켜야 하는 곳, 타인의 피를 빨아서 내 배를 채워야 하는 곳, 그래야 살 수 있는 곳, 거기가 바로 지옥이다. 상현과 태주는 이미 지옥에 살고 있었다. 이 지옥에서 나가는 길이 바로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끝내는 죽음이다. 상현은 태주를 이 세상 지옥으로부터 데리고 나간 것이다. 그 둘이 과연 어디로 갔을지, 지옥으로 갔을지 아니면 또 다른 어디엔가로 갔을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바닥으로 툭 떨어져 절벽 위에 남겨진 상현의 구두 두 짝, 그리고 그 속에 남겨진 까맣게 숯덩이가 되어 부러진 태주의 발,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은 그 두 사람이 그 곳이 어디든 더 이상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산자를 죽여 그 피를 먹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함께 떠나갔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뱀파이어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세상, 무한경쟁, 적자생존, 아비귀환, ---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뱀파이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줄게요>

(2009.5.24)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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