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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 예수님, 루저의 하나님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10-06-25 (금) 13:19 13년전 3655  


                                               루저 예수님, 루저의 하나님



최근 ‘미녀들의 수다’라는 TV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이 무심코 내뱉은 발언이 우리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22살 난 이 여대생은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실패자)라고 생각한다. 내 키가 170cm이니 남자 키는 최소 180cm는 돼야 한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밝혔습니다. 문제의 발언이 방송에 나간 이후 이 여대생은 ‘루저녀’로 불리며 여론의 호된 몰매를 맞았고 급기야 단지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실패자로 낙인 찍혀버린 ‘루저’들이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한 KBS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 여성이 자신이 선호하는 남자의 신체적 기준을 솔직하게 밝히는 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녀가 180cm이상을 좋아하든지 190cm이상을 좋아하든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취향의 문제이고 개인의 자유에 속한 문제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 짝을 찾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기준을 잘못되었다고 다른 사람들이 눈을 부라릴 일은 아닙니다. 키 작은 남자에 대한 한 여대생의 개인적인 호불호의 잘잘못을 따질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을 두고 문제의 여대생만을 사회적으로 매질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고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대학생이라는 우리사회의 지성(知性)조차 남자의 ‘키’ 자체를 ‘사회적 경쟁력’으로 보는 천박한 인식과 그런 인식을 배양한 우리의 왜곡된 사회현실에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무 주저 없이 ‘루저’(실패자)라고 규정하고 발언하고 있다는 데 그 심각함이 있습니다. 루저녀의 사고(思考)대로라면 키 작은 동양인은 키 큰 서양인과의 경쟁에서 늘 ‘루저’일 수밖에 없고, 몸집이 작은 여자는 몸집이 큰 남자에게 늘 ‘루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고와 발언은 인간을 단지 물적(物的)존재로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비인간적인 문화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의 가치와 경쟁력이 단지 키와 몸매, 얼굴의 생김새로서 우열이 결정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 사회라면 김태희 같은 얼굴이나 전지현 같은 몸매를 가지지 못한 여성은 대체 어디에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찾아야 할까요? 대부분의 여성이 ‘루저’가 되어야 합니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잘 다져진 몸매, 그리고 잘 생긴 얼굴을 가지지 못한 남성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발휘해야 할까요? 대부분이 ‘루저’의 자괴감을 곱씹으며 살아야 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는 대신 사회적 실패자라는 자괴감과 수치심을 안고 살게 될 때 그 사회는 서로에 대해 공격적인 암울하고 파괴적인 사회가 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루저’ 발언 이후 아르바이트 구직(求職) 포털 사이트 알바몬(www.albamon.com)에서 대학생 16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조사 결과 대학생 중 93.6%(남학생 90.3%, 여학생 95.7%)가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느낀다'고 대답했습니다. 젊은 대학생의 95% 가까이가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사회라면 그 열등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위너’의 조건을 정해놓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낙인찍으며, ‘위너’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게다가 그 ‘위너’의 기준이란 것이 키, 몸매, 얼굴 등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라서 개인의 노력으로 개선이 불가능하거나 극히 제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위너’와 ‘루저’를 가름하는 ‘기준’을 만들어내고 그 기준을 확대 재생산하는 그 사회의 문화주체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더 큰 책임은 ‘루저’ 발언을 한 여대생보다 여대생을 불러다 놓고 고작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느냐” 따위를 질문이라고 던지며 히히덕거린 방송사측에 있습니다. 미리 준비된 사회자의 그 질문 속에는 ‘키 작은 남자’는 키 170cm가 넘는 여성이 교제여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결격사유’를 안고 있음이 이미 넌지시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회구성원들 대다수에게 실패자라는 자괴감을 안겨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철부지 여대생의 사려 깊지 못한 답변을 여과 없이 방송에 내보낸 것은 분명 공영방송으로서 옳지 못한 처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루저녀의 기준으로 보면 ‘위너’였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던’(삼상9:2)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역사의 ‘루저’가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은 ‘위너’ 가운데 ‘위너’였습니다. 그는 키가 ‘여섯 규빗 한 뼘(대략 270cm)’(삼상17:4)이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 루저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나사렛 산촌에서 천직(賤職)이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수로 일해야 했던 예수님은 분명 사회적 ‘루저’였습니다. 그 분을 따랐던 갈릴리의 어부들도 ‘루저’였고, 예수께서 하늘나라에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가리키신 세리와 창기, 죄인과 병자들이 모두 다 그 사회의 ‘루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고전1:28)’ 곧 ‘루저’를 택하시고 그들을 진정한 생의 ‘위너’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루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루저’의 자괴감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위너’의 긍지를 심어주셨습니다. 키가 작아서,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루저’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진짜 인생의 ‘루저’입니다.

(2009.11.29)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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