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나를 지키는 집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10-06-25 (금) 13:05 13년전 5457  


                                                       나를 지키는 집



다산 정약용이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년)으로 경북 장기(現 영일)에 유배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맏형 정약현이 평소 자신의 서재에 “나를 지키는 집(守吾齊)”이라고 써 붙여 놓은 까닭이 불현듯 깨달아졌습니다. 정약용은 그날의 깨달음을 <守吾齊記>라는 제목으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남겼습니다. “대체로 천하 만물이 모두 지킬 필요가 없는데,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떠메고 도망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머리에 이고 달아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집도 지킬 필요가 없다. 내 동산의 꽃나무, 과실나무 등 나무들을 뽑아갈 수 있을까?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혀 있다. 내 책들을 훔쳐다가 없애버릴 수 있을까? 성현들의 경전은 세상에 물이나 불같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니 그것을 누가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러니 천하의 만물을 모두 지킬 필요가 없다.
  유독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길 잘하며 들고남이 무상하다. 비록 친밀하기 짝이 없어 바싹 붙어 있어서 배반할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익과 벼슬이 유혹하면 가버리고, 위세와 재앙이 두렵게 하면 가버리고,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흐르는 것을 들으면 가버리고, 푸른 눈썹 하얀 이(齒)의 아름다운 미인의 자태를 보면 가버린다. 가서는 돌아올 줄을 모르니 잡아도 끌어올 수가 없다. 그러니 천하에 ‘나’처럼 잃기 쉬운 것이 없다. 굴레를 씌우고 동아줄로 동이고 빗장으로 잠그고 자물쇠를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정약현은 정약용의 배다른 맏형입니다. 정약현의 세 아우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은 모두 천주교 서학(西學)을 믿는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므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이 정약현의 매부이고 조선 천주교의 기초를 놓은 이벽(李檗)이 처남입니다. 그리고 조선천주교의 박해상황을 중국을 통해 해외에 알리려했던 이른바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황사영이 정약현의 사위입니다. 온 집안이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만으로 풍비박산이 나는 상황 속에서 정약현은 집안의 장남으로서 종가를 지키며 집안을 지켜내었습니다.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정약용은 문득 형님 정약현이 미친 듯이 권력이 칼춤을 추던 세상 속에서도 자신과 집안을 의연하게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켰던 데에 있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허술하게 간직하였다가 ‘나’를 잃어버린 자다. 어려서는 과거합격이라는 명예가 좋게 보여서 빠져 헤맨 것이 십 년이었다. 마침내 처지가 바뀌어서 조정의 항렬에 나아가 검은 사모에 비단 도포를 꿰고서는 벌건 대낮의 큰 길 위를 미친 듯이 이러기를 십 이년이다. 또다시 처지가 바뀌니 한강을 건너고 새재를 넘어, 친척을 이별하고 선산도 버리고서 곧장 넓은 바닷가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달려와서야 멈추었다” 정약용은 권력의 향배에 따라 부침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명예와 권력을 향해 달음질한 자신의 삶이 결국은 참 자신을 잃어버린 세월이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 큰 형님만이 당신의 ‘나’를 잃지 않으시고 편안히 단정한 모습으로 ‘나를 지키는 집(守吾齊)’에 앉아 계셨다. 평소부터 지키셨기에 잃지 않으실 수 있던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그 분이 당신 서재의 이름을 ‘수오재(守吾齊)’라고 지은 까닭이었구나! …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무엇을 지키는 것이 큰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크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성실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을 미쳐 돌볼 겨를도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뛰니 왜 나도 뛰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일단 함께 뜀박질하고 봐야 합니다. 뛰지 않으면 낙오되는 듯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내게도 꼭 필요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염원하는 것을 나또한 갈망해야 하는 지 생각해 볼 여유가 없습니다. 정말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진정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나’를 잃어버린 채 내게 ‘요구되는 삶’을 살기에 바쁩니다. 세상의 시류와 풍조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명예와 부와 권력의 바람에 겨처럼 생(生)이 날아다니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참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009.8.1)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