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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설교에 대해 교인들의 이해를 바라는 점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10-06-25 (금) 12:57 13년전 5602  

                             
                                목사의 설교에 대해 교인들의 이해를 바라는 점

 

말씀을 가리키는 성서의 말에 케리그마와 레마가 있습니다. 케리그마(Kerygma)는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케루소’(kerusso)라는 헬라어 낱말에서 나온 명사로서 시대와 장소, 청중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진리를 말합니다. 이 말은 전령관으로서 공적인 명령을 선포하는 임무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레마(Lema)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특정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개별적인 개인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쉽게 그 차이점을 말하자면 케리그마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의지에 작용하는 말씀이고, 레마는 구체적인 개인의 상황과 감성에 작용하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주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 누구라도 들어야 할 말씀 곧 케리그마입니다. 그러나 간음하다 붙들려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말씀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와 죽음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특정한 상황 아래의 여인에게 주신 레마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교회 강대상 위에서 하는 설교와 교인 개개인에게 전하는 설교입니다. 전자는 주일예배나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등에서 하는 설교이고 후자는 주로 심방이나 상담시 하는 설교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설교는 특정 교인의 개별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특정인이 대상이 아니므로 청중 모두가 대상입니다. 어느 시대 누구라도 들어야 할 하나님의 보편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강대상 위에서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강대상의 설교는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너희도 사랑하라" 이 말씀은 케리그마입니다. 시대, 장소, 인종을 불문하고 세상이 들어야 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뜻은 케리그마인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에게 그 말씀이 적용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사무치는
미움을 가지고 있을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케리그마의 말씀을 교회에서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그 사람이 그날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음속에 원수에 대한 미움을 청산하고 원수와의 화해를 결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 순간이 케리그마가 레마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케리그마를 아무리 귀가 따갑게 들어도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가득한 원수에 대한 미움을 조금도 지우지 못한다면 그에게 말씀은 케리그마로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으로 육화(肉化)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에게 말씀은 늘 귓전만 울리다 마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가슴을 울리고 내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씀을 케리그마로 듣는 것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상황과 주관적인 체험의 벽에 갇혀 케리그마를 케리그마로 듣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이를 갈고 결국 그를 돌로 때려죽인 이유는 스데반이 전한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케리그마가 자신들의 경험과 이해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이단으로 알고 십자가에 죽인 자신들의 과거경험의 벽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케리그마를 듣기조차 싫어했으며 결국 그 케리그마를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여 버렸습니다. 케리그마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거부의 모습이지요. 반면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똑같은 케리그마를 전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그 말씀을 자신들에게 주시는 레마로 받아들임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얻고 죄 사함을 얻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처럼 케리그마를 레마로 들을 수 없다면 최소한 케리그마를 케리그마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원장으로 최근 기독교사상에 한국교회 내노라하는 설교자들의 설교에 대한 비평으로 교계에 관심을 끈 정용섭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회적인 심정과 공적인 설교와는 구별해야 한다. 설교는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전하는 게(포퓰리즘)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전하는 것(신탁)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목사로서 교인들이 구분해주었으면 하는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교인을 향한 목회적 심정과 강대상위에서의 설교는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목사는 이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목사는 청중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나 주워 삼키는 영적포풀리즘에 빠지기 쉽고 교인들은 제 귀에 듣기 좋은 달콤한 소리나 들으려고 하는 영적 당뇨병자가 되기 쉽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교인에게 심방을 갈 경우 목사는 한나처럼 "기도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소망을 주는 설교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주는 소망과 격려를 담은 레마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강대상 위에서 "기도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선포하면 그것은 잘못된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시대와 장소, 개인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 하는 케리그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아이를 주지 못해서 불임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교우도 예배 드리는 청중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의 그 설교는 결국 "네가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은 한나처럼 기도하지 않아서다"라는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고 소망을 주어야 할 설교가 결국 아이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 영적인 자책감과 열등감만 갖게 할 것입니다. "기도하면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교인에게 위로의 레마로 전해야할 말씀이지 주일날 강대상 위에서 청중들을 향해 보편적인 진리로 선포해야 할 케리그마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목사가 사업하는 교인에게 심방 가서 그의 성공을 빌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서 사업 성공하고 축복 받으라고 설교하지 그럼 뭐라고 설교하겠습니까? 그러나 강대상에서 예수 믿으면 사업이건 장사건 무조건 형통하고 성공한다고 선포하면 그것은 잘못된 설교입니다. 왜? 우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이 아니라 도리어 희생과 낮춤과 비움이었기 때문이고, 둘째,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삶의 벼랑 끝에 몰리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은 예수를 잘못 믿어 그렇다는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는 말은 목회적 심정으로 목사가 교인 개개인을 축복하며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서 전할 수 있는 레마의 말씀이지 주일마다 강대상 위에서 주문처럼 외워야 하는 케리그마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북한에 대한 개인적인 아픔과 상처, 그리고 분노와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청중들을 앞에 놓고도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설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케리그마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란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21세기 남한의 크리스챤들은 듣고 따르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케리그마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 누구를 막론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케리그마입니다. 그 케리그마를 내가 레마로 받아들여서 실천하느냐가 우리에게 믿음의 숙제로 내게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빨갱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김홍도 목사류의 설교처럼 목사가 원수에 대한 반목과 증오를 부추기고 적대감에 부채질을 하고 갈등과 원수의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것이 과연 목사가 강대상에서 전해야 할 예수의 가르침, 케리그마입니까? 아무리 원수가 미워도, 설사 목사 그 자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할지라도 강대상 위에서 목사의 설교는 케리그마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 말씀을 내가 당장 내게 적용해서 오늘부터 내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할 지라도 케리그마를 케리그마로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케리그마를 내 삶에 육화되도록 기도하고 애를 쓰고 힘을 쓰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마음가짐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길입니다.  

원수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심방을 가면 어느 목사라도 그의 마음에 가득한 미움과 분노라는 쓴물을 위로하고 원수에게 입은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의 상처에 동정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의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도록 그에게 위로와 용서의 마음을 가지는데 도움을 주는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대상 위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비록 원수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청중 앞이라 할지라도, 혹은 설교자 자신에게 원수에 대한 미움과 상처가 있다할지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케리그마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입니다.

설교자인 목사도 사람인데 한 번 두 번 설교한 뒤 안색이 변하는 교인의 모습을 보게 되면 설교자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의 케리그마를 양심껏 힘 있게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아니라 그저 교인의 눈치나 보며 안색이나 부지런히 살피고 교인들 듣기 원하는 귀에 달고 입에 발린 소리나 주어 삼키는 영적인 간신배가 되어가게 됩니다. 예레미아 시대 신앙이 타락하고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사람들더러 평화로다 평화로다 노래를 불렀던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을까요? 제 귀에 단 소리나 들으려 할 뿐 예레미아 같은 선지자에게는 뺨을 치고 침을 뱉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런 거짓선지자들을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가 어떤 목사이길 바라십니까?  

(2009.6.25)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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